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아베 부르주아 독재정권 1년 ―― 아베노믹스, 춘투(春闘), 자본주의의 위기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8. 11:05
아베 부르주아 독재정권 1년
―― 아베노믹스, 춘투(春闘),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정치신문>[104호(통합 116호), 105호(통합 117호), 2014년 4월, 5월]

 

<활동가집단 사상운동> 전국운영위원회 책임자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한 동지로부터 『노동자정치신문』에 기고를 의뢰하는 4월 4일자 메일을 받았다. 거기에는 「일본경제는 한국경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일본 경제의 양상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계급투쟁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최근 일본경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의 상황이 어떻게 전해지고 이해되고 있는지, 공교롭게도 필자는 예비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메일의 내용을 일독하고 이 동지가 진행 중인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실감했다. 그것은 「아베 수상이 임금인상 조치를 취하도록 자본가에게 권고하는 한편, 소비활성화 목표와는 정반대인 소비세증세를 단행하려고 하는(이미 단행했다) 것과 자본가에 대한 제한 없는 금융지원정책과 법인세 감면조치를 취하려 하는 것」 등도 언급했다.

이 동지의 희망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을 지 걱정스럽지만, 의뢰한 취지가 경제정책을 통해 아베 정권의 계급적 본질을 해명하는 것이라 보고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전대미문 「관제춘투」의 동기와 발단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지도자가 자본가 단체에게 임금 인상을 요구한다는 전대미문의, 전 세계적으로도 기이하게 보이는 이상한 사태가 2013년 여름, 갑자기 부상했다.

수상을 의장으로 하고, 경제 5각료, 일은(일본은행) 총재, 민간의원이라 칭하는 자본가 대표와 어용학자 4명, 총 10명으로 구성된 정부의 자문기관 「경제재정자문회의」에서 아베 신조 수상이 임금인상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고, 이를 계기로 9월에 노사정회의가 발족했다. 「노」에서는 자본가 단체와 한통속이 되어 1989년에 결성된 협조주의적 내셔널 센터(노동조합 전국 중앙 조직)인 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連合)의 대표자가 참가했다. 12월의 제5회 회의에서 구속력이 없는, 일반적인 합의에 지나지 않는 임금인상 실시에 합의한 것이 사태의 시작이었다. 「합의」는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아베노믹스 효과에 의한) 기업수익의 확대를 임금상승으로 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단체인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은 2014년 1월, 관례인 「경영노동정책위원회보고」를 발표. 「보고」는 임금인상은 곤란하다, 논외이다, 실시할 여지는 없다 등의 임금동결을 위한 상투적인 주장을 해왔던 지금까지의 방침을 궤도 수정하여, 「상여, 일시금에 대해 반영할 뿐 아니라 임금 인상과 각종 수당의 개정 등 다양한 대응이 요구 된다」고 임금인상을 용인하는 태도로 전환했다.

경단련에는 아베 정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거절하기 어려운), 아베의 체면을 세워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소득세와 함께 법인세에 한시적으로 가산된 부흥특별세(復興特別税)의 1년 조기철폐(부흥특별소득세는 그대로 둠)와 「기업이 세계에서 가장 활동하기 좋은 나라」의 실현을 노리는 노동분야 규제완화 철폐, 아베 정권의 신성장전략에 있어서 투자감세 등의 보상을 포함한, 아베정권의 장기집권에 대한 높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베정권이 보증한 자본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시혜로써의 임금인상 요구가 이렇게 시작한 것이다.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움직임을 「관제춘투」라 야유했다. 이 무렵, 매년 춘투(춘계임금투쟁)에서 임금인상 요구를 단념(자숙)해왔던 렌고가 4년 만에 임금인상 요구를 결단했고 산하에 있는 기간산업의 독점적 대기업 노동조합이 호응하여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 중에는 편의점 업계와 같이, 노동조합이 요청하기 이전에 경영진이 임금인상 실시를 언론에 발표하거나 경영측이 인금을 인상할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노동조합이 19년 만에 임금인상 요구를 결정한 3대 메가뱅크(거대은행)와 같은 사례도 나타났다.

