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맑스엥겔스주의의 ‘혁명적 진수’를 위하여 [서평]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를 읽고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9. 4. 26. 17:16

 

 

맑스엥겔스주의의 ‘혁명적 진수’를 위하여

[서평]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를 읽고    

4.27시대연구원 철학분과 김동원 연구위원

 

“놀랍게도 나는 오늘 <전진>지에 내 허락 없이 인쇄된 내 ‘서문’의 인용문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내가 마치 완고한 평화적 법률 숭배자라도 되는 듯이 취급된 것을 알았습니다.”

 

칼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을 1895년 3월 독일에서 재간행하면서 자기가 쓴 ‘서문’이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의해 왜곡된 사실을 안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는 매우 분노했다. 자기 글을 왜곡한 것도 그렇지만 만행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4년 전 파리코뮌 20주년 기념일인 1891년 3월18일에 쓴 <프랑스 내전> 서문의 마지막 구절도 날조당했다.

“최근 사회민주주의 속물들은 또 한 번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에 대해 건전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좋다. 신사 여러분, 이런 독재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코뮌을 보라,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이 원문에서 당시 독일 사민당 지도부는 ‘사회민주주의 속물’을 ‘독일의 속물’로 바꿔치기했다. 사민당 지도부의 수정주의 행태는 벌써 알만한 지경이었다.

엥겔스의 ‘수난사’는 그가 1895년 8월 사망한 뒤에도 계속됐다. 베른슈타인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의 왜곡된 서문을 두고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에서 엥겔스가 과거의 혁명적 활동과의 관계를 청산한 증거, 즉 ‘정치적 유언장’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서유럽 맑스주의의 시원으로 평가받은 죄르지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대해 “변증법의 방법을 자연의 인식에까지 확장시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맑스의 혁명동지이자 조력자임은 물론 맑스주의 철학(변증법적 유물론) 정립과 <자본론> 완성에 큰 업적을 쌓은 그였음에도 ‘저평가’돼 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달 초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가 펴낸 맑스레닌주의 총서 1권의 이름이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임을 알았을 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맑스엥겔스주의(MarxEngelsism). 한글이나 영문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나오는 건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란 책 이름 말고는 없었다. 신조어인 셈이다.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사수하면서 이를 이념적 혼란과 후퇴라는 한국적 특수상황에 창조적으로 적용, 발전시키는 걸 목표로 활동하는 정치조직”인 노정협이 자기의 사상적 기치를 이름으로 내는 총서 첫 권의 이름으로 ‘맑스엥겔스주의’를 강조한 이유는 무얼까?

노정협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 혁명적, 과학적 기치 아래 위대한 레닌주의와 볼셰비키와 러시아 혁명이 싹터 나왔고 소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라는 수십억 인류의 억센 투쟁과 전보적 사회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맑스주의, 밋밋하다 싶으면 힘을 줘서 ‘혁명적 맑스주의’라고 하면 될 거 같은데 굳이 ‘엥겔스’를 강조한 건 왜인가?

“맑스주의가 지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철옹성이었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총체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평생 지적, 사상적, 정치적 동반자였던 맑스와 엥겔스의 틈을 벌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마침내 맑스주의를 왜곡하거나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맑스엥겔스주의를 굳건하게 사수하는 것으로부터 21세기 혁명적 사상을 옹호, 발전시켜야 한다.”

 

엥겔스가 역사적으로 ‘저평가’돼온 것도 문제지만,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 진보를 자임하는 식자층에서 수정주의를 침식하는 수단으로 맑스와 엥겔스의 틈을 헤집기 때문이란 얘기다. 맑스 사후 엥겔스가 인터내셔널 안의 수정주의와 싸우며 혁명성을 견지했기에 레닌주의와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고 현실 사회주의가 지속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은 멀게는 지난 2012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노정협이 발행하는 <노동자정치신문>과 <노동자의 사상>에 실린 ▲수정주의와 맑스주의 왜곡 비판 ▲정부 노동정책과 논리 비판 ▲비정규직과 여성 차별 문제 ▲자본 구조조정의 본질 등을 소주제들로 한 21편의 논문으로 꾸려졌다. 여기선 ‘수정주의와 맑스주의 왜곡 비판’에 집중하고자 한다. 책 제목은 물론, 해당 논문 편수가 가장 많은 7편인 데서 보듯 총서 1권에서 담으려 한 사실상 핵심 의제로 보여서다. 또 맑스주의에 대한 국내 수정주의와 왜곡의 실태가 어떤지가 관심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이 책은 맑스엥겔스주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국내 지식사회에 깊숙이 퍼져있는 수정주의와 맑스주의 왜곡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맑스엥겔스주의의 진수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 배격한다. 근래에 보기 드문 맑스엥겔스주의 ‘논쟁교범’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 책의 내용을 압축 설명하면, 국내 수정주의와 맑스주의 왜곡은 우선 맑스를 인정하는 경향과 맑스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경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맑스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맑스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렇지가 않다. 맑스를 극복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다. 보자.

 

“억지로 산 마르크스와 죽은 마르크스를 가르고 소위 진짜 마르크스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라는 방법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자체에 적용시키고 그것이 가진 시대적 한계 속에서 합리적 핵심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 속에서 마르크스조차 과감히 죽일 수 있어야 우리 운동이 죽은 이론과 과거의 영광에 대한 물신숭배를 넘어 현실 속에서 한 단계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이정인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2018.5.11)>, 책 119쪽)

 

노정협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계승자인 맑스레닌주의자들은 그 누구도 ‘마르크스조차 과감히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맑스와 엥겔스는 도그마가 아니라 변증법적 방법론이라는 규정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맑스를 인정하는 경향은 먼저 맑스를 제외하고 엥겔스부터 레닌, 스탈린까지 ‘정통’ 맑스주의 계통에서 어디까지를 인정하느냐로 나뉜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즉 스탈린의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데서는 공통적이다.

