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공적소유, 계획경제는 유효한가?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9. 16:14

공적소유, 계획경제는 유효한가?

 

<노동자정치신문>[94(통합 106)-96(통합 118), 20133, 4, 5]

 

 

20121221

스티븐 가우언스(Stephen Gowans)

출처: 블로그 ‘what's left’ http://gowans.wordpress.com

 

(편집자 주: 스티븐 가우언스는 제국주의의 봉쇄라는 외부적 요인 중심으로 쏘련 붕괴 원인을 설명하면서 쏘련이 비록 붕괴됐지만 그것은 부르주아 진영에서 말하는 계획경제의 내재적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그는 공적 소유, 계획 경제가 실제 어떠한 거대한 성과를 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이 글의 이러한 접근 방식에 대해서 이 글이 실린 블로그 댓글에서도 붕괴의 내적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는 독자의 지적이 있었다. 가우언스는 이에 대해 외부적 원인이 내적 원인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답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글을 세 번에 걸쳐 번역할 것이다.)

 

 

자본주의에 비해 쏘련의 공적소유, 계획경제는 명백히 잘 작동하였는가?

 

 

쏘련은 공적소유, 계획경제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였다: 완전고용, 연금 보장, 유급 출산 휴가, 노동시간의 제한, 무상 의료와 무상교육(고등교육을 포함하여), 휴가비 보조, 저렴한 주택, 낮은 비용의 보육, 공공운송의 지원, 대략적으로 이루어진 소득의 평등.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혜택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영구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가? 쏘련은 이러한 혜택을 시행했지만 결국 쏘련의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는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나라의 몰락을 설명하겠는가? 그러나 쏘련 경제가 1928년에서 1989년까지 공적소유와 계획경제이었을 때,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쏘련 경제는 해마다 매년 분명히 발전하였다.

 

자본주의 경제가 분명 몇 년에 한 번씩 매번 큰 폭의 불황에 빠지고 경기후퇴에 빠졌던 반면, 쏘련 경제는 명백히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끊임없이 발전했고 항상 모두를 위한 일자리를 제공했다. 쏘련의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는 제대로 작동했을뿐만 아니라 눈에 띄게 성공하였다.

 

때때로 불황, 주기적인 경기후퇴, 대량 실업, 극도의 빈부격차, 무엇보다 분명 오늘날 수축하고 침체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할 일이 없게끔 강요하는 자본주의야말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쏘련을 결국 몰락으로 이끌었던 것은 쏘련을 붕괴시키기 위한 쏘련 경제에 대한 서방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공격, 레이건 행정부의 냉전 격화 및 이러한 사태를 야기하는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는 쏘련 지도자들의 무능력이었다.

 

 

[사진1]1928년에서 1989년까지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일자리, 주거지, 모두에게 낮은 비용과 비용이 들지 않는 공공서비스의 폭넓은 범위를 제공하면서 공적소유와 계획경제의 쏘련 경제는 성장하였다. 반면 자본주의 경제는 주기적 경기후퇴로 침체되었고 삶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들을 벗어나려는 투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1980년대 쏘련에는 냉전에 대한 부담감이 등장했다. 쏘련 경제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과거보다는 느린 속도였다. 이념적 경쟁자인 미국과의 군사경쟁은 다방면에서 속도를 늦추도록 했다. 첫째, 가장 우수한 과학자들, 기술자들, 기계공들과 같은 민간경제를 굶주리게 하면서 연구와 개발자원은 군수산업에 의해 독점되었다. 두 번째, 레이건 행정부가 노골적으로 쏘련 경제를 파괴하겠다고 목표한 군비경쟁으로 급격하게 긴장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군사비용은 증가하였다.

 

미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쏘련은 GDP의 상당한 비율을 군수산업에 썼다. 반면 더 큰 경제력이 있는 미국은 절대적인 기간에는 더 많은 양을 군수산업에 들였지만 국가 수입에 비해서는 더 낮은 비율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셋째, 쏘련을 무릎 꿇리려고 차단할 가능성이 있던 주요 원료를 외국 수입에만 의존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쏘련은 광대한 영토에서 나오는 원료를 추출하는 것을 선택했다. 국내 자원개발은 쏘련을 자급자족하도록 만들었던 반면, 그것은 쏘련을 리카아도주의자의 덫에 빠뜨리도록 했다. 오래되고 얻기 쉬운 자원들이 소진된 만큼 새롭고 얻기 어려운 자원의 개발이 필요했기 때문에 원료 생산비용은 증가했다.

 

넷째, 쏘련을 더 잘 방어하기 위해, 쏘련은 동유럽과 제3세계와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쏘련은 동맹을 맺었던 국가나 운동단체보다 더 부강했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 해방운동, 서방 자본주의의 힘과 약탈로부터 벗어나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국가들에게 방어벽 또는 후원자가 되었다. 동맹국들의 수가 늘어나자, 워싱턴은 쏘련 재무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반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지원하고 군대와 금융을 교란시키려 했고, 이 때문에 쏘련 동맹국을 지원하는 모스크바의 비용 부담은 증가했다. 이러한 요인들-쏘련의 방어라는 필요를 위해 제공한 것의 필연적인 결과-로 인해 결국 쏘련 경제 성장을 심각하게 방해할 정도로 비용이 증가했다.

 

성장이 지체되고 국가방어 비용이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쏘련이 지탱할 수 없는 군사적 국면과 군비경쟁이 몰아간 파산이라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쏘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미국을 따라 잡기 위한 군사비용으로 경제를 파산시키거나 군비경쟁에서 전격 철수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후자를 선택했다.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철회하고 미국과 협조를 맹세하면서 그는 냉전을 종식시키려고 움직였다. 경제 전선에서, 그는 쏘련을 서구적 민주주의로 변화시키는데 착수했다.

 

그러나 대외정책과 경제정책에서 고르바초프가 했던 항복은 과거의 느린 경제성장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기는 커녕, 오히려 재앙을 초래했다. 쏘련이 억제력으로부터 손을 떼자 미국은 이라크에서부터 시작해 유고슬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으로, 나아가 다시 이라크로 또 리비아로, 이들 국가들에 대한 수많은 사소한 개입 및 전 세계에 대해 침략행위를 계속했다. 고르바초프의 계획경제 포기와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길을 확고하게 하려는 시도들은 쏘련을 공황으로 몰고 갔다. 5년이 안 되어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파산했다. 실업, 무주택, 경제적인 불안정과 사회적인 기생충(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지해 살아가는)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왔다.

 

1991년 크리스마스에 쏘련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고르바초프는.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 냉전은 끝났다. 우리의 경제, 사회, 가치를 위협했던 군비경쟁과 비정상적 군사국가화는 끝이 났다. 세계전쟁 위협은 해체되었다.” (Roberts, 1999) 이로 인해 고르바초프는 서양에서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덜 열정적이었다.

 

고르바초프의 말 속에는 자본주의 대안을 건설하려는 전 세계적으로 첫 번째 의식적인 시도가 왜 종말을 맞게 되었는지에 관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쏘련 경제 체제가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쏘련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보다 더 잘 작동했다. 쏘련 몰락의 진정한 이유는 쏘련 지도부가 미국이라는 적에 굴복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2차 대전 종결부터 레이건 행정부 동안 열기를 더해가며 쏘련 경제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군비경쟁으로 몰아갔다.