렌고는 요구기준을 「1%이상」으로 정했다. 이 「1%이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는 후에 보기로 하고, 그 전에 아베 정권의 경제정책을 개괄해두자.


어용학자에 의한 디플레이션 탈출 처방전


아베 정권은 「디플레이션에서 탈출」을 최우선 과제로 하여 2012년 12월에 발족했다. 디플레이션에서 탈출을 노린 아베의 경제정책은 1980년대 전반기의 레이거노믹스를 따라서 「아베노믹스」라 명명되었다. 그것은 3가지 정책수단을 의미하는 「3개의 화살」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화살 「대담한 금융완화」의 수행을 맡은 것은 일은의 금융정책이었다. 아베는 그를 위해서 통화 증발(증가발행)에 저항하는 일은총재를 임기만료 전에 사임하도록 몰아붙여, 주요 직위를 리플레이션(reflation, 통제 인플레이션)파로 다지는 인사를 단행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고 뭐고 다 소용 없었다.

일은의 이른바 양적완화 정책은 2001년에 시작했다(그림1). 양적완화 정책은 일은이 세계에 앞장서서 도입한 것이다. 제로 금리라는, 당시의 총재로 하여금 「이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아니다」고 말하게 한 그것은, 전통적 수법을 모두 동원한 끝에 나온 아이러니한 방법이었다. 그림을 보면 결과는 분명한데, 아베와 측근의 어용학자는 한층 더 과감한 금융완화를 향해 결단할 것을 주장했다.

새 총재 하에 「상식을 깨는 금융완화」가 일은의 새로운 정책과제로서 승인되었다. 일은은 시중(주로 은행)에서 국채를 비롯한 채권 구입에 의해 소비자 물가를 2014년 말까지 전년 대비 2% 상승하도록, 그를 위해서 머니터리 베이스(본원통화,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 공급하는 통화량의 잔고)를 200조 엔으로 배가시키는 목표를 세웠다.

잠시 곁길로 새지만 아베의 측근 어용학자, 통화주의자의 “이론”에 대해서 한마디 해 둔다. 「물가는 화폐 현상이다」. 그들이 애지중지 매달려 있는 화폐이론, 「화폐수량설」이 이것이다. 그에 따르면 물가가 하락하는 것은 통화공급량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통화공급량을 늘리면 물가는 상승으로 전환할 터이다. 이미 150년도 전에 마르크스에 의해 철저하게 논파당했고(1859년 『경제학비판』 제 2장 「화폐 또는 단순유통」, 「유통수단과 화폐에 관한 이론들」), 화폐수량설을 적용하여 실수를 저질렀던 선례(『자본론』 제 3권 제 34장 「통화주의와 1844년의 영국은행입법」)가 있는 것 등이 그들의 안중에 있을 턱도 없지만,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도 대답은 훨씬 전에 나와 있었다. 수요가 침체된 채로 공급 과잉상태가 계속될 때 아무리 지폐를 뿌려대도 물가가 상승할 리가 없다.

마구 뿌려진 지폐는 이렇다 할 운용처가 없고, 독점자본은 나중에 쓸 수 있도록 막대한 과잉자본을 쌓아놓고 있기 때문에 증권이나 부동산 투기로 나타나는 버블 경기를 재현하는 데에만 도움이 된다. 「상식을 깨는 금융완화」와 「디플레이션에서 탈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이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베노믹스에 의해 소비자물가가 상승으로 전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엔저에 의해 수입물가가 상승했기 때문이지, 통화공급량을 늘렸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대체 「디플레이션」이란 무엇인가. 정부는 「계속적인 물가의 하락」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 정의가 완전히 정착해 버렸다.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의 반대, 디스인플레이션인 것은 이제 누구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역대 정권이 일관적으로 인플레이션 정책을 해왔는데도 물가가 계속 하락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있다. 현재 상태를 만약 디플레이션이라고 규정했다고 치고, 자, 그럼 왜 디플레이션에 빠진 것인가, 그에 대한 분석이 아베 정권에도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쪽에도 없다. 원인을 밝히는 과정을 생략하고, 의심스러운 처방전을 들고 나와 이것이 바로 그 특효약이다라는 사전 선전을 통해 아베노믹스는 출발했던 것이다.


