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

조선일보가 칭찬하는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좌파’들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가?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0. 8. 3. 11:43

1. 오직 진실만 추구할뿐 “북한에 대한 맹목”은 없다

 

구체적 출처를 기억할 수는 없는데 레닌은 어디에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적들의 미움을 받았다면 올바른 길을 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하에서는 우리 반대편의 입장을 통해 우리가 취해야할 확고한 태도를 견지하고 올바른 정치적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이해당사자 반대편 특히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대편이 적대감을 갖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해와 심각하게 불일치하고 더 나아가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파업에 대한 자본가들의 적대감만 보더라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 체제, 부르주아 반공주의 체제에서 특별하게 악마화 하는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진실이 심각하게 왜곡, 굴절되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미국 국무부가 현지시간으로 6월 25일 “최악의 인신매매 국가”를 지정했는데, 이들 나라들 중에는 ‘북한(조선)’을 포함해 중국, 러시아, 이란, 쿠바, 시리아, 베네수엘라 등이 포함돼 있다. 침략전쟁과 파괴와 암살과 정권전복(레짐 체인지)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학한 “악의 축”이 미제국주의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도 모자라 한해 1천명이나 되는 자국민들을 경찰이 살해하고, 최근만 보더라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씨를 백주대낮에 사람들의 면전에서 목 졸라 죽인 파쇼 테러 체제인 미국이 감히 누구에게 “인권” 운운할 수 있는가?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국가들 대다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국가들임을 볼 때도 “인권” 소동은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미제의 “미움을 받으면 올바른 길을 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적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심지어 적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면 왜 그러한 것인가? 최근 노동운동 내 “자본의 앞잡이들”이 정규직, 조직된 노동자들의 선제적 임금양보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들의 노선과 행보가 자본가들과 정권의 이해와 철저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자본가 언론한테 칭찬을 받고 있다.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반공체제와 첨예하게 대립하며 사회주의 체제를 강화했던 쏘련이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 내부의 지도자들이 악마화 되어 있는 반면에 후르시초프, 고르바초프 같은 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상찬의 대상이었다. 쏘비에트 체제의 해체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이들이 쏘비에트 체제를 내부에서 해체로 몰아간 주범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적들의 칭찬을 받으면 그릇된 길을 간 것이다.”

조중동은 파렴치한 진실왜곡과 극렬한 반공이데올로기로 악명 높은 대표적인 극우파쇼 신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다. 그런데 대체 어찌된 일인가? 사악한 조선일보가 한국의 이른바 ‘좌파’세력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나섰다.

 

좌파단체인 ‘사회진보연대’는 18일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규탄하면서, 이번 사태의 책임이 미국이나 우리 내부에 있다는 북한 추종 태도를 비판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논평에서 연락사무소 파괴에 대해 “연락사무소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국가 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설치하는 일종의 외교공관”(이)라며 “폭파 같은 비상식적 처사는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며 북한 정권을 규탄했다…

사회진보연대는 국내 운동단체들이 대북추종 태도에 대해 “환상을 버리라”고 했다. 이들은 “한국의 사회운동은 현 사태를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과 한국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며 “북한의 행동에 알리바이를 주는 것은 결코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한 정권에 알리바이를 주는 남한 사회운동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한반도 민중 전부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며 “핵 개발은 동기도 반민중적이며, 그 결과도 파멸적”이라고 했다.(정우상 기자, 좌파단체 “운동권, 북에 대한 환상-맹목 버리자”, 조선일보, 2020.06.19.)

 

좌파, 우파 개념은 프랑스대혁명 당시 보다 급진적인 자코뱅당 의원들은 의회 왼쪽에 앉고 혁명을 배신하고 봉건세력과 결탁한 온건한 지롱드당 의원들은 의회 오른쪽에 앉은 것을 비유해서 나왔다. 이러한 좌우파 개념의 역사적 배경을 안다면 과연 우리는 조선일보가 칭찬하는 사회진보연대를 “좌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정치적 문제를 일단 차치하면, 이 점에서는 사회진보연대는 사악한 극우반공 파쇼 신문 조선일보와 유사한 주장을 하거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들이 평소 “좌파”니, “사회진보”니 “연대”니 “신자유주의 반대”니 “자본주의 반대”니 연일 외친다 하더라도, 한국의 역사적 문제인 분단문제, 통일문제, 제국주의 문제, 북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극우파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조선일보가 칭찬한다고 해서 ‘사회진보연대’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진보연대는 노동자 계급의 확고한 진보적 세계관과 역사의식이 부재하다.

