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After the Fall :20 Years Later In The Former Soviet States)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9. 16:42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

(After the Fall :20 Years Later In The Former Soviet States)

 

 

 

<노동자정치신문>[89(통합 101)-93(통합 105), 201210, 11, 12, 20132, 2]

 

출처: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의 정기간행물 <공산주의자(THE communist)> 2012년 겨울호 http://www.plp.org


편집자 주: 이 글은 미국 진보노동당(PLP)에서 쏘련 및 동유럽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이후 20년 동안의 인민들의 삶이 얼마나 붕괴되었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우리는 이 글을  번역해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것이다.


2009년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일은 유럽과 미국 자본가들의 자축이라는 향연의 시작으로 기념되었다. 자본가들에게 쏘비에트 연합의 붕괴는 “역사의 종말1)”인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승리2)로 새겨졌다. 뉴욕타임즈는 “공산주의 체계의 공허함이 폭로되었다.”고 선언했다. “권력과 정치적 계산”은 “자유라고 불리는 한결같은 열망에 의해 압도3)”당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성대한 축하 행사가 진행되었다. 거대한 도미노가 한 줄로 설치되었고, 전직 폴란드 대통령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첫 번째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동안, 미국 밴드 본 조비는 “우리는 복종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4)라는 노래를 불렀다.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쏘련 붕괴는 엄청난 후퇴로 기록된다. 노동자들이 한탄해하는 동안 서구 자본가들은 스스로를 축하였다. 동독의 한 금속 노동자는 “나에게 미래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확실한 것이라고는 공산주의 시절에 내가 더 잘 살았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붕괴 직후, 모스크바 병원의 한 의사는 “2년 전과 삶이 달라졌다 - 나는 한 인간이었다.”라고 했고, 새로운 “자유”가 감사한지 그에게 물어보자 그는 “무엇을 위한 자유? 포르노 잡지를 살 자유?”라고 답했다. 심지어 열렬한 반공주의 학자인 앙겔라 스텐트(Angela Stent)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의 상황이 공산주의 때보다 악화되었다”라고 인정해야 했다.5)

진보노동당(The Progressive Labor Party)은 쏘련(그리고 공산주의 중국)이 자본주의로 복귀할 운명에 처하도록 만든 정치적 약점에 대해 오랫동안 인식해 왔다.6) 하지만 쏘련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성과들은 그 패배를 비통한 것으로 만들었다. 맨 처음 노동자 국가의 창조는 모든 사회의 정치, 경제적 기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선구자들이 그러하듯, 쏘련 공산주의에는 많은 실수가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는다.7) 그러나 사람들은 쏘련의 거대한 성과, 여성권리의 신장, 쏘련 내외부에서의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사회안전망 형성, 세계 최고의 무상교육과 건강 보호 체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찌를 물리친 거대한 노력과 희생 때문에 쏘련을 기억한다.

쏘련이 붕괴되었을 때 그것은 1956년 쏘비에트 공산주의를 처음 공격했던 흐루쇼프 이래로 변화되어 왔던 경제, 사회적 관계의 질적인 변동을 나타냈다.8) 1980년대 쏘비에트 지도력은 완전히 부패했고, 수정주의적이었으며, 많은 관료들(특히 옐친이나 푸틴 같은)이 쏘비에트 이후 러시아 자본가 계급을 형성해 왔다는 점이 증명된다.

1930년대에 세워진 기관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분명히 타락한 상태에 있다. 1989년에 시작하여 1991년까지 진행된 쏘련의 붕괴는 구 쏘비에트 국가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했고 자본주의 자유 시장으로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했다.

이러한 질적 변화는 과거 쏘비에트 블록의 인민들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켰다. 기대 수명이 줄어들었고, 실업은 급상승했으며,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또한 대다수 노동자 계급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억압이 진행되었다. 쏘련 붕괴 20년 후, 한 때는 세계 최고의 노동자의 국가였던 쏘련에서의 자본주의의 영향을 평가해 여기 담아보았다.


쏘비에트 경제의 붕괴

서구 선전에서는 자본주의가 동유럽 시장을 자유롭게 해주며 침체되고 불필요한 관료적 쏘비에트 경제에 활력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에서는 쏘련의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가 결핍을 끝내 주고 영원한 번영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 수십 년 동안 CIA의 통제를 받는 ‘자유 유럽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들을 이용해 왔다. 진실은 완전히 그 반대에 있었다.

헝가리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개방된 처음 몇 달 동안 생필품의 가격은 30%가 치솟았고 순식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으로 추락했다. 생활수준에서의 이러한 극적인 추락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헝가리 공산당이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시장 개혁의 추구(이른바 “굴라쉬 공산주의(편집자 주-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며 헝가리에서 자유시장 요소를 도입하던 것을 말함)”)라는 경향의 한 부분이다. 1980년대의 시장 경제로의 변화 이후에 두 가지 일을 같이 하는 노동자는 70%가 증가했고,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8.5 시간에서 14.5 시간으로 뛰었다. 20%의 빈곤선 이하의 생계인구와 더불어 1990년대까지 증가한 것은 오직 가난한 사람의 수였다.9)


사진: 쏘비에트 노동자들의 새로운 광경, 모스크바에서 실업자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자유 시장 천국”으로 들어선 처음 2년 동안 러시아에서 실업자 수는 1백만에서 8-9백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1993년까지 숫자는 1500만 명에 달했다.10) 1996년도까지 러시아에서의 생활수준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쏘련에서 4:1 수준의 빈부격차는 13.5:1로 늘어났으며, 남성의 기대 수명은 57세 까지 줄어들었다. 농업의 사유화는 생산의 하락으로 이끌었고 1995년 러시아는 30년 만의 최악의 작황을 거두었다11). 러시아에서 버려진 어린이는 과거에 거의 없던 수준에서 1998년까지 2백만 이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정신과의사협회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증가하고 있는 집 없는 아이들 중 자살률은 놀랍게도 10%에 달한다!12) 모스크바 경제 분석 기구의 대표는 자본주의가 성숙해 온 6년 동안의 일반 민중들의 느낌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악화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안정성도 없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다.”13) 라고 정리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공산주의의 “패배”의 상징이 된 동독에서는 한 달에 25-50달러씩 하던 임대료가 솟구치자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1945년 이전 동독 지역의 여러 부동산을 소유했던 서독인들이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보상청구를 하여 수많은 동독의 가정이 위협 받았다. 제기된 청구의 상당수는 나찌이거나 나찌의 상속인이었다. 동독인들이 서독의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청구를 제기했을 때에는 청구 기간이 이미 지나버렸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결국 동독에 대해서는 2백2십만 건의 청구가 제기된 반면 서독에 대한 청구는 한 건도 수락되지 않았다.14)

사람들은 서독을 통해 여행하면서 엄청난 가난과 노숙 상태가 단지 쏘비에트의 선전 속에서 창작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점점 불안함을 느끼게 되었다.15) 2009년 독일의 스피겔(der spiegel) 주간지는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기 이전까지는 생존, 가난과 거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면서, 독일민주공화국(GDR-동독)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신에게 감사”한다고 했던 한 동독 노동자의 말을 인용했다.16)



서독의 합병 직후 동독의 사회학자들은 불안한 경향에 주목하였다. 자유 시장 천국에 들어서게 된 “즐거움”은 1989년 동독의 천 명 당 12명이던 조출생률(편집자 주-1년간의 출생수를 그해의 중앙인구 1,000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인구 출생률)을 1993년에는 천 명 당 5.1명으로 감소하도록 했다. 이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가장 큰 감소율이며, 2차 대전에서 패배 이후 나찌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에서 보다 높은 것이다. 한 연구자는 오직 “대파국의 시기, 절망적 궁핍과 사망이 만연한 시기”에나 볼 수 있는 출산 감소라고 말했다.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은 출산율의 감소라는 경향의 한 측면이다. 동독에서 낙태가 합법적이고 서독에 비해 덜 비난받았다는 사실은 갑작스런 낙태의 증가가 “자유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동독 여성들 사이에 냉소적 태도가 확대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7)

쏘련 붕괴 10년 후 과거 쏘비에트 국가들에서 빈곤층의 숫자는 천4백만 명에서 1억6천8백만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1990년에 비해 12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들 빈곤층중에 어린이들이 5천만을 차지한다. 2000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88%의 인구가 빈곤선 이하에 있었으며,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몰도바에서는 60에서 66%가 빈곤선 아래에 있었다.18)

동유럽 경제의 파괴는 단지 이행 기간 동안에 국가 상태에서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건설하고 소유한 쏘비에트 산업을 빼앗으려는 동구 자본가(대부분 과거 공산당의 당 관료들)와 제국주의 시장을 찾으려는 서구 자본가들의 의식적인 계획의 결과이다.