 

이는 99%의 밑바닥 사람들을 위해 작동한 경제였다. 그러므로 번영이 허용된다면, 1%의 최고 부자들만 선호하고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적소유, 시장경제를 불신했을 것이다. 거대한 부, 안전, 독점산업과 거대금융의 특권과 실업, 가난, 배고픔, 경제적 불안정, 모욕 -1% 의 최고 부자들이 필요한 조건- 이밖에 많은 것을 조장한 것은 바로 자유로운 거대기업과 시장경제라는 모델이었다.

 

쏘련이 몰락한 후 21년 동안은 평화롭지가 않았다. 전 세계 처음으로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를 지도한 스탈린은 한때 예언자적인 경고를 했다: “자본주의가 쏘비에트 공화국을 분쇄하는데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과 식민지 국가들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반동의 시대가 개시될 것이다. 노동계급과 피착취계급은 목이 조일 것이고 국제공산주의의 위치는 상실될 것이다”(Stalin, 1954).

 

그리고 스탈린은 그의 조국이 공격에 대비해 단 10년만을 준비할 수 있었던 나치의 침략,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정확히 10년 전에 예언했던 것처럼, 역시 자본주의의 힘에 쏘련이 몰락하는 결과를 정확하게 예견했다. 정말로 극악무도한 반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제 워싱턴은 전 세계에 자기들의 반동적 내용을 추구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사용하는 지역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는 쿠바와 북한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과 동맹국들은 경제제제, 외교적 고립, 소유 철폐의 경제를 파괴하려는 군사적인 압박(마치 그들이 쏘련 경제에 그랬던 것처럼)을 사용하기 때문에 결론이 공적소유와 계획경제의 결함이라고 잘못 주장될 수가 있다. 실제로 그것은 저강도 전쟁이라는 조직적인 계획의 결과이다.

 

쏘비에트 경제체제는 실패했다고 믿도록 조장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지지자들이나 쏘련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는 본래부터 결점이 있는 체제라고 결론을 내린다.

 

게다가 더 이상 공적소유와 계획경제에 대한 매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없게 된 서구 정부들은 완전 고용의 공공정책 목표를 포기하고 강력한 공공서비스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Kotz, 2001). 동시에 구쏘련과 구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사유화로 임금수준의 예측 가능한 결과들과 더불어 세계적인 임노동의 공급을 확대했다. 쏘련의 패배는 자본주의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스탈린이 경고했던 것처럼, 소수를 위해 우리의 목이 조여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자본주의 경제는 2008년 이후 공황 상태에 있다. 어떤 국가들은 긴축이라는 죽음의 소용돌이의 덫에 걸려 있고, 어떤 국가들은 경기후퇴에 빠져 대부분 기껏해야 저성장 상태에 있다. 긴축-실질적으로 공공서비스를 제거하는 것-은 가짜 처방일 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공식적 실업률이 두 배에 달하고 청년실업은 여전히 더 높은 상황이다.

 

인구가 1,100만 명이 되는 그리스에는 겨우 370만 명이 고용돼 있을 뿐이다(Walker and Kakaounaki, 2012). 더욱이 미국과 동맹국들은 쏘련의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를 끝장내기 위해 체계적인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황은 자본주의 붕괴를 가져오는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힘 밖으로 결코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파괴하려는 조직화된 노력같은 장애물 없이 자유로운 발전을 하는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로 이루어진 쏘비에트 모델- 처음부터 이를 약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단결되었던-2차 대전 기간 동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경기후퇴에 빠져들지도 않았고, 완전고용을 이루는데도 실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쏘련 모델은 쏘련을 지지했던 몇몇 사람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에게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세간에 알려진 오해와는 달리 쏘련의 경험은 실패의 운명을 가졌던 공적소유와 계획경제 내부에 본래의 약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정반대 사실을 보여주었다-공적소유와 계획경제는 자본주의가 못하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 끊임없는 경제성장, 완전고용, 무료이거나 무료에 가까운 광범위한 공공서비스 수준, 대단히 평등한 수입 분배.

 

게다가,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는 해가 갈수록 효과를 발휘했고 쏘련의 지도력이 종말을 가할 때까지 계속 효과를 발휘했다. 상위 1%들에게는 반대되었지만 99%의 밑바닥 사람들을 위해 훌륭하게 작동한 체제를 분쇄하기 위해 그들은 군사적, 경제적, 사상적인 수단들을 이용해 사적소유를 방어하려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오늘날 쿠바와 북한을 향해 계속하고 있는 시도).

 

쏘련의 패배는 진실로 어두운 반동의 시대를 예고해 주었다. 해결책은 여전히 남아있다. 공적 소유와 계획-1928년부터 1989년까지 쏘련의 경험으로 명백히 잘 작동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그리고 이것을 파괴하고 비방하며 불신하는 자들과의 투쟁이다.

 

 

쏘비에트 공적소유와 계획경제가 일반적인 쏘련 시민들을 위해 했던 것들

 

 

쏘비에트 경제체제 이점은 자본주의 병폐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 -실업, 인플레이션, 불황과 경기후퇴,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끝장냈다는 것; 말 그대로 착취와 다른 사람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는 관행을 끝장냈다는 것; 무료와 실질적으로 무료인 공공서비스를 폭넓게 제공했다는 것.

 

쏘비에트 경제의 가장 중요한 성취 중에는 실업의 철폐가 있었다. 쏘련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은 헌법에서 소중히 여겨지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회적 의무로 간주되었다. 1936년의 헌법은 쏘련의 시민들은 일할 권리가 있다. , 쏘련의 시민들은 고용과 양과 질에 따른 일의 보수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을 규정했다. 반면 노동이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 생계를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지대, 이윤, 투기나 암시장-사회의 기생충들-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을 얻는 것은 불법이었다(Szymanski, 1984). 노동은 대체로 단기 공급이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는 것은 쉬웠다. 결국 노동자들은 직업의 안정이 주는 명백한 혜택, 노동자의 만족에 많은 관심을 두는 경영 방식과 더불어 직장에서 높은 교섭력을 갖고 있었다(Kotz, 2003).

 

1977년 헌법 41조에서는 주 41시간 노동으로 상한을 정하고 있었다. 야간 교대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7시간 일을 했지만 완전한 변환 보수(8시간)를 받았다. 위험한 일을 하거나(, 광부들) 계속 긴장해야하는 노동자들(, 의사들)6시간 혹은 7시간 일했지만 풀타임 보수를 받았다. 초과 근무는 특별한 상황을 빼고는 금지되었다(Szymanski, 1984).

 

1960년대부터 노동자들은 원조를 받은 휴양지에서 보낼 수 있는(Kotz, 2003), 평균 한 달짜리 휴가를 받았다(Keeran and Kenny, 2004; Szymanski, 1984).

 

쏘비에트의 모든 60살이 된 남성들과 55살이 된 여성들에게는 퇴직 연금이 제공되었다(Lerouge, 2010). 연금에 대한 권리(장애인 혜택뿐만 아니라)는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정치인들의 순간적인 변덕에 따라 변하거나 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쏘비에트 헌법에 의해 보장되었다(Article 43, 1977).

