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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체성 정치’는 불모의 무정부주의 한 사조이며 사실상 ‘비정치’인가?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1. 7. 19. 12:00

 

2021년 7월 10일2021년 7월 10일

 

 

* 이 글은 전국노동자정치협회가 발행하는 [맑스레닌주의 총서2]《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서문의 일부로 ‘정체성 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입니다.

 

1940년대 스탈린이 지도하는 소비에트 권력은 독일 파시즘에 맞서 승리하고 파죽지세로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렸다.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치열한 민족 해방 투쟁과 국제 파시즘에 맞선 소련 인민들의 승리는 수억 인류의 고난과 희생을 딛고 전 세계 진보적 혁명 운동을 최정상에 올려놓았다. 맑스·레닌주의 사상과 원칙에 가장 충실할 때 진보적 인류는 빛나는 정상에 올라섰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배반하고 혁명성을 상실했을 때 인류의 진보는 퇴보하고 혼란과 절망을 겪었다.

흐루쇼프 수정주의 배반자들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유로코뮤니즘으로의 후퇴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분열시키고, 성장하던 민족 해방 투쟁을 고립시켰다. 반면 대공황으로 빈사 상태에 빠졌던 제국주의 체제는 자신감을 갖고 사회주의 국가와 해방을 위해 싸우는 진보적 인류에게 반동적 공세를 취했다.

사상적으로도 맑스주의,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이 무너져 내렸다. 이때부터 국제적으로는 맑스주의, 맑스·레닌주의의 힘찬 전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기회주의 사상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혁명적 전망과 혁명적 현실성을 상실한 무정부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았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맑스·레닌주의의 창검 대신에 맑스주의의 위기를 운운하며 개인주의 담론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68혁명’이라 불리는 1968년 5월과 6월에 걸쳐 진행된 프랑스에서의 대대적인 투쟁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68혁명’의 영향을 받고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에서 부상했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젠더, 인종, 인권, 장애 등의 문제를 전면에 내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정치 권력을 장악해 평등 자유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보다는 비정치적으로 간주되곤 했던 일상적 차원의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새롭게 폭로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최원 철학자, 글로벌이슈 | 프랑스 68혁명 50년 |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표면적 실패’ 뒤에도 혁명은 계속되었다”, 신동아 2018년 6월호)되었다.

이처럼 ‘정체성 정치’는 사실상 ‘비정치’였는데, 이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과학적·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개별적 모순 해결을 체제와 사회 변혁의 문제와 분리하여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계급과 계급의식보다는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세대적 정체성이라는 분열의 장벽으로 피지배 계급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고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 부정적인 측면도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68년 ‘혁명’의 구호 중에는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가 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라는 러시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요구가 현실성 없는 요구로 힘을 잃고 생명을 잃었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상력이 부르주아 통치 체제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상력이 자본주의 범죄와 오물, 착취와 수탈과 억압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맡기느니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울지라도 이 체제를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에 인민위원회를 건설하며 진정한 해방을 감격을 맛보았던 이 땅의 노동자 민중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백색 테러 집단 학살로 자주적인 해방이 좌절된 이후 반동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박정희 군사 파쇼 테러 체제는 반공주의로 이 땅의 자주적이고 변혁적 사상과 운동을 사실상 절멸시켰다. 그럼에도 미약하게 이어져 오던 노동자 민중의 투쟁은 1980년대 광주 항쟁 이후부터 반독재 민주화 투쟁, 반미 투쟁을 통해 맑스·레닌주의 혁명 사상과 만나며 거대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혁명 사상과 혁명 운동의 부활은 1990년대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와 조선에서의 고난의 행군과 쿠바의 특별한 시기를 보며 급격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힘들게 타올랐지만, 세계사적 퇴행의 격변 속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때부터 맑스주의의 위기를 운운하며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 시대적 유행이 되어버렸다. 맑스주의 혁명적 사상의 고양과 함께 혁명 운동이 성장했다면 그 후퇴와 함께 운동도 무너져 내렸다.