1990년에 통화연맹은 통화 교환비율을 4.5:1(동독의 4.5 마르크가 서독의 1 마르크와 같은 비율이다)에서 1:1로 바꾸어 하룻밤 만에 동독에서 450%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상품가격 상승은 동독에서 39%를 차지하던 수출 시장을 파괴했고, 그 결과 전반적인 경제 침체를 가져왔다. 동독에서 공적소유로 되어있던 사회기반 시설을 경영하기 위해 신탁통치가 시행되었다. 신탁통치는 재산을 가능한 싸고 빠르게 처분했고, 일부 공장은 1마르크 수준의 헐  값으로 팔았다. 동독의 모든 산업과 기반시설은 노동자 계급의 소유였으나 신탁통치에서의 떨이 판매로 그 중 85%가 서독의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었고, 10%는 잡다한 외국 자본의 소유, 5%는 동독의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었다.19)


사진: 리가 지역 기계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휴식(1976). 쏘비에트 블록에서의 작업장은 공동체와 사회의 중심이었다.

총 3400개의 공장, 520개의 거대 건설 회사, 465개 협동조합, 수 천 개의 소기업이 모두 사유화되었다.20) 동독 산업과의 경쟁에 지친 서독 자본가들은 그들이 구매했던 사업과 공장 문을 닫았다. 문을 닫지 않은 곳에서는 현저하게 노동자 수가 감소되었다. 예나 지방 차이스(Zeis) 광학렌즈 공장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20,000명의 노동자를 2,000명으로 줄였다. 720,000명의 농업 노동자(전체의 80%는 동독에 있다)가 집단농장이 붕괴 되고 사유화되면서 해고 되었다.20) 동독 산업에 대한 이러한 공격의 결과로, 세계 10번째로 큰 산업 국가였던 동독은 고작 40번째 규모의 산업 지역이 돼버렸다.21) 합병 15년 후 동독의 실업률은 18%로 남아있고 이는 서독의 두 배가 된다.22)

이와 비슷한 정책들이 동유럽 전체에 시행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보호주의의 잣대로 더 경쟁력 있는 상품(철강, 농산물, 섬유)은 봉쇄하고 서구 상품이 경쟁력 있는 이익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구 쏘비에트 연합에 대한 시장 문을 개방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그 첫 해에 개발 계획에 투자하기보다 화려한 사무실이나 가구에 더 많은 돈을 썼다. 이후 유럽부흥개발은행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동유럽에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동-서 합작 사업에만 투자를 하였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유럽의 Phare(폴란드-헝가리 경제구조지원)프로그램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서유럽 회사에만 재정 지원을 하였다. 서구 지원의 90%는 서방 기업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9년에는 동유럽에서 10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보던 것이 1993년에는 80억 달러의 적자로 뒤바뀌었다.23)

동유럽의 자본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적절하게 착취하는 법을 서구에서 배웠다. AFL-CIO(미국노동총연맹산별노조회의)의 자유무역조합기구(FTUI- CIA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구 쏘비에트 국가들에 여러 지부를 개설하였다. 그 곳에서 노동자 운동을 분쇄하는 적절한 방법들을 고용주에게 가르쳐 주었다. 파업참가자들은 전복되고, 해체되었고, 패배했으며 체포되었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했다. 1990년 미국문화정보국(USIA) 수장인 브루스 겔브(Bruce Gelb)는 구 쏘련에 제공하던 전문가 훈련에 대해 언급했다. “독사, 흡혈귀, 중개인- 쏘련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나라가 성공하기 위한 방법이다.”24)

서구 자본가들의 지원 속에서 러시아 고용주들은 쏘련 붕괴 직후 5년 동안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을 30%까지 줄일 수가 있었다. 1996년까지 미지불된 임금은 40조 루블(7.5조 달러. 편집자 주 : 현재 40조 루블이 환율로는 1조 2천억 달러 가량이라 원문에 나온 7.5조 달러 수치는 96년 환율이라 하더라도 정확하지 않은 수치일 수 있다.)가 넘었고 러시아의 모든 노동자들의 평균 한 달의 임금을 받지 못하는 양에 달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질(Zil) 공장에서 일하는 한 자동차 노동자는 “나는 노동자들을 돌봐주는 국가에서 성장했었다.”라며 한탄스러워했다. 한 섬유 노동자는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그들은 그 누구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존엄성을 빼앗아 갔다.”라고 말했다.25)

 

 

 

생활수준과 건강의 쇠퇴

본격적인 자본주의로의 복귀로 인한 영향은 쏘비에트 노동자들에게 즉각 체감될 수 있었다. 1995년까지, 구 쏘비에트 연합 전체에 걸친 기대 수명의 저하 때문에 연간 50만에서 100만 정도의 추가 사망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의학 잡지인 랜싯(the Lancet)에서는 “러시아에서의 사망률 및 기대 수명 규모의 극심한 변동은 현대 사회에서 유례없는 수준이다.”라고 했다. 또 다른 의학 잡지는 기대 수명의 급격한 하락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자본주의 자유 시장으로 갑작스럽게 변동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26)

1990년 뉴욕타임즈는 헝가리 10여 년의 시장 개혁은 남성 심장 질환의 경우 심각한 증가를 유발했다고 보도했다.27)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자살률이 50% 상승28)하기 까지는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2009년에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5개의 국가는 모두 과거 쏘비에트 국가에서 나왔다.(벨로루시, 리투아니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헝가리)29)

1996년에 러시아에서의 사망률은 출생률의 두 배에 달했다. 2009년, 러시아 정부는 지난 20년 간30) 1200만 명의 인구 감소를 발생시킨 이러한 경향을 저지하기 위한 과정에 돌입했다. 미국 외교 수뇌부인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조차도 러시아에의 인구 공황이 너무 심각해 쏘비에트 지역의 군사력조차 지탱하기 힘들 것이라는 내용의 연구를 2006년 발표했다.31) 인구 문제의 이러한 현실 때문에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은 특히 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점점 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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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베트남 또한 자본주의 하에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베트남에서 1980년대에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빈부격차가 급격히 벌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자본주의 지배 하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료보호와 교육 수준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대하고 새로운 노동착취의 열악한 현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도록 남겨둔 채, 부는 특권을 가진 소수에만 주어졌다.

사회학자 웽펭(Weng Feng)은 중국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국가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로 변화되었다고 했다. 여성이 주도적이나 경영상의 위치에서 퇴출당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는 특히 더 벌어졌다. 이주노동자, 특히 여성은 “중국의 산업 혁명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Weng Feng, Boundaries and Categ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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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사망률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1989년에서 1991년까지 동독의 35-44세 여성 사망률은 20%가 증가했고, 35-44세 남성은 30%가 증가했으며 10-14세의 여아 사망률은 놀랍게도 70%가 증가했다!33) 자본주의 경제에서 증가되는 스트레스는 이렇듯 놀랄만한 사망률 증가의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34)

구 쏘비에트 국가들에서 이렇게 건강 상황이 철저하게 악화된 또 한 요인으로 쏘비에트 건강보호체계의 붕괴를 들 수 있다. 과거 체제에서 쏘련의 모든 사람들은 무상 의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건강보호체계가 형성되고 있었던 1930년대에 쏘련을 방문했던 서구 의학 전문가는 쏘련의 노동자가 세계 최고 수준의 보편적 건강보호체계를 성취해낸 것이 얼마나 큰 성과인지에 대해 말했었다.35)

새 의료 체계는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8년에서 1965년까지 러시아 남성의 기대 수명은 40.4세에서 64세로 증가했고, 여성은 46.7세에서 72.1세로 증가했다. 1965년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자유 시장 개혁이 한창일 시기 전까지 기대 수명은 감소하지 않았다.36)

1995년에는 쏘비에트 의료기반의 발전 덕분으로 러시아의 1인당 의사 비율은 다른 어느 산업화된 국가보다 높았다.(259명 당 한명)37) 하지만 자본주의 의료 체계에서 부과되는 엄청난 비용 때문에 의사나 기타 전문 의료인을 찾아 가는 사람의 수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많은 병원이 문을 닫았고, 의료 체계의 수익성 증대를 위해 고의적으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쏘비에트 의료기반이 남긴 것들은 쇠퇴하게 되었다. 소아마비, 결핵, 콜레라, 디프테리아, 이질과 같이 이미 오래전에 근절되었던 질병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부활하였다.38)

구쏘비에트 국가들에서 노동자들은 ‘이윤을 위한 의료체계’와 관련된 이야기나 비극이 그저 당의 선전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붕괴 몇 년 후 바로 자본주의 의료의 잔인한 현실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1990년에 동독 사람들의 65%는 서독 의료 체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자본주의 의료 체계 5년이 지난 뒤 57% 사람들이 동독의 체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39)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사람들에게 훨씬 더 잔인한 미국 의료보험체계에 대한 경험은 충격이었다.