노정협은 이런 경향에서 “일정한 규칙”을 본다.

 

“먼저 소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중략) 일각에서는 스탈린을 부정하고 레닌을 옹호하는 방법도 있지만, 스탈린이 맑스레닌주의를 확고하게 옹호했기 때문에, 대개의 비난은 스탈린과 소련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그 스탈린 사상의 출발이 레닌에게 있다며 레닌을 부정하고 레닌 사상의 출발에 엥겔스가 있다고 엥겔스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맑스의 영원한 사상적 벗이자 맑스주의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인 엥겔스와 맑스를 분리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제 맑스만이 남았다. 홀로된 맑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책 103쪽)

맑스만을 인정하는 경향에서 전통적인 것은 “휴머니즘과 소외를 말했던 초기 맑스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했던 후기 맑스를 분리하는 것”이다. 유로코뮤니즘에서 배운 거다. 맑스의 초기 저작 <경제학 철학 수고>(1844)에서 ‘소외’를 일면적으로 강조하고 혁명성을 거세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대, 특히 제도권의 두려움은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가 가장 큰 이유다. 이는 기득권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르크시즘’이라는 ‘이즘’을 덧씌워 그의 사상에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을 부각한 데서 주로 기인하지만, 그의 추종자들 역시 정치투쟁의 일환으로 그를 우상화하고 교조화한 탓도 없지 않다.”(성일권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6호(2018.4.30.), 책 95~96쪽>

노정협은 이에 대해 “이들은 맑스주의로부터 혁명성이 빠진 수정주의를 발굴하려 한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비혁명적으로 순화하고, 순치하여 제도권의 두려움, 오해를 없앰으로써 기득권, 즉 착취계급도 거리낌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맑스주의를 전파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지배계급에 대한 투항과 항목을 맑스주의의 이름 아래서 위장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폭로한다.

이처럼 맑스와 엥겔스, 레닌 등의 연관을 끊으려는 시도는 결국 맑스주의에 이질적인 ‘외부’ 사조를 섞는 데로 향한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주류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안수찬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 <한겨레(2006.4.7)>, 책 115쪽)

이를 두고 노정협은 “이진경은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 즉 맑스주의의 혁명적, 과학적 원칙을 이질적 요소들을 뒤섞어서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이진경은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등 유럽의 반맑스주의를 표방하는 소부르주아 잡사상(이질적 요소들)의 유포자가 되었다”고 일갈했다.

이뿐 아니라 책에서 눈길을 끄는 건 4편으로 나눠 다룬 ‘강신준 교수의 자본해설을 둘러싼 논쟁 비평(이하 논쟁비평)’이다. 강 교수(동아대 경제학과)가 지난 2012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도 출간한 <오늘 ‘자본’을 읽다(이하 오늘 자본)>에 대한 비판 반박인데 단일 주제로 분량이 가장 많다. 사실 강 교수의 <오늘 자본>은 신문 연재 직후 몇몇 진보학자들의 잇단 비판으로 논쟁이 된 바 있다. 길게는 6년여가 지난 논쟁에 책의 5분의 1 분량을 할애하며 재론한 건 그만큼 중요하다고 본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대표작인 <자본론> 해석을 둘러싼 왜곡 논란인 만큼 사안의 심각성을 현재진행형이라고 판단했음직하다. 어떤 문제인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한 가지만 말하자면 강 교수는 2013년 칼 카우츠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번역판을 재출간하면서 인터넷에 홍보용 문답을 올렸는데 ‘마르크스가 보면 카우츠키와 레닌 가운데 누가 변절자인가?’란 물음에 “변절자란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적합한 평가다. 왜냐면 볼셰비키들은 명목으로는 마르크스를 내세웠지만 내용면에서는 마르크스를 왜곡했고 따라서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이 바로 변절자인 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볼셰비키 공격 개작”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노정협은 “한국에서 카우츠키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강신준 교수”라고 꼬집었다.(책 350쪽)

결론적으로 노정협은 “맑스주의를 가장 혁명적으로,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모범은 바로 레닌”이었다면서 오늘날 맑스주의에 어떻게 다가갈지를 두고 이렇게 충고한다.

“맑스의 사상에 접근할 때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우선적으로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와 맑스의 사상을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같은 맑스주의에 대한 충실한 이해 속에서 맑스의 사상을 현실에 혁명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맑스주의를 철저하게 이해할 때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조건에 맞는 창조적 해석이나 발전도 가능하다.”

앞서 얘기한대로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를 통해 국내에서 진보를 자임하며 깊이 퍼져있는 수정주의와 맑스주의 왜곡 실태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맑스와 엥겔스 저작의 진수와 그에 대한 원칙적 해석을 통해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치밀하게 반박 타격한 노정협의 사상투쟁이 인상 깊었다. 맑스주의의 진수를 수정주의 비판을 통해 학습하는 방법도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다만 기왕 ‘맑스엥겔스주의’를 책 제목으로 강조할 바였다면, 맑스와 엥겔스가 “맑스주의를 떠받치는 두 기둥”임을 확인한 만큼 ‘저평가’된 엥겔스가 인터내셔널 안에서 수정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며 혁명성을 견지했는지, 그리고 그의 사상이 레닌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직접 다룬 논문이 없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노/정/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