조선일보는 위 기사에서 “사회진보연대는 국내 운동단체들이 대북추종 태도에 대해 ‘환상을 버리라’고 했다”고 전한다. 실제 사회진보연대는 북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해 “북한 정권이 문제다. 남한 사회운동은 정세를 직시해야 한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한 북한 정권을 규탄한다”는 성명(정세초점)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 성명에서 “한국 사회운동도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한국의 사회운동은 현 사태를 그저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과, 그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한국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적의로, 또 일부는 북한에 대한 맹목으로 그러한 입장을 보이는 듯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야말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환상이란 “사상이나 감각의 착오로 말미암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결여하고 공상적이고 왜곡해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현 사태를”,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과 그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한국 정부의 탓”이라 간주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지극히 정당하다. 이는 “그저” 그런 태도가 아니라 명확한 태도다. 미제국주의에 대해 “적의”를 보이는 것은 미제가 보이는 행태를 볼 때 당연하다. 이는 운동의 당파성이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론》 서문에서 말할 것처럼,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당파성은 있되, 과학성을 상실했지만, 노동자 계급과 그 계급의 대변자들은 철두철미 당파적이면서도 동시에 과학성을 유지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세계관과 역사적 역할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태도는 어떠한가? 누가 과연 “맹목”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이러한 비난은 바로 조선일보식, 제국주의식 악질적인 프로파간다(정치선전)에 불과하다. 종북(從北)이라는 용어의 창시자들이 구 사회당인데, 한국의 극우파쇼권력이나 조중동에서는 운동진영 내에서 먼저 제기한 종북을 근거로 진보세력에 대한 마녀사냥과 정치적 탄압을 자행해 왔다. 그 법적 수단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7, 80년대식의 비열한 프락치 공작과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종북몰이로 내란음모 사건이 조작됐고 통합진보당이 해체됐다. 내란공작이 프락치 이성윤의 거짓진술과 조작된 녹취록을 가지고 자행된 정치공작임이 밝혀지고,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양승태 일당과 박근혜 정권 간 재판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그런데도 이석기 의원은 아직도 7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감되어 있고, 통합진보당을 해체한 정치적 테러 사건에 대해서 그 정치테러를 사주하고 동조한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있다.

신은미 씨는 종북몰이 광기 속에 “대동강 맥주는 맛있었다”, “대동강 물이 정말 맑고 깨끗하다”는 정도의 발언을 가지고 극우분자로부터 황산테러를 당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공안검찰의 조사를 받고 미국으로 강제 출국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과 천인공노할 프락치 공작이 자행됐다. 천인공노할 국가유인 납치극의 피해자들인 북의 종업원 여성들은 정권이 바뀐 지금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들을 여기서 다시금 환기시키는 것은 “북한에 대한 맹목”이라는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이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국의 폭압적이고 후진적인 정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맹목”적 태도라는 지배계급의 ‘종북몰이’ 공세야말로 사태의 진실을 조작·은폐하고, 이 땅의 지배자들이 지금까지도 인민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고 정치적 전망을 봉쇄해온 주범이다.

종북은 없다. “북한”에 대한 맹목적 태도도 없다. 오직 역사적 인식과 과학적 태도와 진실추구가 있을 뿐이다. 오히려 “북한”에 대한 맹목적 태도는 사회진보연대가 가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야말로 반북주의 적대감으로 지배계급의 특수사상인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북한과 한반도(조선반도)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에 대해 “맹목”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을 말살시키기 위해 비핵화를 외치고 반북반공주의를 유포하는 미제와 반공부르주아, 미제의 승인만을 추종하는 문재인 정권의 사대주의에 “알리바이”를 주고 더 나아가 지배계급의 반동적 세계관과 반공적 공세에 정당성을 심어주고 있다. 그것도 좌파로 행세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사회진보연대식 사고와 행보는 “남한 사회운동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한반도 민중 전부를 위태롭게 만’드는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

 

2. 서 있는 곳이 달라지니 풍경도, 인식도 달라지는가?

 

사회진보연대는 위 성명에서 “북한 핵개발은 모든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사물의 “모든 측면”을 보기는 했는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라도 했는가? 사회진보연대는 사안의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서 거꾸로 보고 있다. 외부 사물, 외부 사안을 유물론적으로 제대로 반영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서 보는 것은 관념론자들의 전형적인 태도다.