여타 공공서비스 또한 사라지게 되면서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난방연료 보조 폐지, 늘어나는 노숙인들 때문에 러시아에서 겨울에 얼어 죽는 사건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40) 공공기업 사유화는 사람들이 깨끗한 물이나 전기, 난방을 이용하는 것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극심한 예로, 그루지아의 전력 송전망을 소유한 미국 전력회사인 AES-Telasi사는 전기 요금을 강제로 납부토록 하기 위해 승객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착륙하려 하고 있는 트빌리시 공항의 전력을 차단하기까지 했다.41)


(사진: 모스크바 급식 지원 시설에 줄을 서 있는 어린이(1998). 자본주의에서 빈곤의 증가로 어린이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공공서비스의 폐지는 노동자의 건강에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영향을 주었다. 일부 사람들은 건조한 기후의 원인으로 여름동안 러시아를 집어삼켰던 광범위한 산불과 그로인한 지구온난화를 탓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 소식통은 건조 기후의 원인으로 쏘비에트 지역의 산림 파괴를 지적한다. 2007년 푸틴은 벌목을 통한 사적 이익 추구와 부패한 지방 관료들의 손에 러시아의 광대한 산림을 넘겨주는 ‘산림법’을 통과 시켰다. 과거 80,000명의 공원 산림 보호관과 11,000명의 항공 소방관을 통해 중앙집중화 되었던 산림 보호는 고작 2,000명의 감시 기능만으로 제한된 업무로 축소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환경보호론자들은 그 법안이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안이 통과된 이후, 산불 발생은 두 배로 증가했다.42)

화재 규모가 최고에 달했을 때, 하루에 추가로 350명이 더 죽었고 연기와 재로 인해 여름 동안 하루 사망자 수가 두 배가 되었다. 모스크바 보건부 장관 안드레이 셀트소프키(Andrei Seltsovky)는 모스크바의 시체 안치소가 거의 넘쳐나고 있다고 말했다.43)


치솟는 사망자 숫자에 당황하며, 화재로 인한 실제 사망자 수를 감추기 위해 모스크바 의사들이 열사병을 죽음의 원인으로 진단하지 않으려 한다고 정부당국은 말했다. 어느 한 단체에서는 혹서(酷暑)와 산불로 인한 실제 사망자 수가 15,000명에 달한다고 추정했다.44)

푸틴-메드베데프 정부가 화재와 2007년 산림법에 대해 거센 비난을 받자 푸틴의 대변인은  “이는 조금만 수정한다면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 될 것이다.”라며 실패한 시스템을 방어하였다. 하지만 화재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은 그렇게 관대할 수 없었다. 트베리(Tver) 지역의 한 노동자는 공산주의에서는 “마을마다 세 개의 연못이 있고 화재가 나면 벨이 울리는데 뭘까? 소방차이다.”라고 신랄하게 말했다.45)

구쏘련 지역에서 건강에 대한 최후의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적 관계가 노동자 계급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늘상 존재하는 스트레스와 소외감으로  심장병 발생이 증가했다. 약물 중독과 알콜 중독은 동유럽 전체에 걸쳐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러시아 군당국에서는 시장 천국으로 도입한 2년 동안 약물 남용이 80%까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46)

러시아에서의 알콜중독은 위험한 수준에 달했다. 쏘련 붕괴 이후 러시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용하는 데에 열을 올렸고, 쏘비에트 지역의 금주 프로그램을 없애고 값싼 술을 대거 시장에 도입했다. 국가의 관리 하에 술을 생산하여 보드카의 가격은 노동자의 임금보다 더 빨리 하락했다. 이렇게 값싼 술의 대거 유입은 보드카의 가격에 비교하여 임금이 세배로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94년까지 러시아 성인 남성은 일 년 평균 순수 알콜을 52.2리터를 소비하였으며 이는 단연코 세계 최고의 소비 수준이었다.47) 최근 러시아상공회의소(Russian Public Chamber)는 러시아에서 매년 알콜 중독으로 50만 명이 사망한다고 밝혔다.48) 알콜 중독과 자살은 러시아 남성의 기대 수명을 59세까지로 줄이도록 했고, 이를 두고 프라우다(Pravda)에서는 러시아 남성들이 “멸종된다”고 표현했다.49)


(사진: “NO!" 쏘비에트의 알콜 중독 반대 포스터(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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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J 레이롤즈(Reynolds)사의 탈출구

서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담배 판매가 부진해진 1990년대에, 쏘련 붕괴는 담배 산업의 생명줄처럼 보였다. 미국 자본은 즉시 새롭게 사유화된 동구권의 담배 공장을 모두 사들였고, 무차별적으로 광고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동유럽은 담배와 말보로맨의 사진으로 넘쳐났다.
RJ 레이롤즈 사의 회장은 동유럽의 새 시장에 대해 “우리는 이 사회의 사회적 복지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힘으로써 담배 산업을 이용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결과 구쏘비에트 국가들에서 흡연자의 수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종양학 회보(Annals of oncology)'라는 의학지에서는 이미 암발생률이 상당히 증가했으며 이 숫자는 시간이 지나며 늘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 워싱턴 포스트, “In Ex-Soviet Markets, U.S. Brands Took on Role of Capitalist Liberator,” 11/19/96
-월스트리트저널, “Philip Morris Readies Aggressive Global Push,” 1/29/08.
-“Cancer Mortality Up, Life Expectancy Down in Eastern Europe,” Annals of oncology, 2000, p 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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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공격과 여성의 권리의 후퇴

영국 의사인 아서 뉴스홀름 경이 1930년대에 쏘련을 방문했을 때, 쏘비에트 노동자들의 삶에서 ‘성별 차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공장이나 광산 노동과 같은 ‘남성의 일’에서 여성이 일을 하고 있다고 적었다. 쏘비에트 병원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남성 의사보다 더 많은 여성 의사를 보았다.50)

1930년대에 쏘련을 자주 방문했던 미국의 언론가 안나 루이스 스트롱(Anna Louise Strong)은 “혁명은 여성에게 법적, 정치적 평등을 주었다.”라며 또한 수백 년 동안 자행된 배우자 학대나 심지어 배우자 살해는 이제 공산주의 사상으로 해방된 여성에 의해 파괴되고 근절되었다고 말했다.51)

비록 쏘련에서 결코 성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 세계에 남아있던 것과는 비할 수 없이 거대한 성평등의 전진을 이루었다.

러시아 혁명의 승리는 전 세계 여성들의 거대한 승리이며 마찬가지로 쏘련의 붕괴는 중대한 패배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 처음 몇 년 동안 여성 실업률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헝가리에서 1988년도에 0.4% 이던 것이 1993년도에는 12.5%로 증가했다. 폴란드에서는 0.6%에서 12.5%로 뛰었다.52) 러시아에서는 1996년까지 실업의 80%를 여성이 차지했다. 그들은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 일이나 낮은 기술의 일에 고용되었고 어느 회사에서나 가장 먼저 해고되고 가장 늦게 고용되었다.53)

쏘련에서 여성에게 주어졌던 유급 임신출산 휴가, 남성과 동등한 승진과 임금, 특별 훈련 기회, 작업장에 특별한 안전장치와 같은 모든 권리는 박탈되었다. 여성노동자는 직장에서 무수한 성희롱을 당하게 되었다.54) 한 폴란드 여성은 여성에게 경제적 종말은 더 먼저 왔으며 이제 취업하기 위해서는 “젊고, 아이가 없어야 하고, 가슴이 커야 한다”며 통탄했다.55)


(사진: 러시아 토글리아티(Togliatti) 지역의 VAZ 공장의 노동자들(1976). 쏘련의 가장 큰 자동차 공장이며, 111,000여 명의 노동자 중 약 절반이 여성이었다.)

최근 미국무부 전문(電文)에서도 쏘련 붕괴의 결과로 여성의 권리가 쇠퇴했다고 언급했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사회적 압박으로 많은 여성들이 권리를 지키기 보다는 생존에 집중해야 하는 위치로 내몰리고 있다.” 라고 전문에서 언급했고,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자유는 여성이 일터에서의 성차별에 대해 저항하는데 의지할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고 계속해서 언급했다. 해고 및 심지어 신체적 학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여성들은 저항하기가 힘들었다. 2007년의 설문조사에서 100%의 여성 응답자가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구인광고에서는 언제나 나이와 성별을 따진다. 여성언론인연합(Association of Women Journalists)의 한 여성 책임자는 “구직활동이 마치 미인선발대회와 같다”라고 러시아에 있는 미대사관 직원들에게 말했다.56)


(사진: 1926년 쏘비에트 포스터. “여성 당신은 자유다- 이제 사회주의를 방어하라!”)