 

1936년 초 여성들은 완전한 보수를 받는 임신 휴가를 보장받았고, 다른 많은 혜택들과 마찬가지로 쏘비에트 헌법에서 보장받았다(Article 122, 1936). 또한 1936년 헌법으로 임신한 가정, 육아와 유치원의 폭넓은 연결망을 제공했다. 반면 1977년 개정된 헌법은 광범위한 탁아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제공하여, 자녀 출산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방법으로, 대가족을 위한 육아 수당과 혜택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가족을 돕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했다. (Article 53). 쏘련은 공공 탁아를 발전시킨 첫 번째 국가였다(Szymanski, 1984).

 

[사진2] 미국인들이 의료비에 지불해야하는 것이 쏘련인들에게는 매우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고 쏘비에트 시민들은 이 점을 매우 의아해하며 미국 관광객들에게 종종 질문을 하곤 했다.”

 

쏘련 여성들은 고용, 휴식과 휴가, 사회보장과 교육 영역을 포함해 경제적, 국가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았다(Article 122, 1936). 쏘련이 최초로 시행한 많은 조치들 중에서도, 쏘련은 낙태를 처음으로 합법화하였는데 이는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고 가능했다(Sherman, 1969). 쏘련은 또한 여성이 정부 최고위직에 들어간 첫 번째 국가였다. 보수적인 이슬람의 반여성적인 압제자들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쏘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강력한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이는 이 지역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급진적으로 변모시켰다(Szymanski, 1984).

 

주택에 대한 권리는 1977년 헌법 조항에서 보장되었다(44). 그러나 도시 주택 공간은 오스트리아나 서독의 일인당 도시의 주택 공간의 약 절반으로 비좁고 갑갑했다. 그것은 짜르 시대의 부적당한 건물,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대량 주택 파괴, 중공업에 대한 쏘비에트의 강조 때문이었다. 10월 혁명 이전에 대중을 위한 부적절한 도시 주택이 지어졌다. 혁명 이후 새로운 주택이 세워졌으나 여전히 불충분한 상태였다. 주택은 수도로 심하게 몰렸고, 정부는 산업 건설을 위해 이를 긴급히 필요로 했다. 게다가 나치 침략자들이 2차 세계대전 동안 쏘비에트 거주지의 1/3에서 1/2을 파괴했다(Sherman, 1969).

 

도시 거주민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이 일하는 기업이나 지역 정부 소유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임대료는 대략 가족 예산의 2~3% 정도로 법에 의해 무료나 다름이 없없다(Szymanski, 1984; Keeran and Kenny, 2004). 이는 임대료가 평균 가족 예산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던 미국과는 너무나도 달랐고(Szymanski, 1984),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식품들과 다른 필수품들은 보조를 받았다. 반면에 사치품들은 제 가격 이상으로 잘 팔렸다.

 

공공 운송은 효율적이며, 광범위했고, 실질적인 무료였다. 지하철 요금은 1970년대에 대략 8센트였는데, 1930년대 이후 그대로였다(Szymanski,1984).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존재했던 어떤 것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효율적이고, 적당한 가격이었으며, 광범위한 공공 운송으로 자동차 제조업자, 석유 회사, 민간 기계 회사들이 이윤을 창출할 기회들을 강하게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회사들은 민간 운송에 비해 광범위하고, 효과적이고, 값싼 공공 운송이 대안으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재산, 관계, 영향력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이윤을 지키려 한다. 일자리를 계속 제공하기 위해 민간 산업을 즐겁게 유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던 정부는 계속 역할을 하는데 제약을 받았다. 이를 바꿀 유일한 방법은, 의식적으로 계획된 공공적 목적에 맞도록 자본을 이용하기 위해 자본을 공공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었다.

 

쏘련은 자본주의 경쟁국들보다 더 의료를 강조했다. 쏘련보다 일인당 의사나 일인당 병실이 더 많은 국가는 없었다. 1977년 미국에는 10,000명당 18명의 의사와 63개의 병실이 있었던 것에 비해 쏘련에는 10,000명당 35명의 의사와 212개의 병실이 존재했다(Szymanski, 1984).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료가 무료였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의료비에 지불해야하는 것이 쏘련인들에게는 매우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고 쏘비에트 시민들은 이 점을 매우 의아해하며 미국 관광객들에게 종종 질문을 하곤 했다.”(Sherman, 1969)

 

대학교육 역시 무료였고 장학금은 중등이상의 학생들에게 충분했으며, 교과서, 식사와 방, 다른 비용들을 지불하는데 충분했다(Sherman, 1969; Szymanski, 1984).

 

쏘비에트에서 소득의 불평등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해 적었다. 최고소득과 평균임금 사이의 차이는 미국에서 의사의 소득과 평균적인 노동자의 소득 사이의 차이와 같았는데, 대략 8배에서 10배 차이였다(Szymanski, 1984). 엘리트들의 고소득으로 보통의 집과 차를 구입할 수 있는 이상의 특권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Kotz, 2000).

 

이에 비해, 2010년 캐나다에서 최고 소득을 버는 100명의 CEO들은 풀타임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155배 이상을 벌었다. 풀타임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43,000달러였다(Canadian Centre for Policy Alternatives, 2011). 10배가 되는 소득은 430,000달러로 대략 자본주의 엘리트들이 일주일에 버는 정도였다. 쏘비에트 소득의 불평등의 정도를 완화하는 요소는 모든 쏘비에트 시민들이 필수적인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하거나 사실상 거의 비용없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물질적인 불평등의 정도는 소득의 불평등 정도보다도 작았다(Szymanski, 1984).

 

전 세계 자본주의 대다수 국가의 대통령, 수상, 세습군주에게는 평범한 거주지인 호화로운 대저택에 쏘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살지 않았다(Parenti, 1997). 고르바초프는 4인 가족용 아파트에 살았다. 레닌그라드의 최고위급 건설 공무원은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반면 민스크(Minsk)의 최고위급 정치 공무원, 그의 아내, 딸과 사위가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거주했다(Kotz and Weir, 1997). 쏘련을 비판하는 이들은 엘리트를 착취하는 지배계급인 것으로 비난했지만 엘리트의 평균적인 소득과 누추한 물질적인 환경은 이러한 평가에 대해 심각한 의심이 들도록 한다. 만약 엘리트가 정말로 착취하는 지배계급이었다면, 이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기묘한 지배계급이었다.

 

 

공적 소유와 계획 하에서 쏘비에트 경제의 성장 기록

 

 

쏘비에트 경제가 공적 소유와 계획 생산이 되었던 1928년 이후부터 자유시장 경향으로 향해 간 1989년 시기까지, 쏘비에트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성장은 일본, 한국, 타이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들 보다 앞섰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서유럽에서는 4.0%로 성장했고, 서유럽 주변국(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3.3%였던 것에 비해, 5.2%의 수준으로 성장했다(Allen, 2003).

 

경제로 존재했던 기간 동안에 쏘련에서의 소득 인상 수치는 산업화된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 보다 더 높았다. 이 기간 동안 쏘련에서의 강고한 성장은 나찌 독일에 의해 대규모 공격이 자행됐던 전쟁 시기를 고려한다면 더욱더 인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나찌에 의한 전쟁 기간은 쏘련에 심각한 파괴의 상흔을 남겼다. 독일 침략자들은 70,000개의 마을, 31,000개의 공장, 그리고 거의 1억 마리의 가축류와 1,500개 도시와 마을 전체를 파괴했다 (Leffler, 1994).