장기 침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일본의 명목GDP(국내총생산)는 과거 20년 동안 다소의 상하변동은 있었지만 증가하지 않고 있다. 리먼 쇼크 후인 2009~2011년의 명목 GDP는 버블이 붕괴했던 1991년과 같은 수준에 그친다. 그 사이에 소비자물가지수는 완만한 하락선을 그렸다(그림1). GDP 증가는 물가의 하락으로 상쇄되었다.

역대 정권은 경기대책이라며 적자국채의 발행을 증가하고 공공사업에 예산을 쏟아 부어 경기 부양을 꾀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막대한 빚만 남았다. 국가의 채무 잔고는 1000조 엔, GDP 대비 200%를 넘어, 세계 최악의 불명예스러운 자리에 오르게까지 됐다. 그래도 남미 국가들처럼 국가가 파산하지 않고 있는 것은 국채가 오로지 국내에서 소화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가의 일반회계예산의 절반을 국채로 조달하는 위기상황이 출현했다. 정부와 독점자본, 매스미디어가 하나가 되어 유도한 소비세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다. 소비세 증세분은 저출산 고령화로 팽창하고 있는 사회보장에 전액 할당된다는 허위보도가 공공연하게 판을 친다. 독점자본을 우대하는 세제의 단행은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한다고 정당화 된다. 「자립・자조」를 외치고 사회보장을 삭감하고, 법인세수의 감소를 소비세 증세로 메우는 대중수탈이 차례차례 진행된다.

일본 경제가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게 된 배경에는 복잡한 요인이 서로 얽혀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주요국가 중 GDP가 증가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다. 같은 기간, 국제비교로 본 임금의 추이는 일본만이 하락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통계상에서도 증명되고 있다(그림2). 기업의 수익이 개선된 몫을 종업원에게 환원하고 「경제의 선순환으로 연결한다」는 아베가 자본가와 함께 임금인상을 「요청」했던 것 자체가, 일본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진 요인의 하나로 임금의 경향적 하락이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자백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자본의 뜻을 받은 정부의 노동정책 전개와 함께 해체상태에 있는 노동조합 운동의 주체적 조건이 충분히 밝혀져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 일부분을 짚어 둔다.

1974~75년 공황 후, 일본의 독점자본은 「사람・물건・돈의 감량경영」을 전개하게 된다. 노동력 부족에 따른 임금의 급등과 경제의 인플레이션 체질에 메스를 대고, 철저한 비용 삭감으로 국제경쟁력 강화를 달성하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일본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정책의 선도, 다른 나라에 앞선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했던 것이 독점자본 진영에 투항한 민간중화학산업의 대기업노동조합이었다. 1970년대 전반기 광란의 인플레이션 현상 아래, 독점자본은 「비용인상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론과 「생산성기준원리」를 내세워 임금인상 저지 논진(論陣)을 펼쳤다. 1960년대 중반, 이미 독점자본과의 공모에 의한 「파업 없는 담판교섭」에서 춘투상황을 선도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던 철강노련은 「생산성기준원리」의 노동조합판 「경제정합성」(経済整合性) 임금론을 주장하여, 독점자본의 임금억제책을 보완하는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디플레이션에 숨어있는 자본의 노동조합 지배