동독 사람들의 88%는 자본주의 이후 5년 동안 생활에 비해 과거 동독의 여성 조건이 훨씬 나았다고 대답했다.57) 동독의 한 여성은 “여성들이 빼앗긴 것은 단지 보육시설과 수입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삶, 인간관계, 일터로 집중되어 있는 공동체적 연대감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대부분의 동독 여성들이 “당면한 고립감과 최근 강화되어 온 남성에 대한 의존성에 대해 심각하게 불안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58)

자본주의와 함께하는, 자본주의의 한 부분인 성차별은 동유럽 여성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공산주의 동독에서 외설물과 성매매는 “강력하게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장벽이 붕괴된 직후, “성적 자유”를 위한 성산업이 동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성매매 집단이 서독에서 유입되었고, 쏘비에트 산업이 붕괴되는 동시에 포르노 가게가 온 나라에 생겨났다. 여성이 대상화 되지 않고 인간으로서 대접받던, 동독 체제 하에서 연애생활이 훨씬 나았다고 말하는 동독의 여성들에게 이러한 모든 “자유”가 가져다주는 것은 거의 없었다.59)

서구의 “성적 해방”은 또한 여성이 피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또다시 낙태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낙태는 쏘비에트 체제에서 여성이 가진 하나의 중요한 권리였다. 여성이 전통적인 가정주부로서의 역할로 되돌아 와야 했기에 여성이 이혼 하는 것 또한 훨씬 어렵게 되었다.60)

여성의 실업은 하늘로 치솟았고, 성차별적 착취는 일상화되었고 불법적인 성매매가 활성화되었다. 구쏘비에트 진영 전역에서 수만 명의 여성이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받았다. 한 러시아 여성은 뉴욕타임즈를 통해 “내가 만약 간호사로 일할 수 있고 깔끔하게 돈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성매매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어 달라.”라며 경제적 원인 때문에 성매매가 활성화 된다고 강조했다. 61) 러시아는 이제 불법 성매매를 위한 여성 밀매의 중심지가 되었다.62) 불행하게도 동유럽에서 성매매의 희생이 되는 것은 단지 여성만이 아니다. 1996년, 뉴스위크지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는 이제 소아성애자들의 방문을 위해 어린이들이 집결하는 중심지로, 방콕과 마닐라의 경쟁지가 되었다.”63)라고 보도했다.

자본주의에서 성차별의 부활로 인해 여성 폭력이 끔찍하게 증가했다. 쏘련 붕괴 5년 뒤, 러시아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11,000 건 정도로 치솟았다. 그리고 이 수치는 문제를 상당히 줄여서 말한 것으로 단지 5-10%의 여성만이 폭력을 당했다고 집계되는 것이다.(이는 실제로는 아마 220,000 건 정도에 달하는 것을 의미한다!)64) 러시아에서만 매년 살해되는(주로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해) 여성은 자본주의 하 처음 3년 동안 5,300명 정도에서 15,000 명 정도로 늘어났다.65) 모스크바의 여성은 자본주의에서 삶이 어떻게 변했냐고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이것은 삶이 아니다. 단지 생존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66)

 

빈민굴에서 기어 나와 정부로까지 확산되는 인종주의자들

쏘련 시기에 모스크바시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온 수천 명의 학생들을 지원하곤 했다. 당시에 그들은 환대받는 손님처럼 대접을 받았지만, 지금 그들은 인종주의자들의 일상적인 괴롭힘과 공격으로 고통 받고 있다. 한 학생은, “지하철에서조차도 겁이 난다. 나는 더 이상 외출할 수조차도 없다. 러시아는 우리 같은 흑인들에게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67)고 말했다. 구 쏘련에서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인종주의자들의 폭력이 충격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은 인종주의가 노동자계급에 대하여 전체 자본가들이 사용하는 필수적인 무기라는 진보노동당 정치노선(PL line)을 입증한다.68)

2002년 국제사면위원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의 소수 민족 주민이 인종주의 공격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비단 ‘스킨헤드족’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공무원들한테도 거의 똑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경찰과 법률집행 공무원들은 일상적으로 인종주의 가해자가 되어 소수민족을 괴롭히고 협박을 가하며 대개 인종주의 공격에 무관심하다.

한 예로, 에티오피아 난민인 아데페르 데쑤씨와 아내가 2001년에 쇠사슬로 무장한 인종주의자들에게 폭행을 당했을 때 병원 보고서는 그들이 입은 상해가 “추락”으로 생겼다고 기록했고 경찰은 그 피의자에 대한 설명을 허위로 보고함으로써 수사방향에 혼선을 가져왔다. 러시아에서 저명인사가 하는 인종주의적 발언은 논평 없이 용인되어 왔고 반(反)유대인 출판물은 러시아인들이 짜르 치하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모스크바 거리에서 다시 한 번 공공연하게 팔렸다.69)

실제 숫자를 모호하게 하기 위한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7년 첫 6개월 동안에만 47명의 사람들이 300명의 인종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살해당했다. 쏘련에서 전례가 없던 스킨헤드족들은, 러시아 자본주의에서 70,000명가량으로 추정된다.70)

1980년대에 폴란드 연대운동(자유노조 운동 -편집자)의 성장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쏘련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공격과 궁극적으로 쏘비에트 체제를 자본주의로 복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대노조운동은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패배로 조직의 명성을 얻어 서구 정치꾼과 지식인들의 애정을 받았다. 실제로 연대노조운동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의 잔존물이었고 오늘날까지 반(反)유대주의에 깊이 스며든 흔적이 남아 있다.

1981년에 연대노조운동이 형성됐을 때 그것은 오랜 반유대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KPN과 ROPICO71) 같은 단체로 구성되어 있었다.72) 다수 연대노조운동의 초기 구성원들은 1926년부터 1936년까지 폴란드를 지배했던 파시스트 지도자 요셉 필수드스키(Josef Pilsudski)의 지지자였고 그중 많은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서 운영했던 파시스트 친위조직이자 반공산주의 폴란드 내국군에 가담했다. 1942년에 바르샤바 유대인 거리(ghetto)에서 유대인들이 트레블링카(Treblinka) 집단 처형장으로 이송에 처해졌을 때 폴란드 내국군은 폴란드인들이 “유대인 새끼”와 “대머리 베냐민”(베냐민은 야곱의 막내다. 베냐민족은 고대 유대인의 한 부족으로 대머리 베냐민은 유대인들을 비하하는 욕설이다. -편집자 주)들을 구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속보를 발행했다. 그들은 유대인 거리를 쓸어버리는 것이 공산주의를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73)

1981년 11월 11일, 연대노조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폴란드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을 위해 명명했던 레닌조선소를 “필수드스키 조선소”로 명칭을 바꾸고 정문 위에 마샬 필수드스키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74) 필수드스키 통치 하에서 유대인 대학살은 폴란드에서 유대인에 반대하는 운동을 개시했고 1934년에 요셉 괴벨스가 방문한 뒤에 필수드스키는 유대인과 노동운동 지도자를 가두기 위해 폴란드에서 정치범 수용소를 설립했다. 1981년 그날 연대운동은 파시스트 필수드스키와 그가 상징하는 모든 것과 “연대”를 과시하고 싶어 했다.75) 폴란드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에 연대운동은 파시스트 필수드스키를 국민적 영웅이자 새로운 자본주의 폴란드의 파시스트 국부로 추앙했다.76)

연대노조운동은 그 시작 때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유대인의 첩자라고 부르며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연관 짓는 나찌의 강령을 지지했다. 1981년 여름 회의 때, 연대노조운동 내에 있는 유대인 인물들을 공격하는 전단지가 배포되었다. 회의 시간 동안 연대노조 내 유대인의 역할과 영향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77) 1981년 10월 연대노조의 저명한 지도자인 마리안 유르치크(Marian Jurczyk)는 공산주의 지도력의 4분의 3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 다음달, 또 다른 연대노조 관계자는 라디오를 통해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러시아인이거나 러시아 출신의 이름을 바꾼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이다.”라고 말했다.78)

반유대주의는 폴란드 공산당이 붕괴된 후에도 연대노조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남아있었다. 연대노조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와 타데우스 마조비에츠키(Tadeusz Mazowiecki)가 1990년 폴란드 선거에서 서로 맞붙었을 때 바웬사 선거운동캠프에서는 마조비에츠키가 비밀 유대인이었다는 루머를 퍼트렸다. 선거 운동기간 동안 바웬사는 정치권 내에 폴란드를 전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계속 주장했다. 연대노조운동의 견실한 옹호자인 뉴욕타임즈는 바웬사의 역겨운 인종주의를 합리화하고 변명해주면서 “최근 비밀 유대인들에 관한 논쟁에서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 초창기에 쏘련은 폴란드 비밀경찰 최고 관직을 포함한 핵심적 위치에 유대인을 신임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름을 바꾸었다.”라고 했다.79) 미국의 ‘기록물’에 의하면 결국 공산주의는 분명 비밀 유대인의 음모였다.