한국에서도 이제 맑스주의의 총체적 사상 대신에 사물을 지엽적, 일면적, 표면적, 고립적, 분산적, 개인적,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서구의 소부르주아 사상이 창궐하고 있다. 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21세기 한국에서 뒤늦게 전면적으로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젠더, 인종, 인권, 장애 등의 문제를 체제와 사회 변혁의 문제와 분리시키는 한편, 정체성이라는 개인적 분열의 장벽으로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 부정적인 측면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개인적 ‘인권’, ‘평화’, ‘민주’를 내세운 담론들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분단 체제와 정면으로 대결하고, 국가 권력의 폭력과 투쟁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분단과 냉전의 시대”, “감옥에서 겪어온 폭력과 광기와 비인간성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서승 선생의 다음과 같은 준엄한 말씀은 뼛속 깊이 새겨들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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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폭력이나 차별에 맞서는 ‘인권’은 유럽이나, 선진국이나, 문명국과 같은 한정된 특수성의 세계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에 대한 방호적이고 치유적인 일정한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구조적 폭력 위에 안주하면서 ‘인권’의 수호자인 양 고상한 양 설교를 한다면 오만한 위선일 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언뜻 반패권적이고, 반권력적으로 보이는 평화, 민주, 인권이라는 가치들도 서구에서 태어나 서구의 안경을 쓰고 세계를 노려보고 있으니, 결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직시하며 인권의 근본문제를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서승,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한다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경향신문, 초판 1쇄 2019년 12월 23일, 초판 2쇄 2020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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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개인의 인권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운동이 “개인에 대한 방호적이고 치유적인 일정한 구실을 해왔다”라는 것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 권력과 자본, 분단 체제가 강요하는 폭력과 종북몰이와 같은 폭력적 이데올로기와 구조적 폭력에 “안주”하는 것은 “오만한 위선일 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보편적 인권’을 내세우면서 “북한 인권” 운운하는 정의당 유의 반공·반북 소부르주아 정당이 여기에 해당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며 사상의 자유가 원천봉쇄되어 있고, “사람이 우선이다”며 인권을 내세우는 정권이 들어선 지금까지도 전쟁을 반대하는 연설을 한 진보 정당의 의원은 아직도 석방되지 못하고 기나긴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인간성을 파괴하는 가장 비열한 국가 범죄인 70~80년대의 프락치 공작이 자행되고 있고, 국가 권력이 이북의 식당 종업원 여성들을 유인 납치하는 천인공노할 야만극을 자행했는데도 여전히 그 사건들을 은폐하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절실한 최고의 인권인 생존권과 노동권은 법률적 억압으로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역대급 노동 개악” 시도가 자행되고 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라는 언론 기사는 무권리 상태에서 지옥과 같은 노동을 하다가 중재 재해로 죽어 나가는 노동자들의 참담하고도 서글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평화, 민주, 인권의 담론 홍수 속에서, 이러한 담론을 내세우는 정권하에서, 이 정권이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기업살인법은 잔인하게 외면당하고 있다.(편집자: 중대재해 피해자 가족들과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2021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중대재해를 저지르는 자본가들에 대한 처벌은 지극히 미약하며, 중대재해의 다수를 차지하는 5인 미만사업장은 적용이 제외됐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3년 유예되는 ‘누더기법’으로 통과됐다. 게다가 2021년 7월 시행령 제정안이 발표됐는데, 여기서는 2인 1조 작업이 명시되지 않았으며 중대재해 대상이 되는 작업성 질환이 24개에 그쳤고, 과로사와 연관된 뇌심혈관계 질환이나 근골격계 질환 등은 빠졌다. 게다가 중대재해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구조적 문제인 ‘죽음의 외주화’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파렴치한 자본가들은 “경영책임자로서는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했음에도 개인의 부주의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경영책임자에 대한 면책 규정도 넣어야 한다.”(경총 관계자)고 주장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산업 안전은 경영책임자뿐만 아니라 현장 종사자의 태도도 중요한데, 이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라며 중대재해 책임을 노동자한테 전가하면서 기업살인 면죄법에 대해서조차 불만을 토해내고 있다. 결국 악랄한 자본가들은 탐욕스런 이윤을 위해 사회적 살인을 계속 자행하면서 또 다시 청소년 노동자들을 비롯해 전체 노동자들의 참담한 죽음의 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구조적 폭력을 외면하고 체제와 대결하지 않는 소부르주아 사상은, 앞에서 맑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이 체제와 권력에 복무하는 부르주아 사상이기도 한 것이다. 노/정/협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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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정치신문 초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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