 

성장은 1970년까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때부터 쏘비에트 경제의 확장 수준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고 그릇된 이름이 부쳐졌다) 이른바 1970년 이후의 침체기라 불리는 이 기간 동안에도 1인당 국내총생산은 27%나 성장했다 (Allen, 2003).

 



아이폰. 자유기업에 의해 생산됐는가? 다시 생각해보자.

 

쏘비에트 1인당 국내총생산 성장 수준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 경제 보다 순조롭게 성장하였는데, 좀 더 적절한 비교를 위해 그 동안에 쏘비에트 경제와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의 경제 상태를 비교해 볼 수 있다. 1928년 쏘련은 여전히 주되게 농사를 짓는 국가였고 서유럽과 북미에서는 농민이 소수였던 것에 비해 쏘련의 대다수 인민은 농업에 종사했다. 따라서 공적소유와 계획경제로의 이행기에 있는 쏘련 경제는 산업화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와는 무척 달랐다. 반면 그밖에 자본주의 국가들 또한 주로 농업국으로 쏘련과 유사한 상태였다(Allen, 2003).

 

따라서 쏘련과 경제 상태를 비교해야 하는 나라들은 미국이나 다른 발전한 공업화된 국가들이 아니라 나머지 자본주의 국가들이다. 1928년부터 1989년까지 쏘비에트 1인당 국내총생산은 다른 부유한 국가들의 성장을 초과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의 다른 모든 지역 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했다. 따라서 쏘련 공적 소유와 계획경제는 더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 경제를 능가했을 뿐만 아니라, 1928년 쏘련과 가장 흡사한 경제 상태였던 나라들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했다. 그 예로 미국 외부 남쪽 핵심인, 남미 국가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1990년 미국 달러로) 1,132달러였는데 쏘련의 1,370달러와 거의 비슷했다. 1989년이 되어 남미의 1인당 국내총생산 수치는 4,886달러에 달했지만, 쏘련에서의 평균 소득은 7,078달러로 훨씬 더 높게 상승했다 (Allen, 2003).

 

공적 소유와 계획 경제는 남미 자본주의 국가들과 동등한 출발점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수준을 훨씬 더 높게 끌어 올렸다. 더욱이, 쏘련의 평상시 경제가 충실하게 성장한 반면에 남미 경제는 기업들이 주기적으로 폐업을 하고 피고용자들이 정리해고 되면서 발작적으로 성장했다.

 

공적 소유와 계획이 생활수준을 올리는데 어떻게 더 잘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는 아마도 중동과 남아시아 인근 국가들과 쏘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소득을 비교해보는 것일 것이다. 1928, 이들 지역들은 산업화 국가의 이전 단계에 있었다. 공적 소유와 계획 경제 하에서, 쏘비에트 중앙 아시아 소득은 19891인당 연간 5,257달러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러한 성장은 인근 자본주의 국가들인 터키보다 32%, 이란 보다 44%, 파키스탄 보다는 241%가 더 높은 것이었다(Allen, 2003). 중앙아시아를 보면 쏘련 변경 지역의 생활수준이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 분명하였다.

 

 

미국의 쏘련 연구개발(R&D) 공적자금에 대한 경쟁

 

 

자유기업 경제 옹호자들은 공적 소유와 계획경제는 혁신을 억누르는 반면, 자유기업은 그것을 고취시킨다고 사람들이 믿도록 하려한다. 그렇다면 다음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쏘련은 처음으로 우주 탐사 기록을 세우면서, 1950년대에 우주공간에서 미국한테 승리함으로써 결국 워싱턴이 발작을 일으키도록 하지 않았는가?

 

* 구글 검색 엔진의 기법에서 인터넷, 발전된 약품들과 아이폰까지, 미국에서 대부분의 혁신은 사적기업 투자에서가 아니라 정부 자금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가?

 

사실상, 혁신과 관련한 진실은 자유기업을 장려하려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게끔 하려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혁신은 자유기업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추진하는 계획과 공적 자금에서 나온다.

 

보다 더 역동적이라고 여겨지는 미국에 비해서 쏘련은 언제나 부족한 둘째가는 국가라는 그릇된 견해에 비춰 생각해 봤을 때, 우주에서의 쏘비에트 성취물들은 정말 놀랍다. 인공위성 발사, 동물 궤도 비행, 인간 궤도 비행, 여성 궤도 비행, 우주유영, 달 충돌(moon impact), 달 뒤쪽 이미지 촬영, 무인 달 연착륙, 우주 탐사선, 우주 정거장과 행성 간 탐사 우주선이 쏘련이 최초로 한 성취물들이다.

 

쏘비에트 경제의 이른바 숨 가쁜 혁신으로 쏘련이 미국에 승리한 뒤, 워싱턴에 불러일으킨 충격은 미국이 훨씬 더 첨예하게 이데올로기적 경쟁을 가속화하고 우주공간에서까지 쏘련의 행동을 따르도록 자극했다. 쏘비에트가 했던 것처럼 워싱턴은 혁신을 위한 연구기관을 강화하는데 공적 자금을 사용했다. 이는 국방고등연구기획국(Def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DARPA)을 통해 진행되었다. 국방고등연구기획국은 공적자금을 군사나 우주 등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전달하고는 했다. 국방고등연구기획국을 통해 나온 혁신의 대부분은 궁극적으로 사적이윤을 위해 기금을 사용하려고 하는 사적 기업 투자가들에게 돌아갔다 (Mazzucato, 2011).

 

이런 식으로, 사적 투자가들이 자신들의 자본 투자 위험성을 줄이게 되면서, 자유기업이라는 신화는 마치 그것을 그들이 한 것처럼 우리를 믿도록 한다. 이 신화를 통해서, 훨씬 더 통찰력 있고 대담한 자본가들은 그들이 결코 지불하지 않으려 했던, 연구에 대한 자본 손실 대신에 상당한 이윤을 얻게 된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위험과 불확실성이 높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는 공공에게로 부담시키면서, 자기 자본은 수익이 빠르고 위험이 적은 투자처에 투자하는 것이 투자자들에게는 훨씬 낫다. 투자자들은 돈과 영향력, 연줄을 이용하여 정치인들을 성공적으로 압박하여 만족스러운 계약을 체결하도록 한다.

 

사실 자유 기업은 속임수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다. 위험은 사회화되고’(, 사기를 당하는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공공에게 부담을 주는) 이윤은 사유화’(연구 개발에 대한 자금의 부담을 공공이 지도록 정치인들을 잘 이용하는 투자자들에게)된다.