연대노조운동에서 아주 영향력 있는 신부이며, 연대노조운동이 설립된 성 브리지다 교회의 신부인 헨릭 얀콥스키(Henryk Jankowski)는 1995년 설교를 통해 유대인은 나찌주의와 공산주의에 책임이 있다며 “다윗의 별(육각의 모양의 유대인의 상징-편집자)은 스와스티카(swastika, 나찌의 상징卍, 만자모양-편집자)와 망치와 낫(공산주의의 상징-편집자)이 함축된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이러한 발언으로 비난을 받게 되자 그 신부는 “은행이나 금융 영역에서” 유대인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이끈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했다. 이후 그는 “모든 유대인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의 이익을 침범하는 일부를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얀콥스키 신부의 친구이며 교회의 신도인 바웬사는 신부의 노골적인 인종주의 발언에 대해 비판하기를 거부했으며 대신 침묵을 지켰다.80)

연대노조운동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그들이 폴란드 정치 체제에서 반유대주의를 고취하게 되자, 반유대주의 증오 범죄와 반달리즘(문화, 예술, 문명을 파괴하려는 경향이나 주의-편집자)이 폴란드에서 즉각 부활하였다. 한 폴란드 국회의원은 “공산주의의 붕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다. 그 속에서 모든 악마가 도망쳤는데 그들 중에는 반유대주의도 있었다.”81)라고 말했다. ‘인종주의와 불관용에 대항하는 유럽위원회(ECRI)’가 올해 발표한 연구에서는 폴란드 당국이 반유대주의를 근절하기 위해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상당수 반유대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유대주의는 특히 축구경기에서 폴란드 국가주의자들이 상대편 응원자를 “유대인(Jews)”이라고 비웃는 식으로 만연했고 험악하게 “가스실” 운운하며 죽음의 위협을 가했다.82)

자본주의의 승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인종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에 적극 협력하여 수백만의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끌고 가는 것을 도왔던 폴란드 국가주의자들의 수치스런 행동에 대해 폴란드 자본주의자들이 재조명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비엘스키가의 형제들이 바르샤바 게토에서 나찌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하여 숨겨주려 했던 노력을 그린 영화 ‘저항(Defiance)’이 2009년 개봉되었을 때 폴란드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역사를 고쳐쓴다”고 외치며 전국의 극장들은 영화를 금지했다. 새로운 폴란드에서 역사는 방향을 틀어왔고, 이제는 분명 폴란드인을 공격하고 희생시킨 것은 유대인이 되었다.83)

유대인 대학살의 기억을 다시 쓰고 궁극적으로 지워 없애려는 시도에 도움을 줬던 폴란드 역사학자 중의 한 사람은 마레크 얀 초다키빗츠(Marek Jan Chodakiewicz)이다. 그는 전쟁 이전과 전쟁 동안에 폴란드에서 반-유대인 대학살은 그들의 인종주의 때문이 아니라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폴란드 국가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 끝난 뒤에 폴란드로 귀환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살해는 그들이 쏘련과 협력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정의로 가장한 나찌에 협력했던 폴란드인들의 사형집행에 대해 애도를 표했다. 2005년 그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역사를 다시 쓰는 미국 자본주의의 오랜 숙원 과제를 증명하는 움직임인, 워싱턴 D.C에 있는 유대인 대량학살 기념물과 기념관 미국 감독위원회 멤버로 평생 안락하게 지냄으로써 비열한 행위에 대해 보상을 받았다.84)

전 나찌의 등용과 그들의 협력자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은 또한 서독에서 서방의 反공산주의의 중요한 보루였다. 2차 대전 종료 시기 얄타와 포츠담 회담 기간 동안 점령지역은 비(比)나찌화되고 군국주의가 없는 새로운 독일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독일에서 만들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합의했다. 여러 점령지로부터 파시스트 영향이 제거된 뒤, 독일은 선거를 치르고 새로운 정부 아래 재통일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이 애초 협정이었으나, 미국의 지도력 하에 있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즉각 회담 협정을 파기하려 했다.  


(사진: 폴란드, 비알리스토크에서 신나찌스에게 공격을 받는 反파시스트 시위대(2009).
인종주의 광신자들이 밀려났을 때 경찰이 들이닥쳤고 반파시스트 시위대들을 공격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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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나찌 짐승들에 대항해 유태인들을 방어한 쏘련

2차 세계대전 동안 쏘련은 반유대주의라는 인종주의 흐름과 적극 투쟁했고 나찌 집단 처형장의 공포로부터 수백만의 사람을 구했다. 쏘비에트 적군이 1939년 폴란드로 진입해 들어온 뒤 유대인, 집시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들에게 가해지던 “특별한 박해”는 모스크바 뒤 안전지역으로 이동됐다.

많은 유대인들이 나찌 최전선에서 먼 곳으로 이동되는 한편, 많은 이들은 적군에 결합하기를 선택했다. 2차 대전 동안 적군에서 유대인 장군들의 수를 합치면 적어도 100명이었다. 그 보다 낮은 지위의 유대인 적군 병사는 600,000명 이상으로 채워졌다. 적군이 마침내 베를린으로 진군해 들어갔을 때 그들은 수백만의 다인종, 다민족, 다국가, 혼성 군대로 히틀러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이런 일 모두는 서방국가가 적극적으로 히틀러 군대를 지원하는 동안에 일어났다. 서방국가는 유대인 피난민으로 가득 찬 배가 항구에 닿는 것을 거부하고, 포로들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철로에 폭탄 투하하는 것을 거부하고, 심지어 1945년까지 유대인 대학살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Anna Louise Strong, The Stalin Era
-Albert Axell, Russia’s Heroes
-Debra Kaufman, Gerald Herman, James Ross, and David Phillips, eds., From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to Holocaust Denial T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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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의지 때문에 나찌 체제는 서독에 대한 확고한 통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49년, 전시 협정의 직접적인 위반으로 미국과 영국은 서독 국가(연방공화국-FDR)를 만들었다. 서방국가들은 공산주의를 위한 전면적인 승리로 이끌게 될, 쏘련이 관할하게 되었던 재통일을 위한 동독인과 서독인 투표자를 포함한 어떠한 선거도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대로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었다.85)

미국과 유럽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뉘른베르크 재판(나찌 전범 재판 - 편집자)은 서독에서 나찌 지도력을 회복시키기를 원했던 나라들에게는 중대한 장애물을 의미했다. 재판 일 년쯤인, 1947년 경에 이미, 미국 정치가들은 재판이 공산주의의 지원을 받고 있고 독일 최고위 지도력을 제거하기 위한 “붉은 음모”였다고 주장했다. 1949년 4월에 미국은 전쟁 범죄 법정을 해체했고, 일 년 뒤 사면위원회는 나찌 전쟁 범죄 기결수들을 사면하기 위한 일을 착수했다. 그리고 1958년에 모든 전쟁 범죄자들은 감옥에서 석방되었다.86)

서독의 첫 번째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나찌 전쟁의 범죄자인 프리드리히 플릭(Friedrich Flick)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그는 선출되자 마자 792,176 명의 나찌 전범을 사면하도록 허락했다. 아데나워의 수석보좌관 한스 글롭케(Hans Globke)는 나찌당의 고위 관료였고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직접적인 역할을 했었다. 서독 외무부의 첫 번째 수장이던 허버트 블랑켄혼(Herbert Blankenhorn)은 과거 나찌의 선동가였고 나찌 친위대(SS)의 멤버였다. 아돌프 호이징거(Adolf Heusinger)는 나찌부대 작전부서 지휘관이었으며 히틀러의 전쟁 계획을 주관했다. 자연히 그는 서독에서 1957년에 불법적으로 형성된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87)

탁월한 나찌주의자들이 최고 위치를 차지하는 한편, 서독의 경찰 조직 뿐 아니라 외무부와 국방부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나찌들이 하급 지위를 채웠다. 1957년까지 우익 나찌 조직과 연관된 46개의 정치 단체, 30개의 신문, 68개의 잡지와 출판사, 120명의 언론인, 50개의 청소년 단체들이 존재했다.88) 이렇게 오래된 나찌들이 죽었을 때에도 전쟁을 통해 이윤을 올리며 나찌 독일을 후원하였던 티센크루프, IG파르벤, 지멘스, BMW 같은 기업들은 독일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으로 남아있었다.89)