미군점령하 1948년, 맥아더 서간에 기초한 「정령(政令) 201호」에서 초헌법적으로 박탈당한 쟁의권을 「불법파업」을 투쟁으로 탈환하려고 했던 국철을 비롯한 공공기업체의 노동조합이 1975년 8일간의 「파업권을 위한 파업」에서 패배한 후, 이미 독점자본이 필요할 때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한 민간중화학산업의 대기업노동조합에 의한, 「노동전선통일」의 이름을 빌린, 자본의 지원을 받는 노동조합운동의 공격이 되살아났다. 이것이 1950년대 이후, 내셔널 센터의 중심적 존재였던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을 해체하고 현재의 렌고가 결성되는 과정의 발단이었다.

1981년 6월에 「통일추진회」(統一推進会)가 정리한 「민간이 앞장 선 노동전선통일의 기본구상」은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그리고 거리낌 없이 속내를 말하고 있다. 즉, (1970년대 초기에 일어났던 두 개의 사건-1971년의 달러 쇼크와 73년의 오일 쇼크-에 의해) 「우리나라 경제의 번영기는 끝났고, 우리가 사는 산업사회는 역사상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달러 쇼크로 상징적으로 드러난 국제통화불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중략)
세계경제는 지금 국제적인 스태그플레이션 양상이 강화되고 있다.  그러한 국제경제 속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제는 제1차 오일 쇼크에 의한 심각한 상처도 참을성 있게 치유했고, 제 2차 쇼크의 거센 파도를 빠져나와, 지금 또다시 안정성장의 궤도로 갈아타려고 하는 중이다.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국민의 협력, 경제정책 등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최대의 원동력은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혜택 받은 우리나라의 노동력이며 노동조합의 대응이란 사실은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도 없다」고.

에둘러 설명했지만, 아베의 임금인상 「요청」에 편승하여 4년 만에 「1% 이상」이라는 극히 소극적인 요구를 내걸은 렌고의 꼬락서니는 이러한 역사적 경위에 근거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980년대가 되자 대처·레이건·나카소네와 더불어 호명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노동분야 규제완화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이다. 노동기준법의 여성보호규정 철폐(예를 들어 야간노동 금지해제(解禁))가 「남녀고용기회균등법」과 한 세트로 되어 나왔다. 노동기준법의 「중간착취 금지」조항은 그대로인 채, 노동조합법에 따라 노동조합에게만 허용되어왔던 노동력 공급사업을 「민간사업자」에게 개방하는 노동자 파견사업법이 85년에 제정되었다. 대상업무는 30년간 제한 없이 확대되어 현 아베 정권 하에서 그 무기한 이용에 길을 열 궁극의 법 개악이 계획되는 등, 노동력 재생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연수입 200만 엔에 못 미치는 비정규 노동자가 이미 전 고용자의 40% 에 달하기까지 급증했고, 정규노동자의 임금이 제자리걸음했던 것과 맞물려 임금수준이 전반적으로 저하된 것이다.


자본수출로 진행되는 경제의 구조변화


명목GDP가 증가하지 않고 소비자물가가 저하하고 있는 배경에는 일본경제의 구조변화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따른 급격한 엔고 행진을 계기로 북미와 아시아를 중심으로 자본수출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2011년 현재 대외 직접투자의 약 27%가 아시아에 투하되었고, 총투자 잔고는 2578억 달러에 이른다. 아시아는 「세계의 성장 중심」으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견인하는 자본 간 경쟁의 주요무대가 되었다. 노동자계급의 구매력 저하, 인구감소라는 국내시장의 축소 흐름이 자본을 점점 해외로 몰고 갔다. 제조업의 해외 생산비율은 평균 34%, 자동차 분야에서는 36%, 전기 분야에서는 49%에 달했다. 무역 총액에서 수출이 점하는 비율이 감소하고, 해외에서 저임금·저비용으로 생산되는 저가격 상품의 역수입이 증가한다(그림3). 이렇게 자본 간의 경쟁은 노동자 간의 경쟁으로 전화된다. 노동자가 싸우지 않는 한 임금 수준의 저하는 피할 수 없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런저런 상승효과에 의해 독점자본 하에 방대한 과잉자본이 축적된다. 그 액수는 이미 300조 엔이 다 되어간다. 과잉자본은 어떻게 운용될까? 외국기업의 적대적 매수(M&A)와 증권투자로 향하고 있다. 무차입(無借金) 경영도 확대된다. 독점자본은 이미 국내에 투자하지 않게 됐다. GDP가 증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해야 한다. 일본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진 것은 자본의 운동이 자신의 윤리를 철저히 추구했기 때문이고, 뒤집어 말하면 노동조합운동이 총체적으로 패배한(패배 당한) 귀결인 것이다.