우리가 여러 차례 제기했다시피, “북핵문제”는 “정치적 조어(造語)”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수천 개의 핵을 보유하고 북에 대해서는 경제적 고립정책과 군사적 말살정책을 펼치는 미제의 “핵독점 전략”이다. 매사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주되게 책임을 져야할 게 있고 그 대응과정에서 생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도 사라진다. 미제의 핵독점 정책과 말살정책이 사라지면 북핵도 없어진다. 결자해지로 미제가 핵독점 전략을 폐기하면 그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으로 생긴 북핵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사회진보연대는 “비핵화를 향한 실질적인 조치는 제안하지 않는 가운데 한국 정부를 강하게 흔들겠다는 의사로밖에 볼 수 없다”며 문재인 정부를 옹호한다. 또한 “현 사태의 해결책은 무엇보다 북한이 하노이회담 결렬을 넘어서는 담대한 비핵화 조치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북에 대한 핵위협은 언급하지 않은 채 미제의 강도 같은 협박 앞에서 일방적 무장해제를 종용하는 아주 비겁한 논리다.

미제와 제국주의 체제의 북에 대한 일방적인 “비핵화” 요구는 국제깡패들의 협박과 같다. 최근 회고록 출간으로 국제적 관심 인물로 떠오른 극우 망동분자 볼턴은 “리비아식” 해법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그런데 이 해법은 리비아의 핵개발 중단과 경제지원인데, 이는 미제와 나토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리비아의 무참한 폭격과 파괴, 리비아 지도자 까다피의 비극적 살해로 끝났다. 리비아 식 해법의 대안으로 나온 사리원칙에 맞는 방안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이다. 이 원칙에 의해 영변핵시설의 폐기와 이에 상응하는 경제제재의 해제, 심지어 북에서는 양보해서 인민내수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한정된 최소한의 제재해제를 제안하였다. 주지하듯, 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은 볼턴을 내세운 미국 군산복합체와 국방부, 미국 민주당 등에 의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의 합의 불발로 몰아가고 그것이 오늘까지 조미관계와 그에 종속되는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북핵문제”에서 사회진보연대의 전도된 인식은 그와 연관된 남북연락사무소 파괴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성명에서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지금, 다시금 대북전단을 빌미로 한 총격이나 포격, 비무장지대나 서해 NLL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유도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 여파는 가늠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북전단을 빌미로” 군사행동들이 이어진다면, 4.27 남북 합의를 위반하고 저열한 행위들을 방치하여 빌미를 제공한 문재인 정권한테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래야지만 이어질 수 있는 군사행동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사회진보연대는 여기서도 사안에 대한 구체적 접근이나 역사적 접근도 없고 노동자계급적 관점도 없다.

심지어는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의 가능성을 지레 짐작하고 “미국은 북미 간의 암묵적 ‘레드라인’을 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하여 미제의 입장에 선다. 이들의 미제 편들기는 끝이 없는데, 북의 앞으로 예상되는 군사행동은 “2018년 싱가포르 정상회담 결과로 유지된 북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깨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은 북 핵·미사일 실험 중단에도 불구하고 한미군사훈련이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은폐한다. 이들은 “이러한 군사행위는 북한 당국의 모종의 희망과 달리, 북미대화의 완전한 파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누구한테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인가?

최근 북에서 군사행동을 유예함으로써 숨 고르기에 들어갔지만, 연락사무소 폭파 사건만 보더라도 직접적으로는 2018년 4.27판문점 선언과 8월 19일 평양선언 불이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미국의 승인만 기다린 채 “한미 워킹그룹(South Korea-US Working Group)”의 눈치를 보며 “민족자주”라는 두 선언의 근본원칙을 위반하였으며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철도 연결 등 최소한의 남북 간 합의도 이행하지 않았다.

이것이 “북핵 문제”와 최근의 남북연락사무소 파괴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며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적 태도이기도 하다. 사회진보연대는 “모든 측면”을 운운하면서도 북에 대한 적대감과 편견, 왜곡된 시각에 사로잡힌 채, 남북연락사무소 파괴라는 하나의 측면, 하나의 현상만을 일면적이고 즉흥적으로 보아서 이러한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사회진보연대는 “결국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유엔 제재는 유지될 것이며, 북한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모종의 추가적 군사적 위협행동을 취한다면 유엔 제재의 수위는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미제의 유엔을 앞세운 경제 제재를 정당화하는 위험천만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런 악순환이 작동할 때 피해를 보는 것은 북한과 한반도, 동아시아의 민중이다”라고 하는데, 이들은 제재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조선의 인민들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이는 국제적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쿠바와 이란과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중국, 베네수엘라 등 전 세계 인민들에게 가해지는 미제의 제재와 고통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미제국주의는 조선에 대한 제재와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들을 테러 지원국이나 인권탄압국이니, “악의 축”이니 하여 제재를 정당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한은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유일한 NPT 탈퇴국이다. 그 대가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민중의 생명의 위협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1993년 북의 NPT(핵확산방지조약) 탈퇴와 1994년 복귀 이후 경수로 건설과 중유공급 약속, 정치경제관계의 정상화 같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미국이 위반함으로써 북이 최종 탈퇴하게 되었다는 초보적인 역사적 사실도 망각하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역사적 사실만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발표했던 18년 전 다음과 같은 글도 망각하고 있다.