반면 동독 정부는 파시즘에 맞서 싸웠던 이들로 구성되었으며 국가의 모든 문화는 반파시즘과 반인종주의 사상으로 세워졌다. 이는 놀라운 것도 없는 것이 서독(FDR)과 동독 합병할 당시 서독에서 스스로를 반유대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사람이 동독에 비해 아마도 4배가 되었기 때문이다.90)

동독 내 2차 세계 대전으로부터의 반파시즘의 보루가 무너지자 독일 정치는 급격히 우익적으로 이끌렸다. 2010년 10월 17일 기독교민주연합당(CDU) 당원에게 하는 연설에서 앙겔라 메르켈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독일의 “실험”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계속해서 메르켈은 비독일인, 특히 아랍과 무슬림인은 독일인과 “나란히 사는 법”을 모른다고 말했다.91) 독일 중앙은행의 틸로 자라친(Thilo Sarrazin)이 ‘독일이 자멸하고 있다’라는 책을 발간하며 이주민들이 독일의 지능지수(IQ)를 낮추고 있다고 주장했던 고작 2달 뒤에, 메르켈은 이러한 발언을 했다.92)

13%의 독일인은 국가를 “확고한 손으로” 지도할 “퓌러(fuehrer, 히틀러의 칭호-편집자)”를 환영한다는 내용으로 메르켈이 연설을 하기 며칠 전, 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3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은 나라가 “이주민들로 넘쳐난다”고 느끼고 있으며, 60%가 “이슬람인들의 관습을 제한”해야 한다했으며, 17%는 유대인들이 너무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93) 자라친(Sarrazin)은 그의 책을 광고하며 모든 유대인들은 독특한 유전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어서 유럽 백인들과는 분리되는 단일한 인종으로 나타난다며 반유대주의를 반복해 왔다.94)

 

천국에서 자행되는 경찰 탄압


쏘련에서 모든 인민들이 직면하는 “전체주의 압제”에 관한 많은 말들은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동유럽 인민들이 그들의 다양한 감옥 국가에서 탈출하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들어왔다. 현실은 구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출현은 경찰의 숫자와 함께 경찰이 노동자계급한테 가하는 폭력을 거대하게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1991년 뉴욕타임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경찰을 필요로 했던” 때인 공산주의 체제에서 보다 프라하에서 경찰력이 몇 배나 더 많이 증가했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사회 비평가인 마이클 패런티는 “자유시장 천국에서 보다 공산주의 경찰국가에서 더 적은 경찰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라고 말했다.95)

서방 자본주의는 설령 쏘련에 감옥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자본주의 동유럽 국가들이 스스로 정치범들을 공공연하게 즉각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정치범 ‘집단’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라트비아와 그루지야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것을 반대했던 정치적 반대자들, 주로 공산주의자들은, 체포되어 재판 없이 투옥됐다. 리투아니아에서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투옥되고 고문당했다.96)

러시아에서 억압의 국가 기구는 쏘비에트 기간 동안 보다, 결국 군대의 전체 부서가 수적으로 훨씬 더 많이 증가했다. “정권의 진짜 적은 결국 내부에 있다.” 1996년 경 새로운 러시아 자본가 계급이 만든 비밀 치안부대 병력은 800,000만 명 정도가 됐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새로운 체제에 반대한 것 때문에 잔인하고 극심하게 공격을 당했다.97)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살인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98)  

1997년에 국제사면회위원에서 발표한 한 보고서에서는 새 러시아에서 경찰 고문은 생활의 일상적인 일부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러시아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후 한 수감자는 “나는 신께 죽게 해달라고 수차례 빌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어쩐지 지옥조차도 인간이 가하는 고문 보다는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라고 국제사면위원회에 말했다. 새로운 체제의 경찰은 러시아인들 43%가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경찰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끔찍한 평판을 얻었다.99) 10년 뒤, 러시아인들의 67%가 경찰을 무서워한다고 말할 정도로 급격히 상태가 악화됐다.100)

독일민주공화국 하에서 동독 비밀경찰(Stasi)은 쏘비에트 전체주의를 경고 했던 서구 자본주의 모든 반공산주의자들에게 악귀가 되었다. 동독이 병합된 뒤, 서독 당국은 쉬타지 기록물들을 쏟아냈고 동독에 관한 모든 자료 일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계획은 아마도 동독의 신용을 손상시키기 위해 일련의 여론조작을 위한 공개재판(show trials)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쉬타지의 정치범 ‘집단’에 대한 박해와 그것의 ‘오랜 기록’은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서독의 사업 규모는 축소됐다. 300명 이상의 동독 정부 관계자들이 기소되었는데 이중 100명 이하가 최고 집행유예 정도를 받는 정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과 경호대원 몇몇은 베를린 장벽을 넘은 인민들을 사형시킨 것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다른 피고인들은 단지 ‘반역’죄라는 웃기는 혐의로 고발됐다.101)



(사진설명) 자본주의 언론매체는 지속적으로 쏘비에트 ‘경찰국가’ 대 자본주의 자유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구 쏘비에트 블록을 경험했던 대다수 인민들은 자본주의 아래서 경찰은 훨씬 더 공격적이고 잔인하다고 말한다. 독일 경찰은 2009년G8 정상회담에서 시위자들을 잔인하게 공격했다(위 사진). 러시아 경찰은 20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위자를 공격했다.(아래 사진)

그 재판은 통일조약과 독일 기본법(헌법) 103조의 직접적인 위반이다. 반역 혐의는 독일민주공화국(GDR -동독)이 미국이 얄타와 포츠담 협정과 독립적인 서독 국가를 형성했던 모든 조항을 위반했던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인 국가가 아니었다는 웃기는 주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반역혐의는 또한 동독이 서독을 제외하면 세계 모든 나라뿐만 아니라 유엔에 의해 인정받았던 사실을 무시했다.

그 재판은 나찌 지도부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 결과를 끔찍하게 뒤엎었던 것으로 재빠르게 넘어 갔다. 한스 하인보쓰와 일리나 하이만은 그들이 CIA 사보타주 및 다른 범죄 등 여러 행위를 주도한 것에 대해 독일에서 선고를 받게 되자, 히틀러 집단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서독 법정 판결로 곧 바로 구속됐다. 하이만에 대한 판결문을 낭독하면서 판사는 하이만이 유태인 변호사에게 훈련을 받았고 그 변호사가 공산주의자들을 변호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동독 정치국 검찰총장은 그 전쟁 범죄의 많은 경우 재판을 피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나찌 전쟁 범죄에 대한 변호사로서 이름을 떨쳤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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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비에트 경찰국가라는 거짓말

자본주의 교육 하에서 우리 모두는 거대한 쏘비에트 경찰국가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는 그 거짓말을 쫓아서 서독은 자본주의가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이오시프 스딸린이라는 악귀 치하 보다 더 공격적이고 억압적인 경찰국가가 결코 아니었다고 교육 받았다. 그러나 실제 경찰 숫자는 전적으로 다르다.

1939년 내무인민위원(쏘련 경찰) 수는 단지 366,000명에 불과했다. 이 수는 치안경찰, 수사경찰, 감옥 교도관, 준 경찰, 쏘련 국내 군대, 소방관, 다양한 감독관 (건물, 곡물, 기타 등등), 도로 순찰대, 사무관, 그리고 다른 공무원을 포함하는 숫자다.

가령 366,000명 전체가 경찰이라고 가정하면, 그리고 그 수는 크게 부풀려져 있는데, 이것은 536명 당 한 명이 경찰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는 많은 게 아니다. 대부분 도시들과 마을들은 거기에 상주하는 12명 이하의 내무인민위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많은 시골 마을들은 겨우 한 명이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대조적으로 미국은 2004년에 체포할 권한을 가진 883명의 연방, 주, 그리고 지방 경찰 공무원과 또는 332명 당 한 명의 경찰이 있었다. 심지어 스탈린 시대 극도로 과장된 인원보다도 훨씬 많다.

-Robert Thurston, Life and Terror in Stalin’s Russia
-Bureau of Justice Statistics, Census of State and Local
Law Enforcement Agencies, 2004; Census of Federal
Law Enforcement Officer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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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의 거짓말

서베를린에서 분단된 동베를린은 오랫동안 쏘비에트 “전체주의”의 증거로써 서방 자본주의에 의해 언급돼 왔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존재하던 28년 동안 136명이 장벽을 넘으려다 죽었다. 반면 2006년에만 432명에 달하는 입국자들이 아리조나에서만 205명을 포함해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다가 죽었다고 보도됐다.  