따라서 「관제춘투」의 결과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는 중간집계 밖에 입수할 수 없지만, 별첨한 표와 같은 데이터가 공표되었다(표1).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은 ① 경단련의 공표수치가 렌고의 공표수치 보다 높은 점 ② 보는 사람에게 「1% 이상」의 요구를 웃도는 수준에서 타결한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명백한 눈속임과 조작이 있다.

경단련이 공표한 수치의 경우 자동차 3사는 그렇다 치고 전 산업 평균수치가 왜 41개사의 수치인 것인가. 그들은 타결 임금액을 높게 보이고 싶은 것이다. 「경제의 선순환」의 실현을 주장한 아베는 뻔뻔스럽게도 「내각의 조치에 호응하여 대기업에서 중소기업까지 임금인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반응을 느꼈다」고 자화자찬했다. 경단련 대표인 요네쿠라(米倉)는 「임금인상 폭이 7천 엔을 넘는 것은 16년만이다. 지속적인 성장을 향해 법인세 감세 등 대담한 개혁에 착수하기 바란다」고 즉시 보상을 요구했다.

일본에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기승급제도가 있다. 초임자(단신자 単身者) 임금을 기본으로 종신고용제도를 전제로 하여 연공을 쌓을수록 임금이 상승해 가는 구조이다. 이 정기승급제도는 임금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노무구성이 변하지 않는 한 임금지불총액은 불변하며 임금수준을 끌어올리는 임금인상과는 구별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임금의 인상이 된다는 구실로 삼아, 별첨한 표와 같이 「1% 이상」의 요구와는 괴리된 수치로 이끌어냈다. 노동조합 측도 문제의 본질을 애매하게 한 채로 자본의 변명을 쉽게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게다가 공표된 임금상승 타결액은 중소·영세기업의 미조직 노동자와 압도적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파급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파급된다고 해도 보다 적은 수준에 그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임금격차는 축소는커녕 한층 확대될 것이다.

이러한 속임수와 조작을 포함한 수치이지만 만약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볼 경우에도 주로 엔저에 기인한 소비자물가의 상승과 4월부터 실시된 3%의 소비세 증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은 일목요연하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2013년 12월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대비 +0.4%였다(게다가 최근 2014년 3월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3%). 하지만 빵, 즉석면, 가솔린 등 연간 15회 이상 빈번히 구입하는 품목에 한해 보면 +3.7%였다. 「관제춘투」는 아베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잠깐의 얕은꾀에 불과한 것이다.

희망은 없는가. 이번 춘투는 렌고 산하 조직을 포함하여 파업 투쟁한 노동조합이 소폭 증가했다. 우리나라에서 그 수가 적은 산업별 노사관계를 유지해온 전국항만(전국항만노동조합협의회)은 산업별 단체교섭을 파괴하려고 한 사용자(일본항운협회)측의 공격을 맞받아치기 위해 24시간 파업을 반복하며 싸웠다. 하지만 노사(노자)의 힘관계를 전환시킬 주체적인 계기는 아직까지도 형성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빼앗긴 노동자 계급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고난으로 가득 찬 투쟁이 계속된다.