 

블락과 켈러(2008)의 연구는 1971년과 2006년 사이에 R&D 매거진의 88개 최고의 혁신 중 77개는 미국 정부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마리아나 마주카토(Mariana Mazzucato)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가디언의 논객인 시우마스 밀네(Seumas Milne)2012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글의 성공을 뒷받침해주었던 규칙은 공적인 자금지원이었다. 애플사의 아이폰 기술은 공공부분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획기적인 신약물질을 개발하는데 자금을 제공한 것은 거대 제약회사가 아니라 정부였다. 사적 기업은 그 뒤에 사소한 변화를 가했다. 그리고 핀란드에서 노키아의 초기 발전과 투자에 대한 수익을 지원한 것은 공공분야였다. 원자력발전, 인공위성과 로켓 기술, 인터넷이나 다른 혁신적인 사례들은 공적 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사적 이윤을 위해 이용되어왔다. 미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11년 국정 연설에서 이러한 사기적 속성을 인정하였다. ‘우리의 자유 기업 체제는 혁신을 강화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연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기초 연구 분야에 투자를 하는 것이 기업에게 항상 수익성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정부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최첨단 과학자와 발명가들을 후원하며 제공했다.’라며 자기 모순적 말을 했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1) 미국은 쏘비에트의 국가 지도적 연구 모델을 모방하면서 경제적 혁신을 촉진하였다. 자유 기업으로서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 미국은 공공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쏘비에트 모델을 모방하기 보다는, 공적 자금을 사적 이윤을 위한 연구개발(R&D)로 유입시켰다. 두 번째 특징에서 세 번째 특징을 유추할 수 있다: 사회적인 손실을 통해 생겨난 이익을 쏘비에트는 사회화했지만 미국은 사유화했다는 것은 두 체제의 상반된 본질을 보여준다: 하나는 대중의 이익을 위해 조직된 대중 지향적 사회, 하나는 경영권을 가직 소수의 이익을 위해 조직된 상업적 사회. “기초 연구 분야에 투자를 하는 것이 기업에게 항상 수익성을 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미 대통령이 고백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혁신을 촉진하지 않는다. 반면 국가 주도적 지원이 혁신의 원천이다. 분명 정치적인 문제로 두 가지 환상이 조장되었다. (a) 공적 소유와 계획의 체제는 혁신을 억압한다. (b) 이윤체제는 혁신을 촉진한다.

 

 

왜 성장은 둔화되었나

 

 

1928년에서 1989년까지 소비에트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는 동안에도 북미 경제, 서유럽이나 일본의 경제를 넘어섰던 적은 없다. 따라서 러시아의 1인당 소득은 산업화된 자본주의 경제보다 언제나 낮았다. 소득과 생활수준의 상대적 부족은 공적 소유와 계획이 비효율적이라고 악선동 되는데 이용되었다. 오히려 실제로는,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보다 뒤처져 출발했기에 쏘련은 더 많이 나아갈 것이 있었다.

 

1928년에 경쟁이 시작되었을 때, 쏘련은 여전히 거대 농업 국가였던 반면 미국은 산업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쏘련은 억압적인 짜르 러시아 시절에 미국이 이미 이루었던 것들을 진행시켜야 했다. 또한 쏘련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일본이 공식, 비공식적 제국들에서 착취한 부와는 달리, 다른 나라에서 착취한 부 없이 이러한 것들을 이룩해야 했다.(Murphy, 2000) 사실 쏘련도 헤게모니를 발휘하는, 일종의 제국이 동유럽에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를 제외하고 이러한 국가들은 결코 경제적으로 쏘련에 착취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유럽에 원료를 수출하고 생산물을 수입하는 쏘비에트는 위성국과의 무역관계에서 손실을 보게 되었다. 나토의 창설에 대한 방어적 동맹으로 형성된 바르샤바 조약의 일부로 남아있는 조건과, 공적 소유와 계획 체제와 유사성이 있는 한 모스크바는 동유럽 동맹이 스스로의 방향성을 세우도록 허락했다. 곧 쏘비에트 주도권은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적용하는데 제한받게 되었다(Szymanski, 1979).

 

1970년대 중반까지 워싱턴에서는 쏘비에트 경제가 미국을 추월하려 한다는 심각한 우려가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언제나 미국의 평균소득이 더 높고, 높은 생활수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자유 기업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도록 했기에 쏘비에트가 선두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었다. 미국에서 신중하게 만들어진 수치에 따르면 쏘비에트의 GNP(국민총생산)가 미국 GNP수준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1950년대에 쏘비에트 경제는 미국 경제의 1/3 수준이었는데 8년 뒤에는 거의 1/2 수준으로 성장했다(Sherman, 1969).

 

1975년까지, CIA는 쏘비에트 경제가 미국 경제의 60%정도 수준이라고 추정했다(KotzWeir, 1997). 하지만 쏘비에트의 경제성장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알렌이 연구한 수치(2003)에 따르면, 쏘비에트에서의 일인당 GDP(국내총생산)1928년에서 1970년까지는 매년 3.4%가 증가했지만 1970년에서 1989년까지는 이전의 반도 안 되는 수준인 1.3%가 되었다. 우주경쟁에서 패배한 것에 경각심을 얻고, 경제적으로도 쏘련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상이 사실로 되어가는 것에 동요된 미국이 쏘비에트 경제 발전을 방해하지 않았던가?

 

냉전은 쏘련의 성장 전망에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와 연줄을 정치적 지배를 위해 이용하려는, 산업과 거대 금융의 지도자들에게는 계획, 공적 소유의 경제가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을 쏘비에트 지도자들은 인식했다. 쏘련은 여러 차례 침입을 받았으며, 쏘비에트를 지도에서 쓸어 없애버리려는 자본가들의 공격에 두 차례 놓였다. 앞으로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군사적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쏘련은 자본주의 주변 국가들과 평화공존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등하게 하려고 온힘을 다해 노력했다.(Szymanski, 1979)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경쟁국들에 비해 쏘련 경제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문제들이 발생했다. 힘들게 군사적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미국과 나토 국가들이 군사비에 쏟아 붓는 것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율의 국내총생산(GDP)을 군비에 소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나라를 경제적으로 따라잡기 위해 산업 확장에 할당할 수 있었던 자원은 그 대신 자기 방어에 돌려져야 했다. (Murphy, 2000).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쏘련은 국내총생산의 12-14%를 군대에 소비했다. (Szymanski, 1984; Allen, 2003) 레이건 행정부가 쏘련 경제가 뒤떨어지지 않도록 따라가기 위해 노력할 것을 예상하고 미국 군사비 지출을 대폭 인상했을 때, 그 수치는 이후 훨씬 더 올라갔다.

 

군사적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필요 때문에 쏘비에트 경제에 가해진 또 다른 제약은 군사적 부분에 연구개발 자원이 독점된다는 것이었다. (쏘련은) 군사적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혁신을 따라잡으려고 끊임없는 대결을 해야 했다. 미국에서 1945년에 처음으로 원자폭탄을 터트렸을 때, 쏘련은 미국의 무시무시한 과학성과를 따라잡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쏘련은 4년 뒤 미국을 따라잡게 되었다. 1952년에 미국에서 수소 폭탄이 도입되자 쏘련은 1년 뒤 독자적 수소폭탄을 터트리며 재빨리 따라잡았다. 미국의 첫 번째 잠수함발사핵미사일을 쏘련은 몇 년 뒤 따라잡았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제외한 주요 무기 중 어느 것도 쏘련에서 먼저 개발된 것이 없었다. 미국과 달리 쏘련은 이데올로기적 경쟁국을 둘러싸는 군사기지가 없었기에 핵탄두를 먼 거리로 운반할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목표는 자위권이었고, 쏘련은 언제나 무기체계에서 따라잡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냉전을 강화시킨 것이 쏘련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쏘련에게 냉전은 경제적 독약이었다. 미국에게 냉전은 쏘비에트 경제를 파괴하는 수단이었다.