서구의 연구 결과를 통해, 이것은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죽은 사람들 수를 줄이려는 게 아닌 쏘비에트의 만행을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다. 그런데 28년 기간 동안 사망자 수는 고작 한 해 동안에만 미국-멕시코 국경에서 죽었던 사람들 수의 1/3도 안 된다!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에 격분하는 대신에 그 베를린 장벽을 훨씬 더 잔인한 것으로 그리려고 한다! 베를린 장벽에 대한 극심한 분노는 결코 인도주의에 대해서가 아니었고, 언제나 반공산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동독은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을 세웠는가? 첫 번째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서독 자본주의는 자기들이 스스로 교육 체계를 세우려고 하는 대신 독일민주공화국에 의해 동독에서 훈련됐던 기술자들을 고용하려고 결정했다.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여 서독은 동베를린에서 고급 두뇌를 유출해 갔다. 특히 동베를린에서는 서베를린에서 일하기 위해 매일 통근하는 60,000명이나 되는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들이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의 기술자들의 봉급은 독일민주공화국의 고도로 잘 보장된 주택, 무상의료 서비스, 높은 수준으로 보장된 재화 보조금, 기타 등등을 지속적으로 지급받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는 서독 기술자들의 임금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더 높다는 것을 주목하라.)

또 다른 문제는 서베를린 사람들이 국가 보조 물품, 특히 우수한 동독 카메라를 구입하기 위해 동베를린으로 들어 온 뒤 아주 높은 이윤으로 그 물건들을 팔기 위하여 서독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장벽을 세운 두 번째 가장 큰 이유는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쏟아져 들어왔던 서방 테러리스트들과 스파이들의 입국을 저지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서방 역사학자들은 “반파시스트 보호장벽”이라고 그 장벽에 이름을 붙인 독일민주공화국을 선전용 속임수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동독에서 서방 테러리즘의 역사는 다른 것을 생각나게끔 한다.

역사학자 윌리엄 블럼이 상세하게 묘사한 것처럼, 1948년에서 1961년 당시 서구 테러리스트들은 폭약, 방화, 단락회로 등을 사용하여 발전소, 조선소, 운하, 도크, 공공건물, 주유소, 공공 교통기관, 교량, 등등을 손상시키려 했다. 그들은 화물 열차를 탈선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공장 기계의 핵심을 손상시키려 산성물질을 이용했으며 공장 터빈에 모래를 넣어 정지시켰다. 타일 생산 공장에 불을 질렀고, 독을 이용해 협동농장의 7,000마리의 소들을 죽였고 동독지역 학교로 보낼 분유에 비누를 넣었다. 체포될 당시 그들은 독을 섞은 담배를 생산하려 했던 많은 양의 독극물과, 동유럽 세계 청소년 포럼의 참가자들을 공격하려 했던 폭약, 소이탄, 타이어 펑크 장치 그리고 그밖에 많은 것들을 소지하고 있었다.

-Deutsche Welle, “At Least 136 People Lost Lives at Berlin Wall, Study Shows,”8/8/08.
-Border Network for Human Rights, “2006 Report on Migrant Deaths at the U.S.-Mexico Border,”11/2006.
-NYT, “Berliners Live With Reality of Communists’Wall in City,”6/27/63.
-William Blum, “Another Cold War Myth: The Fall of the Berlin Wall”Counterpunch, 10/2/09.
-William Blum, Killing Hope.
-People’s Weekly World, “Another View of ‘Lives of Others,’”5/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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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 이후 동독 사람들은 서독경찰이 동독경찰보다 훨씬 혹독하다고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서독 관료주의가 요구하는 모든 세세한 것들(의료 보험, 연금, 세금 등)에 대한 서류들은 엄청난 간섭으로 여겨졌고 많은 동독인들은 동독 시대 보다 더 많이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비판하게 되었다.103)

통일 이후, 동독 정권 및 공산당과의 관계에 대해 사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묻는, 비상식적으로 사생활을 간섭하는 설문지들을 동독인들이 받게 되었다. 질문이 어떠한 용도로 사용될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설문의 내용들이 저명한 동독 지도자들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론에 유출되었다. 설문 내용은 고용주들에게는 널리 알려졌으나 대중들에게는 감춰져, 그것으로 채용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104) 한 동독 주민은 “이런 분위기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교훈은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05) 다른 동독 노동자는 슈피겔(Der Spiegel) 잡지에서 “적어도 나에게는, 지난날의 독재는 오늘의 독재보다 적은 것이다.”라고 말했다.106)


위선적 선거, 그리고 새로운 지배계급의 형성



1990년 쏘련은 해체되었고, 동독은 서독에 합병되었으며, 타락 상태에 빠진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부는 불가리아 공산당이 불가리아사회당(BSP)으로 바뀌게 된 데에 책임이 있다. 생각지도 못하게, 불가리아 사회당은 탈쏘비에트 불가리아에서의 첫 다당제 투표에서 승리했다. 서구 지도자들은 그들의 계획 속에서 불가리아 사회당의 승리를 쏘비에트 공산주의로 되돌아가는 거대한 후퇴라고 생각했다.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즉각 소피아(불가리아의 수도-역자 주)로 가서 상대 편 지도부들을 공공연히 만났고, 미국 민주주의재단(NED-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미국 지배계급이 만든 단체)은 2백만 달러라는 돈을 상대편 선거 캠프에 쏟아 부었다.

유럽의회 대표들이 선거가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자 미국은 “45년 동안의 전체주의 지배의 유산”으로 발생한 공포와 위협이 불가리아 투표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었다고 반응했다. BSP(불가리아 사회당)의 승리의 이유는 분명 정체불명의 억압이다. 실제 불가리아 사회당에는 백만 명이 넘는 당원이 있었으며, 통제 경제의 붕괴에 반대했고 시장개혁을 제한적으로 지지(수정주의자의 입장으로) 했기 때문에 47%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미국 민주주의재단(NED)은 가짜 학생그룹과 소피아에서 시위를 이끌며 불가리아사회당에 저항하는 다른 반대세력을 후원했다. 선거 후 한 달이 되지도 않아 믈라데노프(Mladenov)대통령은 사임하라는 압박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내세운 그룹들은 저항을 계속하며 책과 쏘비에트 관련 기록을 거리에서 불태웠고 급기야 불가리아사회당 본부를 불태웠다. 마침내 의회 특별 투표로 반대 세력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다. 반대세력이 미국의 후원을 받는 우익 대통령직을 맡게 된 후, 열혈단체인 자유의회재단(Free Congress Foundation-FCF)이 반대세력 내로 들어왔고, 공식적 조언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동유럽 자유의회재단의 지도자인 라즐로 파스토(Laszlo Pasztor)는 과거 나찌였다.

결국 불가리아사회당은 붕괴하게 되었고, 반대세력은 정권을 맡으려 했다. 이를 두고 미국 자본가들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승리라고 칭송했다. 3년 뒤 반공주의 신문 LA타임즈는 적의에 차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개혁된 지역의 생활수준은 훨씬 악화되었다. 개혁 지역의 불가리아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좋았던 지난날들’에 애정을 갖고 되돌아보게 되었다. 국가의 손이 개인의 자유를 분쇄했을 때, 그러나 사람들은 집, 직업, 충분한 음식을 보장 받았었다.107)

과거 쏘비에트 블록 전 지역에서 이와 비슷한 “민주주의”의 승리가 나타나고 있었다. 1991년 알바니아 다당제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당선되었다. 미국 민주주의 재단이 다시 개입했고, 반대 세력을 후원하여 결국 정부를 전복시켰다.108) 1996년 선거에서는 공산당의 참가를 금지하고, 투표자들을 위협하려 경찰을 동원하고, 거대한 선거부정을 통해 알바니아 세력자인 살리 바리샤와 그의 정당이 승리를 휩쓸었다. 서구에서는 이를 두고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또 다시 축하했다. 바리샤(Barisha)는 “우리의 위대한 친구인 유럽과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누릴 수 있었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다”라는 승리 선언에서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109)

폴란드에서는 라흐 바웬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가 1990년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할까봐 걱정하기 시작했다. 바웬사의 지지자들은 독재적인 지도자가 앞으로 권력을 약탈할 것을 정당화하려는 변명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폴란드인들이 바웬사를 완전히 지지하지 못하는 것은 폴란드인들에게 민주주의가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우리가 투표를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이들은 바웬사가 확실한 위임이 부족한 것은 폴란드인들이 공산주의 통치 하에서 형성된 “정치에 대한 혐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10) 바웬사가 당선되지 않은 모든 투표는 자동적으로 “비민주적”이라고 간주된다.

바웬사가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은 놀랄 것도 없다. 타임지는 1982년 후반 내내 바웬사가 “인민의 사람”처럼 살지 않았고, 고급 아파트에서 살면서 폴란드 노동자들의 평균 세배의 수입을 벌었다고 보도했다.