 

미국은 NPT가 세계적인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북한이 이를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핵무기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이라크, 이란, 북한 등과 달리) 핵보유국인 중국과 프랑스는 아직 NPT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NPT는 핵보유국인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전혀 제약을 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위협이나 핵공격을 제재할 수단이 없다. 오히려 미국의 핵정책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능을 하며, 따라서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비핵국가의 핵무기 개발 욕구를 자극할 뿐이다. 그러므로 NPT체제는 반핵(反核)을 염원하는 세계 인민들의 요구를 실행하는데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핵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 이후 미국의 핵정책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미국이 그동안 한반도에 가해온 핵위협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오늘날 미국이 제시하는 핵문제 해결책이 왜 궁극적으로 위선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임필수 정책부장, “한반도와 미국 핵무기위협의 현재성 -미국의 핵선제 공격 옵션은 NPT와 제네바 합의를 위협한다.”,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2002.11.30.호)

 

사회진보연대는 돌아오지 못할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넜는데, 그 망각은 단순하게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우경화된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핵으로 인해 “온 전 세계 수많은 반핵평화운동은 더 큰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반핵평화운동”이 반제국주의 관점을 잃어버리고 친제국주의적 소부르주아 평화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에 불과한 것이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다르다”고 했는데 사회진보연대는 우리와는 정반대편인 조선일보와 미제국주의의 편에 서 있으니 풍경도, 인식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조선일보처럼 보고 급기야는 조선일보의 칭찬을 받게 된 것 아닌가?

 

3. 반공반북‘좌파’라는 한국 진보세력들의 정치적 희비극을 청산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이동훈 논설위원, [만물상] “북한 비판하는 좌파도 있다”, 2020.06.20.)는 기사에서 북을 비판하는 여러 사례들을 들고 있다. 조선일보는 “좌파의 원조 격 유럽 프랑스 사회당은 전당대회에 북한 노동당을 초청하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이 좌파를 모욕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회진보연대를 “좌파”라고 띄어주고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하듯이, 프랑스 사회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사회당은 보수당과 함께 프랑스의 부르주아 양당체제의 한 축이다. 독일 사민당처럼 프랑스 사회당도 신자유주의 정당으로 우경화되어 프랑스 노동자들이 이 정당의 반노동자적 조치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했다는 사실은 이미 국제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프랑스 사회당이 전당대회에 누구를 초청한다면 오히려 조선일보의 찬사를 받는 것만큼이나 명예를 실추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2020년 제22차 공산당·노동당 국제대회는 평양에서 개최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조선일보는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은 ‘공산주의 쥐라기 공원’이란 북한 르포 기사에서 ‘모든 공산주의 독재국 결함의 집대성’이라 했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비열함과 범죄, 우매함에서 북한의 맞수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북한 공산주의 정권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유의 제한을 정당화” 하고 있다는 기사(리베라시옹, “북에 대한 강박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다”, 뉴스프로, 2014/12/25)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조선일보는 자유주의적 신문 리베라시옹을 “좌파 신문”으로 규정할 만큼 우경적인데다가, “지구상 어떤 신문도 비열함과 범죄, 우매함에서 조선일보의 맞수가 되지 않는다”고 르포 문장의 주어를 바꿔보니 맑스가 자본론 서문에서 일갈했던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떠오른다.

“그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야”, 바로 조선일보 너를 두고 하는 말이야!

“북한은 끔찍한 기형 국가, 두려움에 떠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도 북한을 변호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며 조선일보가 인용한 “유명한 영국 좌파 영화 대부 켄 로치 감독”은 트로츠키주의 감독이다. 켄 로치 감독은 유명한 “랜드 앤 프리덤”이라는 스페인 내전을 그린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유명한 “좌파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작가는 편견과 극렬한 종파주의에 사로잡혀 스페인 내전의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특집1 국제여단은 ‘랜드 앤 프리덤’을 규탄한다”, 하르팔 브라르,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번역, 2015년 9월 9일 글을 보라.) 게다가 조지 오웰은 나중에 영국과 미국 첩보기관에 고용되어 진보적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는 프락치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폭로되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1950)도 저자의 비판 대상이다. 오웰은 CIA에게 비공산주의 좌파를 앞세우는 데 이용됐다는 지적이다. 오웰의 인기작 ‘1984’가 던진 메시지는 명확했다. 작품은 정부가 행하는 모든 위선과 기만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선전 전략가들은 민첩하게도 이 책을 반공주의의 상징처럼 둔갑시켰다. 책에선 “오웰이 어떤 의도로 이 책을 썼는지는 몰라도, 작품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주제들은 결국 냉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오웰 스스로도 냉전의 조작이나 확산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예컨대 1949년에 영국 정보당국에 공산주의 동조 혐의자들 명단을 넘겨주었다. 오웰의 명단이 정부 기관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사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애초의 순수성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