 

자위권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쏘련 최고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군사 분야로 쏠리게 되었다(Sherman, 1969). 쏘비에트 소비재는 종종 저품질의 것으로 여겨졌지만, 쏘비에트 군사장비가 저품질이라고 여겨진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명백하다. 군대는 최고 두뇌와 장비를 위한 돈을 우선 지원 받았고, 지원이 끊어진 적도 없었다. 다음과 같이 부차적인 부분도 있다: 공적 소유와 계획경제는 언제나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오해에도 불구하고, 쏘비에트의 고품질 무기는 공적소유와 계획경제 속에서 생산되었다. 대부분의, 최고의 연구개발 자원이 군대로 쏠리게 되는 필요성은 다른 분야는 고통 받고, GDP성장은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석유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필요한 금속, 기계,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군사 분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석유생산을 증가하기 위해 노력하며 몸부림쳐야했다. 생산된 기계 장비의 절반, 연구개발 비용의 적어도 절반이 방위산업으로 유입되었다(Schweizer, 1994).

 

1975년 이후 쏘비에트 경제가 침체된 또 하나의 이유는 쏘련이 리카도의 덫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Allen, 2003). 쏘련은 산업화에서 필요로 하는 풍부한 모든 종류의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러한 천연자원들은 얻기가 쉬었고 저비용으로 발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쏘련의 산업화 초기시대에는 노천채굴장이 산업 중심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광물들이 지표면 가까이에 있어서 근처에 있는 공장의 짧은 거리로 옮길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과 이동에서의 비용은 최소로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표면 근처에 있던 광물들을 다 긁어모으게 되었고, 채굴장은 더 깊고 좁아지게 되었다. 깊이는 더 깊어졌고, 추출할 수 있는 광물의 양은 줄어들었으며, 새로운 광산을 더 열어야 했다. 하지만 산업 중심지로부터의 엄청난 거리가 있었고, 이는 천연원료를 공장으로 옮기는 데에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쏘련 석유산업은 리카도의 덫에 빠지게 되었다. 1970년대 초기에, 쏘련에서는 석유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한 해 동안 46억 달러를 써야했다. 석유 발굴이 점점 더 어려워짐에 따라, 쏘련은 더 깊게 파고, 더 단단한 바위들을 뚫어야 했다. 비용은 증가하여 1970년대 후반에는 60억 달러에 달했다. 1980년대 초반이 되어 비용은 일 년에 90억 달러로 치솟았다 (Schweizer, 1994). 리카도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쏘련은 보다 저렴한 수입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는 공급중단에 취약하도록 만들었다. 일시적인 동맹이나 긴장을 완화하도록 하는 이득이 있을 때를 빼고는 쏘련에 항상 적대적인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쏘련 경제를 굴복시키고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쏘련으로 가는 천연 자원을 봉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이 쏘련 경제를 불리하게 하기 위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매우 높은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자원을 자급자족하려는 정책을 시행하기보다 값싼 수입처를 찾아다니는 것은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쏘비에트 경제가 약화된 또 다른 이유는 쏘련이 동맹자들에게 지원하는 비용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자주국방을 강화하려는 하나의 방법은 공동의 적을 가진 같은 편들을 찾는 것이었고, 쏘련은 반동세력에 적대적인 국가와 운동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같은 편들과의 동맹을 확장해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쏘련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다양한 제3세계 국가들이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로부터 탈출하고 자유롭게 되려고 하는 국제적 해방운동에 물질적 후원자가 되었다. 1981년까지 쏘련과 동유럽 동맹국들은 75개 국가에 9,600명의 경제 조언자를 보냈고, 34개 국가에 16,000명의 군사적 조언자들이 있었으며, 모스크바가 결국 비용을 책임지는 39,000의 쿠바군대가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있었다.

 

동시에 쏘련은 72,000여 명의 제3세계 학생들이 쏘련과 동유럽 대학에 등록하는 비용을 지불했다(Miliband, 1989). 1980년대까지, 모스크바는 매년 440억 달러를 동맹국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Keeran and Kenny, 2004). 미국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연대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19808월부터 19818월까지 동안만 바르샤바에 45조 달러를 원조했다(Schweizer, 1994).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으로 매년마다 무려 30에서 40조 달러가 되는 재정이 소진되었다. , 동맹을 지속하기 위한 비용은 막대하게 증가했고, 천연자원을 얻기 위한 비용은 치솟았다. 또한 최고의 과학자와 기술자, 기계 장비들은 군대에서 독점되었으며, 군사적 비용으로 국가 수입을 소비하는 비율은 극심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쏘련이 곤경에 빠지게 된 대부분의 요인은 레이건 정부에서 쏘비에트 경제를 파괴하려 했었던 결정 때문이었다. 198310월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향후 레이건 독트린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 어떠한 것인지 밝혔다. “자유세계라는 목표는 더 이상 부정적으로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즉 쏘비에트 팽창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미 대통령은 선언하였다. 대신에, “자유세계라는 목표는 확고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위한 전략을 추진하는 데에 공세적이어야만 한다”(Roberts, 1999). 이는 데땅뜨에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더 공식적으로, 레이건 독트린은 미국국가안보결정지침(NSDD) 연속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NSDD-66에서는 쏘비에트 경제를 붕괴시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NSDD-75를 통해서는 미국이 쏘련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들이게끔 노력했다. 쏘비에트 경제는 압박 받았고, 다양한 수단 중 하나는 모스크바가 자위권에 사용하는 예산을 증가시키도록 유인하는 것이었다(Schweizer, 1994). 첨단기술 무기 경쟁이 핵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사적 분야에 더 많은 자원을 돌리도록 모스크바를 압박할 뿐만 아니라 쏘련의 많은 과학자, 기술자, 기계장비 등과 예산을 군사적 연구개발에 쏠리도록 하여 생산적인 투자를 억제하도록 했고 국민 경제의 발을 묶도록 하여 냉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목적은 쏘련이 더 강력한 적과 경쟁을 계속하도록 귀중한 생명력을 소모하도록압박하는 것이었고(Schweizer, 1994), 쏘련 적성국들은 발전 수준이 더 높은 상태로 출발했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의 부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쏘련과의 경쟁을 지속할 수 있는 더 거대한 경제와 더 많은 자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임기 첫 6년이 지나, 3,000개의 전투 비행기를 구매하고, 3,700개의 전략적 미사일을 구매하고, 10,000에 가까운 탱크를 구매하여 군대에 들어가는 비용이 두 배가 넘게 되었다(Schweizer, 1994). 이를 따라잡기 위해 쏘련에서의 군사적 비용이 초기에는 GDP12퍼센트에서 14퍼센트 정도 하다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국가 수입 대비 비율로 이미 미국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Silber, 1994). 국방예산은 여전이 증가했다. 5년 동안 군사적 지출은 45 퍼센트가 증가했고, 쏘비에트 경제 성장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1990년 까지 쏘비에트에서는 국가 GDP20퍼센트가 넘는 비용을 국방에 지출했다(Englund, 2011). 동시에, 모스크바는 군사적 연구개발에의 비용을 거의 두 배로 증가시켰다. 1984년 봄, 쏘비에트의 지도자 콘스탄틴 체르넨코(Konstantin Chernenko)복합적 국제 정세는 국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우리 자원의 거대한 부분을 사용하도록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라고 선언했다 (Schweizer, 1994).