그림 1. 소비자물가지수 (종합〮전국, 전년대비)

1973년 제 1차 석유위기
79년 제 2차 석유위기
85년 플라자 합의
89년 소비세 3% 도입, 일경 평균주가가 최고치
91년 버블붕괴
97년 소비세 5%인상. 야마이치 증권(山一證券) 파탄 등 금융위기
99년 일은(日銀)이 제로금리 정책 개시
2000년 제로금리 정책을 해제
2001년 IT버블 붕괴. 일은이 양적완화 개시
2006년 양적완화를 해제
2008년 리먼 쇼크
일은의 (소비자물가지수) 목표 2%
X축:연도, Y축:소비자물가지수
(출처) 총무성

그림 2. 국제비교로 본 임금의 추이 – 민간기업 노동자 1인당 임금의 추이

영국 161
미국 157
프랑스 136
독일 112
일본 87
(맨 아래 점선 그래프) [디플레이션 추이선]
(주)1997년의 임금을 100으로 한 지수
X축:연도, Y축:지수
출처: OECD “Economic Outlook” (2010)

그림3 일본 수출 비율과 역수입 비율의 추이

굵은 실선 그래프: 역수입비율(좌측 눈금)
가는 점선 그래프: 무역 총액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우측 눈금)

*역수입비율은 경제산업성 「해외산업활동기본조사」, 일본은행 「국제수지통계」에서 해외자회사의 대일본 수출(제조업-단, 식료품, 목재, 종이 펄프, 석유〮석탄 제외)가 일본 수입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산출.
*무역총액에 대한 수출의 비율은 재무성 「무역통계」에서 작성

 

 

아베노믹스 추락・파탄의 전조


경제정책과 그 효과에 초점을 맞춰 제 2차 아베 정권의 1년을 되돌아보자.

별표에 2013년 10~12월과 분기별 실질GDP 성장률을 게재했다(표2). 보는 바와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당초의 열기를 잃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주택투자와 공공투자가 성장을 견인했다. 주택투자는 2014년 4월의 소비세증세 이전에 일시적으로 증가한 수요를 반영한다. 주요 주택 제조업체의 계약건수는 2013년 9월을 정점으로 그 이후 감소했다. 공공투자는 재정적자를 팽창시켰고, 이는 무분별한 「기동적 재정확대」((아베노믹스의)두 번째 화살)의 덕택이다. 즉 세 번째 화살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투자전략」이 작동하여 효과를 거두지 않는 한, 아베노믹스는 조만간 한계에 이를 것이다. 아니,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환상이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제 세 번째 화살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성장전략」 차례이다. 독점자본이 이미 국내에 투자하지 않게 된 것은 앞서 말했다. 독점자본주의 성립과 함께 과잉자본이 형성되고, 보다 높은 이윤율을 추구하여 자본수출이 전개되는 필연성을 100년 전에 증명했던 레닌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제국주의론)』(1917년)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국민경제의 공동화는 어쩔 수 없이 진행된다. 2014년 3월의 무역수지는 아베노믹스가 시동되기 이전부터 연속 21개월 적자 기록을 갱신 중이다. 정권 측은 이것을 엔저에 의한 수입물가의 상승과 원전 재가동 중지에 따른 천연가스 수입증가로 설명한다. 허나 그것은 사실의 일부분일 뿐이다. 예전이라면 환율이 엔저를 만나면 수출이 증가했다. 제조업이 해외로 생산을 이전한 현재, 이미 엔화시세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외)환덤핑에 의해서도 수출이 늘지 않는 경제구조가 정착했다.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아베 정권은 투자를 유발하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서 「세계에서 기업이 활동하기 가장 좋은 나라」만들기를 목표로 한다. 전략특구를 설치하고 사업개시를 위한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며 법인세 감세조치를 공약한다. 하지만 아베 정권이 자본에 바치는 최고의 공물은 노동시간 규제를 없애고 해고의 자유를 보장하는 노동법제의 전면적 해체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아베는 또한 2013년 1년 동안에만 자본가들을 거느리고 방문한 25개국을 포함하여 총 29개국을 방문했다. ASEAN 10개국을 망라한 아시아 외교는 중국포위망 형성과 의도적으로 연결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의 참혹한 사고를 일으키고 아직껏 수습의 전망조차 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원자력 협정의 체결과 원전수출의 포석을 놓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군국주의화의 제동장치로서 기능해온 「무기수출 3원칙」을 사실상 폐지하고 군수산업을 성장전략으로 설정하는 방침전환도 추진했다. 해외에서 졸부들과 환자들을 불러들이는 첨단의료를 실용화하고 「관광입국」의 일환인 카지노 해금론까지, 아베정권은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고 돌진하고 있다.