1950년 조지 오웰이 사망하자 CIA는 즉각 그 아내 소니아(Sonia Orwell)와 접촉했다. 죽은 작가의 아내를 만난 이유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동물농장’ 영화 판권 계약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덕분에 ‘동물농장’을 만화영화로 제작할 수 있었고, CIA가 전 세계 시장에 투자와 배급을 맡았다(정승욱 선임기자, 냉전시대… CIA 도구로 전락한 지식인들 CIA ‘미국적 가치’ 확산위해 교묘하게 이용 / 레몽 아롱·버트런드 러셀 등 지성들 예외없어 / 조지 오웰 ‘1984’ 반공주의 상징으로 둔갑, 세계일보, 2016-10-29)

 

부르주아 반공주의 교육 체제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쏘련과 그 지도자 스탈린을 탐욕의 돼지로 묘사하는데, 오웰은 쏘비에트 체제의 국영농장(소포즈)과 협동농장(콜호즈)을 동물농장으로 묘사할 정도로 골수까지 반공주의자이다, 조지 오웰의 변절과 타락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창당 100년이 다 돼가는 일본 공산당도 북한을 거의 혐오한다.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가 이어지자 ‘저건 공산주의가 아니다’라며 관계를 정리했다. 지금도 북핵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일본 공산당의 100년 역사를 강조하며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우경화되기 전 국제주의 정당 시절 일본 공산당이 조선혁명을 지지하고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던 불멸의 역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친일로 얼룩진 조선일보가 그것을 부각시킬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일본 공산당은 마침내 조선일보의 찬사를 받게 될 만큼 타락했는데, 일본공산당은 2003년 천황제와 자위대를 인정하는 강령개정을 한바 있다. 그러니 그 전에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파처럼 군사정권의 희대의 조작사건을 그대로 믿고 반북주의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정치적 결과다. 일본의 부르주아 정치체제는 “북조선의 위협”을 근거로 평화협정 개정과 군국주의화로 치달으면서 자국 인민들을 노예화 시키고 있는데, 일본 공산당 역시 그 흐름에 맥없이 휩쓸려 버렸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쿠바를 비난하고 적대시하는 ‘좌파’가 있다면 그것을 ‘좌파’라고 부르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런데 한국의 대다수 ‘좌파’정치세력들은 반북반공주의에 빠져 있고 급기야는 첨예한 정치적 문제에서 조선일보의 찬사를 받게 될 정도로 타락해버렸다.

현재 “사회주의” 세력들 중에서 “사회주의 대중화”를 외치고 있는 정치세력들이 있는데, 문제는 이들에게 대중화는 있을지언정, 정작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태도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실의 “사회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일반론으로는 사회주의를 운운하면서도 인류가 일궈온 진보적 역사 전반을 부정하게 된다. 대중들이 가진 반공주의적 편견과 왜곡에 대해 싸우지 않고, 국가보안법과 그 법이 노리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중상모략과 싸우지 않으면서 “사회주의 대중화”는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체제가 유포하는 지배계급의 사상인 반공주의를 가지고 있다면 제국주의의 벗들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특히 사회진보연대는 쏘련 사회주의 해체에 대해 “일괴암주의” 운운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독재로 타락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전위당 노선을 비판하고 “복수적대”, “다층적대” 운운하며 노자 간의 적대를 중심에 두지 않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빠져 버렸다. 더욱이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비난은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왜곡과 적개심으로까지 이어졌다.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은 “국가일반의 부정”으로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부정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정치적 특성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 지도자들에 대한 부정,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결국 이러한 이들의 정치적 본질과 특성이 조선일보의 찬사를 받게 되는 개탄스러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이른바 ‘좌파’진보진영의 희비극이다. 분단체제인 한국에서 ‘좌파’라는 정치세력들이 조선일보의 칭찬을 듣는 정치적 희비극을 단호하게 청산해야 한다. 반동적인 정치적 흐름 속에서도 역사적이고 과학적 관점을 견지하고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분명하게 고수하는 것으로부터 정치활동을 다시 출발해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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