 

한편 레이건 행정부는 체 게바라를 모방했었다. 아르헨티나 혁명은 하나 둘이 아닌 세 개나 되는 베트남 전쟁을 요구하여 미국 재정을 소모시켰다. 체 게바라의 방식을 반공주의로 바꾸면서, CIA 국장 빌 케이시는 하나, 둘이 아닌 여섯 개의 아프가니스탄을 불러들었다. 쏘비에트를 그들 자신의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뜨리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는 돈과 무장력이 쏟아 부어졌다. 폴란드에서는 재정, 정보, 병참 지원이 폴란드 연대운동에 쏟아져 폴란드 정부에 대한 모스크바의 지원이 증가시키도록 압박했다(Schweizer, 1994).

 

미국은 보다 더 파괴적인 무기 경쟁을 강요하는 것을 원하며 또한 워싱턴은 쏘비에트 경제가 완전히 바닥나기를 원한다고 쏘비에트 언론들은 호소했다(Izvestiya, 1986). 쏘비에트 외무부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미국의 군사적 증강은 쏘련의 물질적 자원을 바닥내어 모스크바를 항복시키려는 목적이 있다고 호소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로미코에 공감하며 쏘비에트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쏘련과의 최신식 값비싼 우주 무기 경쟁을 하여 쏘련이 경제적으로 지치기를 원하고 있다. 미국은 쏘련의 계획을 약화시키는 것을 원하며, 쏘비에트 지도력이 사회적 영역에서,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불평을 조장하려 하고 있다(Schweizer, 1994).”

 

 

항복

 

 

1980년대 중반까지, 쏘련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워싱턴과 모스크바 양측에게 분명한 것이었다. 이는 공적 소유와 계획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쏘비에트 체제의 이점을 인식하며 미국은 경제적인 혁신을 자극하기 위해 스스로 쏘련 계획경제를 모방하였다. 무엇보다 쏘련 경제는 분명 여전히 확장하고 있었고, 그것은 스탈린이 쏘련 경제를 공적 통제 하에 두도록 한 이래로 매년 평화적 국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냉전이 강화되는 국면에 직면하자,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 쏘련 경제 성장을 완전히 숨통을 죽이려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 군사력을 따라잡고 동시에 미국이 부추긴 반공산주의 반란의 공격에서 동맹자들을 지지해 주는 모스크바의 전망은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미국은 쏘련이 덫에 걸리도록 책략을 썼다. 만약 모스크바가 미국의 군사력 수준에 계속 맞춰가려 했다면 쏘련은 결국 파산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쏘련이 미국의 공격을 저지할 능력은 상실될 것이었다. 만약 군사적 수준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면, 쏘련은 더 이상 미국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떠한 방식으로 모스크바가 방향을 바꾼다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가 될 것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라고는 어쩔 수 없이 지쳐 소진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였다.

 

고르바초프는 그 필연적인 결과를 향해 곧바로 향해갈 것을 선택했다. 고르바초프의 외교 분야 고문이었던 아나톨리 체르나이예프(Anatoly Chernayaev)냉전을 끝내고 군사부분에서 대한 예산을 상당수 감축시키는 것은 고르바초프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우리는 군산복합체를 어떻게 해서는 제한시켜야만 했다.”고 회고한다(Schweizer, 1994). 국방 예산을 억제시키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고르바초프의 또 다른 조언자인 알렉산드르 요코프레프(Aleksandr Yokovlev) 또한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우리의 군사적 소비는 엄청났고, 그것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했었다.”라고 회상했다(Blum, 1995).

 

그 결과 고르바초프는 동맹자들에 대한 지원을 철수시켰고, 미국과의 협조를 약속하였다. 이는 항복이었다. 국제적 협력을 증진한다거나, 지구적 인간 가치를 향상한다는 달콤한 표현 뒤에 이러한 항복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미사여구들은 고르바초프가 두 손을 들어 항복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핵전쟁의 위협을 막아냈다, “핵무기 경쟁을 끝냈다, “통상적인 무장력을 감축시켰다, “미국과 쏘련이 개입된 수많은 지역적 분쟁들을해결했다, “적대적인 진영으로 분할된 유럽 대륙을 유럽인들의 공동의 안식처로 바꾸었다고 선언하면서 항복을 마치 인간성의 승리인 것처럼 묘사했다(Gorbachev, 2011). 국제적 핵전쟁 참화의 위협을 약화시키면서 고르바초프는 참으로 인간성의 승리를 성취해 냈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는 미국에 항복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고, 그리하여 미국이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배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에는 너무도 약해진 수많은 국가들을 포악하고 자유롭게 짓밟을 수 있도록 하였다.

 

스스로를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질적 사회민주주의라는 위치로 규정한(Hobsbawm, 1994) 고르바초프는 국내적 문제에서 쏘련을 서구 방식의 사회민주주의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Roberts, 1999). 그는 자신의 변화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써 쏘비에트 경제의 침체를 역전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언급했다(Gorbachev, 1988). 경제적 성장은 분명 둔화되었고, 성장을 계속 둔화시키도록 하는 위험은 분명 존재하여 자본주의 라이벌과 마주하고 있던 쏘련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해결책은 그들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들과 어울려라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시장의 힘으로 경제를 조절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해, 평화적 시기 끊임없는 성장의 과정을 충실하게 기록했던 계획 기구들은 해체되었다. 계획성을 포기하는 것이 고르바초프가 원했던 것처럼 경제 성장을 끌어올리기보다는 반대로 되었다. 경제는 폭락하여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로부터 쏘련을 계승한 국가는 몇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재치 있는 한 사람은 스탈린은 폐허의 쏘련을 발견하여 초강대국으로 남게 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초강대국 쏘련을 발견하여 폐허로 남게 만들었다.”라고 간단히 표현했다.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서구에서 널리 칭찬받고 있지만 러시아 인근에서의 그의 대중적 인기는 멈춰 있다. 20113월에 한 여론조사에서는 단지 러시아 인구 20 명 중에 한 명 정도만이 쏘련의 마지막 지도자를 존경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페레스트로이카라고 불렸던 시장 경제로 향해가는 고르바초프의 정책이 완전히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Applebaum, 2011).

 

 

우월한 체제

 

 

거의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쏘련에 관한 진지한 논의들은 편견과 왜곡, 오해들로 가득 차 있다. 수십 년 동안 쏘련과의 싸움에 갇혀 있던 워싱턴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적에 대한 오해를 의도적으로 조장했었다. 그 목표는 쏘련은 어둡고, 잔인하고, 억압적이며 경제적으로 활력이 없고 비효율적이라서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쏘련을 따라하거나 그 곳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곳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학자들, 언론인들, 정치인들, 국가 관료들 그리고 심지어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냉전의 낡은 선전들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쏘련 경제는 결코 특별히 잘 작동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쏘비에트 경제는 잘 작동했다는 것이다. 쏘비에트 경제는 공적으로 소유되고 계획된 그 기간 동안 아마 미국의 역동적인 경제보다도 더 빨리 성장했을 것이다.