 

 

되살아나는 「전후 체제의 전환」


아베정권의 경제정책과 안보・외교전략은 동전의 앞뒤 관계에 있다.

아베는 2014년 2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오바마와 정상회담에 임했다. 회담 후 아베는 보수적인 연구기관, 워싱턴의 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Japan is back (일본은 돌아온다)」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이 제목에서 정권에 복귀한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아베는 2006년 9월에 한 번 자민당 총재로서 수상의 자리를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그 자리를 1년 만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각료의 연이은 폭언・망언의 뒤처리를 하는 데에 몰렸고 그 자신의 지병이 악화된 것 또한 치명상이 되었다.

이 기간의 특징은 거의 1년 주기로 내각이 잇따라 바뀌는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계속되었던 점이다. 아베의 뒤를 이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에서 그 다음에 아소 다로(麻生太郎)로,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정권교체 후에도, 또 다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로부터 간 나오토(菅直人)를 거쳐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로까지 어지럽게 변했다. 일본 자본주의가 떨어진,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수상이 누가 된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도 없다. 3・11은 설상가상의 난제를 민주당 정권에게 가중시켰다. 그 사이 아베는 권토중래를 기약하고 측근의 어용학자 진용을 정비하여 “이론무장”을 했다. 그가 재등장하자 이러한 사실이 한층 명확해졌다.

아베의 정치신조인 「전후(戦後) 체제의 전환」은 2007년 1월의 통상국회의 시정방침 연설에서 등장했다. 제 1차 아베 내각은 단명했다고 해도 전후 민주교육의 이념을 근본부터 뒤엎은 교육기본법 개악, 헌법 개정 절차를 정한 국민투표법 제정, 방위청의 방위성으로의 격상을 1년 임기 중에 달성할 수 있었다.

CSIS에서 했던 강연에서 아베는 중국의 대두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일본은 2급 국가가 되지 않는다.’, ‘나는 돌아왔다, 일본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규칙의 증진자로서 주도적인 지위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미동맹 강화와 함께 자국의 군비증강을 추진할 의사도 분명히 했다. 그것은 마치 그 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지위 회복에 집념을 불태우는 강렬한 선전포고와 같은 분위기를 드리웠다.

종군위안부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고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강행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아시아 국민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아베 및 그의 동조자의 수많은 언동은, 국제적 비난-엄중한 항의, 염려〮우려 표명-을 받았다. 중국〮 한국과의 정상 간 교류는 여전히 두절된 상태이다. 미 오바마 정권도 「아시아 회귀」 전략수행에 방해가 되자 「불만」을 더해가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도 아베는 기가 꺾일 기미가 없다. 왜 그런 것인가.

아베는 일본제국주의의 국제적 지위 저하, 특히 아시아에서 상대적 지위 저하에 대한 강렬한 위기의식과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저히 한 결과 국민 의식의 통합의 어려움, 이 두 가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아베 정권의 안보・외교전략은 일미동맹의 틀 하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독자적인 이익을 추구하여 아시아에서 현저히 대두하고 있는 중국과 패권을 다투는 자세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의 일중관계를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독(영국-독일)관계에 비유한 아베가 2014년 1월의 세계경제 포럼(다보스 회의)에 출석했을 때의 발언은 심각한 우려를 일으켰다.


아베의 재등장으로 가속하는 개헌정세


아베가 주장하는 「전후(戦後) 체제의 전환」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규정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질서를 부정하는 것을 내포한다. 그는 이 역사관을 현실정치의 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극동의 반공방파제로서 일본의 독점자본주의를 부활시킨 미국 제국주의의 1947년부터 48년에 걸친 점령정책의 전환이 초래한 것이다. 점령당국은 침략전쟁의 최고책임자인 천황의 책임을 면제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을 앞둔 1951년 6월부터 8월에 걸쳐 전범 8만여 명의 추방을 해제했다. 이후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일본인민의 과제가 되었다. 허나 「전전(戦前)」적인 것은 전후 민주혁명의 패배와 더불어 청산되지 않고 이어져 전후의 일본정치의 저류를 관통하며 일본 제국주의 위기의 한복판에서 공공연하게 되살아나 현실정치에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집권여당인 자민당(자유민주당)과 공명당은 국회의석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자민당은 투표율이 전후(戦後) 최대였던 2012년 12월의 중의원 선거에서 소선거구제의 마술에 도움 받아 43%의 득표율(유권자 대비 26%)로 의석의 82%를 점유했다. 모두의 당이나 일본유신회와 같은 자민당의 아류・별동대를 포함하면, 의석수는 헌법개정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를 훌쩍 넘는다. 아베에게 있어 현재는 그의 정치이념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아베는 작년 가을 이후 미국 제국주의와 보조를 맞춰 일본을 “전쟁 하는”, “전쟁 가능한” 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 헌법 9조(전쟁의 포기, 전력의 불보유, 교전권의 부인)의 골자를 제거하는 해석헌섭의 완성에 매진해왔다. 그들은 작년 가을 임시국회에서 여론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안전보장회의(일본판 NSC) 설치법과 특정비밀보호법을 강행했다. 그 후 초점은 집단자위권 행사용인을 한 번의 각의결정으로 가능하게 하는, 입헌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폭거로 이어졌다. 만약 이것을 허용한다면 헌법개정 절차를 밟는 일 없이 헌법 9조의 파괴가 완성된다.

1989년 총평(総評) 해체・렌고의 성립 이래 운동의 주요한 형태는 「시민」중심으로 변했다. 노동자계급은 독점자본의 가혹한 신자유주의 공격에 노출되어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로 해체되어 직장・생산현장에서 투쟁력을 잃었고, 노동조합운동의 시민운동화가 진행됐다. 노동자 정당의 국민정당화, 계급성을 상실한 소부르주아 의회주의로의 전락이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운동을 좀먹는 이러한 지배적 상황을 전환하여 노동자계급의 대열을 다시 운동의 중심축에 위치시켜야 한다. 이 과제를 달성하지 못하면 일본인민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헌법투쟁은 헌법 28조가 보장하는 노동기본권 즉, 단결권・단체교섭권・쟁의권을 행할 수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계급적 재건을 바라보는, 노동자와 노동조합 주체의 투쟁태세를 구축하는 것에 있다. 1987년 국철 분할・민영화 때에 국가적 부당노동행위로 직장에서 쫓겨나 투쟁을 계속했던 1047명 국철 노동자의 해고철회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서 집결했던 노동조합의 선진적 활동가는 지금, 헌법 파괴를 위한 궁극의 해석개헌을 저지하는 투쟁에 제한적이지만, 지니고 있는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끝>

표2. 2013년 10~12월 GDP개정치

(괄호 안은 속보 값. 수치는 전기 대비%, 기여도는 %, ▲는 마이너스, 민간재고는 기여도)
분기별 실질 GDP 성장률(연 환산율) (단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