 

쏘비에트 경제가 공적 소유 아래 놓이게 되었던 1928년의 쏘련 만큼이나 개발 수준이 낮은 다른 국가들의 경제보다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빨리 성장했다. 우주로 향한 미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만큼 쏘비에트 경제는 충분히 혁신적이었으며, 미국의 거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한 사건은 미국인들이 쏘련의 연구개발에 대한 공적 지원을 모방하도록 자극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보통 그러한 것처럼 수많은 실업자들을 유지하고 능력 이하로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공적소유와 계획이라는 쏘비에트 시스템은 인적 자원과 자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1928년에서 1989년까지 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매 년마다 쏘비에트 경제는 분명 확장되었고, 일자리와 거주지를 제공했으며, 광범위하면서도 비용이 들지 않는 공적 서비스를 모두에게 제공했다. 반면 자본주의 경제는 주기적으로 침체에 빠졌고 인간의 삶에 대한 파멸을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했어야 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공황에 빠지기 쉬운 세계 경제는 지난 시기 공황 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규모로 혼돈과 고통을 야기할 것이라고 불길한 경고를 한다(Shanker, 2012). 세계 경제에 대한 어두운 예측을 내놓은 유엔은 수년 동안 긴축과 실업의 순환과정으로 많은 나라를 궁지로 몰아가는 새로운 전 세계적인 경기후퇴를 경고한다(Gladstone, 20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우리는 쏘비에트 경제는 결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주기적 공황으로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 음식, 옷과 거처를 제공하는데 실패한 자본주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우월할 체제라고 들었다. 이와 반대로 명백히 자본주의는 우월한 체제가 아니고 반대로,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열등한 체제다 유일한 선택지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향상시킬 수 있고, 그렇게 해 왔다. 공적 소유와 계획에 대해 정략적으로 만들어진 오해의 장벽을 부셔야 할 때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장벽은 우리가 실업, 경기침체, 극단적인 빈부 격차, 그리고 재화와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99퍼센트의 밑바닥 사람들에게 현실적이고 가능한 미래로 가는 데에 부적합한 실패한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성장할 수 있는 대안적 모델을 보는 것을 가로막아 왔다. <>

   

--------------------------------------------------------------------------------------------------------

Allen, Robert C (2003). Farm to Factory: A Reinterpretation of the Soviet Industrial Revolu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Applebaum, Binyamin (2012). “A shrinking military budget may take neighbours with it”, The New York Times, January 6, 2012.

 

Block, Fred and Keller, Matthew R (2008). “Where do innovations come from? Transformations in the U.S. national innovation system, 1970-2006,” Technology and Innovation Foundation, July 2008. http://www.itif.org/files/Where_do_innovations_come_from.pdf

 

Blum, William (1995). Killing Hope: U.S. Military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 Common Courage Press, 1995.

 

Canadian Centre for Policy Alternatives (2011). “Hennessy’s Index”, February, 2011.

 

Englund, Will (2011). “Gorbachev in London: Credit, no cash”, The Washington Post, July 16, 2011.

 

Gladstone, Rick (2012). “U.N. presents grim prognosis on the world economy,” The New York Times, December 18, 2012.

 

Gorbachev, Mikhail (1988). Perestroika: New Thinking for Our Country and the World, Harper & Row.

 

Gorbachev, Mikhail (2011). “Is the world really safer without the Soviet Union?” The Nation, December 21, 2011.

 

Hobsbawm, Eric (1994). Age of Extremes: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 Abacus, 1994.

 

Izvestiya (1986). “Chance missed, search continues”, October 17, 1986, cited in Schweizer, 1994.

 

Keeran, Roger and Kenny, Thomas (2004). Socialism Betrayed: Behi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2004.

 

Kotz, David M (2000). “Socialism and Capitalism: Lessons from the Demise of State Socialism in the Soviet Union and China,” in Socialism and Radical Political Economy: Essays in Honor of Howard Sherman, edited by Robert Pollin, Cheltenham and Northampton: Edward Elgar, 2000, 300-317.

 

Kotz, David M (2003). “Socialism and Global Neoliberal Capitalism”, Paper written for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The Works of Karl Marx and Challenges for the XXI Century, Havana, Cuba, May 5-8, 2003.

 

Kotz, David M (2008). “What Economic Structure for Socialism?” Paper written for the Fourth International Conference “Karl Marx and the Challenges of the XXI Century, Havana, May 5-8, 2008.

 

Kotz, David M (2011). “The Demise of the Soviet Union and the International Socialist Movement Today”. Paper written for the International Symposium on the 20th Anniversary of the Former Soviet Union and its Impact, Beijing, April 23, 2011.

 

Kotz, David with Fred Weir (1997). Revolution From Above: The Demise of the Soviet System, Routledge, 1997.

 

Leffler, Melvyn P (1994). The Specter of Communism: The United States and the Origins of the Cold War, 1917-1953, Hill and Wang, 1994.

 

Lerouge, Herwig (2010). “How 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Soviet Union contributed to the labour movement in Western Europe, and more particularly in Belgium”, Belgium Works Party, May 05, 2010.

 

Mazzucato, Mariana (2011). The Entrepreneurial State, Demos, 2011 http://www.demos.co.uk/files/Entrepreneurial_State_-_web.pdf?1310116014

 

Miliband, Ralph (1989). Divided Societies: Class Struggle in Contemporary Capit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Milne, Seumas (2012). “Budget 2012: George Osborne is stuck in a failed economic model, circa 1979,” The Guardian (UK), March 20, 2012.

 

Murphy, Austin (2000). The Triumph of Evil: The Realities of the USA’s Cold War Victory,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arenti, Michael, (1997). Blackshirts & Reds: Rational Fascism and the Overthrow of Communism, City Light Books, 1997.

 

Roberts, Geoffrey (1999). The Soviet Union in World Politics: Coexistence, Revolution and Cold War, 1945-1991, Routledge, 1999.

 

Schweizer, Peter (1994). Victory: The Reagan Administration’s Secret Strategy that Hastene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The Atlantic Monthly Press, New York, 1994.

 

Shanker, Thom (2012). “Study predicts future for U.S. as No. 2 economy, but energy independent”, The New York Times, December 10, 2012

 

Sherman, Howard J (1969). The Soviet Economy, Little, Brown and Company, 1969.

 

Silber, Irwin (1994). Socialism: What Went Wrong? An Inquiry into the Theoretical and Historical Sources of the Socialist Crisis, Pluto Press, 1994

 

Stalin, J.V., Works,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1954, vol. 9, pp. 28-29. Report delivered at the 7th enlarged Plenum, December, 1926.

 

Szymanski, Albert (1979). Is the Red Flag Flying?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Soviet Union Today, Zed Press, London, 1979.

 

Szymanski, Albert (1984). Human Rights in the Soviet Union, Zed Books Ltd, London, 1984.

 

Walker, Marcus and Kakaounaki, Marianna (2012). “Struggles mount for Greeks as economy faces winter,” The Wall Street Journal, December 18,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