연대노조운동의 반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운동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게 대항하는 계급 전쟁이다. 타임지가 바웬사를 인터뷰할 때, 포드 회장 필립 콜드웰(Philip Caldwell), 웨스팅하우스사의 회장 로버트 터비, 제너널 다이내믹스 회장 데이비드 루이스, IMB의 전 회장 토마스 왓슨 등과 같은 많은 이들과 함께했다. 한 프랑스 언론은  그들이 바웬사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고 했다. “당신(폴란드인)은 토요일 휴무를 포기할 수 있는가? 폴란드 노동자들은 어떻게 일할지 알고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일반적인 질문이 계속 반복되었다. “만약 정부가 당신의 말을 듣는다면, 경제적 필요 때문에 노동자 운동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111)

러시아에서 옐친 정부는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일부 공산주의 관료들이 정권을 재탈환하려 했던 1991년 8월 무산된 쿠데타 당시, 옐친은 러시아 노동자들이 쿠데타를 진압해 주기를 호소했다. 당시 러시아인 대부분은 쿠데타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으면서 소극적이었다. 이를 본 한 주식 거래인은 옐친의 요청에 귀 기울이는 노동자가 거의 없었던 것에 놀랐었다. 옐친을 지지하며 거리로 나섰던 한 무리는 성장하고 있는 금융권 집단으로, 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주식 거래를 멈추었다. 이러한 여피족(부유한 엘리트)들은 식량이나 다른 물품들을 구입하는 등 의회를 방어하기 위해 지원해 주었다. 당시 참가했었던 아르티옴 예고로프라는 중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쿠데타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돈을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정치는 게임과 같았고, 우리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쿠데타가 끝난 뒤, 우리는 우리가 얻었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려 하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었다.”112)  

1993년 러시아 의회에서 옐친의 경제 개혁인 “충격요법”을 반대하자 옐친은 입법부를 회피하려했다. 그러자 의회는 옐친을 탄핵하려 했다. 러시아 헌법재판소가 의회에 동의를 하자 의회는 옐친에 대한 탄핵 절차를 계속할 수 있었고, 옐친은 의회를 해산했다. 의회가 스스로 해산하기를 거부하자 옐친은 탱크로 의회 건물을 포격하고 건물 층마다 군대를 투입하여 건물을 접수했다.

저항하는 의회를 지지하기 위해 모스크바 거리로 나온 수만 명의 사람들이 병력에 잔인하게 공격받았다. 결국 150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심각한 부상자들이 발생했다.113) 뉴욕타임즈는 옐친이 자행한 대담한 방어를 “헌법적 민주주의”라고 칭찬해 주었다.114)

1996년 선거 때가 되자 옐친은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미국으로부터 140억 달러의 무상 지원을 받아 힘을 얻은 옐친은 거대한 선거 부정 캠페인에 개입하기 시작했다.115) 옐친은 러시아 언론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이용해 광고 캠페인으로 맹공격을 가하며 반대파를 추방하려하기 시작했다. 옐친은 반공주의 연설로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쏘련의 붕괴에 대해 언급하며 옐친은 “구체제의 억압은 인텔리겐차(러시아에서 ‘자본가’를 의미하는 암호)를 파괴할 수 없었다.”116)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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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얼굴을 한 미 제국주의

1992년에 미국에서는 ‘자유지원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친 서구적 지도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정부 기구와 비영리 기구가 구 쏘비에트 국가들에 진입하는 경우 재정지원을 하는 법이다.

미국 민주주의 재단(NED), 미국 국제 개발처(USAID),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 및 지배계급의 대리인인 조지소로스의 ‘열린사회(Open Society)’와 같은 단체들이 1990년대에  동구권에 몰려들어왔다. 이러한 단체들은 미국을 지지하지 않으며 선출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반민주주의 반대 운동과 선거부정을 공개적으로 후원했다.

이러한 단체들은 인기도 없는 독재자들을 불가리아(1991), 알바니아(1991), 러시아(1996), 그루지야(2003), 우크라이나(2004) 그리고 카자흐스탄(2005) 등의 많은 국가에서 지지한 것과 선거조작에 책임이 있다.

미국민주주의재단(NED)의 공동 설립자 알렌 웨인슈타인(Allen Weinstein)은 “우리 민주주의 재단이 오늘날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은 25년 전에 CIA가 비밀스럽게 하던 일들이다.”라고 언급했다.

-Gerald Sussman, “‘민주주의 후원’의 거짓말,” 먼쓸리리뷰(Monthly Review), 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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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A new sight in the Soviet bloc, homelessness was considered by many to be a myth of communist propaganda. Unfortunately they were wrong. (Prague, 2010) 쏘비에트 블록에서 보이는 새로운 모습, 많은 이들은 노숙인이 공산주의의 선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틀렸다. (2010년 프라하)

엄청난 수준의 선거 조작을 했음에도 옐친은 공산당의 후보인 겐나디 주가노프(Gennady Zyuganov)에게 여전히 위험스럽게 패배할 상황에 있었다. 선거에 앞서, 투표를 걱정하던 옐친은 선거를 취소하고, 의회를 폐쇄하고, 승리할 것 같아 보이는 경우 공산당을 금지시키는 법령을 만들도록 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또 다른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이러한 선거 사기를 여전히 칭송했다.117)


2009년 당시 쏘비에트 지역에서 부활하는 공산주의 당들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을 우려하며 유럽 의회(Council of Europe)의 의회 위원회는 쏘련을 나찌즘에 연관시키려는 의도로 ‘전체주의 체제에서의 범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당들이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 여전히 합법적이고 활발하다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시우마스 밀네라는 언론인은 “역설적이게도 유럽에 공산주의 정권이 남아있지 않다는 상황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은 더욱더 거세질 것이다.”라고 글을 썼다. 한 스웨덴 의원은 “공산주의 사상에서의 평등이나 사회적 정의 같은 여러 요소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어떤 향수가 여전히 살아있다.”118)고 하며 그 때문에 반공주의 결의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결의안을 제안했다. 결국 평등과 사회적 정의와 같은 사상은 경제공황에 빠지고, 노동자를 분열하고 수동화하는 인종주의에 빠진 유럽, 최근의 경제 공황의 위기를 노동자 계급에게 전가하려고 완벽히 의도하고 있는 유럽에서 위험한 것이다.

 

주민 재교육



동독이 서독에 의해 합병된 뒤, 서독 당국은 독일민주공화국의 모든 공문서들, 장서, 그리고 완벽한 반공주의가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하는 “서구에서 인정하지 않는 생각”을 다루는 학교 교제를 없애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오토주어연구소(Otto Suhr Institute)는 폐쇄되었고 230,000여 권의 책을 보유했던 도서관은 경매로 사유 자본들에게 팔렸다. 경찰은 베를린 노동자 운동 역사 연구소에서의 중앙당 문서국을 급습하여 임시 폐쇄 했다. 또한 대안 서점이 서독 경찰에게 급습 당했고 ‘전복적’ 문건을 유포한다는 혐의로 기소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동독의 공공 도서관이나 공장 도서관에서 맑스 레닌주의와 관련된 도서, 동독의 역사와 관련된 도서들은 사라지게 되었고 책들은 결국 불타거나 파기되었다. 한 예로 당국은 새롭게 출판된 50,000권의 책들을 무더기로 묻어버렸다.119)

페트리카 브로드스키(Patricia Brodsky)라는 언론인은 동독의 문서 보관소들과 도서관을 파괴하는 것이 “독일 및 전 세계의 더 큰 방식 중 일부분이다”라고 했다.120) 그 목적은 쏘련의 역사를 다시 써서 자본주의 착취와 굴종에 대중들을 더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2009년 독일의 정치 과학자 클라우스 슈뢰더는 독일 교과 과정에서 반공산주의를 전면적으로 중심에 둘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20년 간의 재교육을 진행해 왔지만 ‘동독 지역 젊은이의 절반도 안 되는 이들이 동독을 독재로 묘사하고, 상당수가 슈타시를 보통의 정보기관이라고 믿고 있다’고 애석해했다.121)

합병 후 서독은 즉각 동독의 교육 체계를 무너뜨렸고 친자본주의 정치 이념을 고취시키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동독 교육은 서독에 비해 훨씬 앞서나갔고, 동독의 어린이들은 서독 학생들이 그들을 따라잡도록 기다리는 ‘잃어버린 학년’을 경험했다.122) 합병 이전에는 동독인의 11%만이 동독의 교육 체계가 서독에 비해 낫다고 생각했지만 5년 동안의 경험 후 그 비율은 64%로 치솟았다. 서구의 집중적인 반공산주의 학교 교육과 언론을 견디고 난 뒤에는 놀랍게도 97%의 동독인이 “동독에서의 생활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이를 말할 권리가 있다.”는 데에 동의했다. 123)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은 헌법적으로 보장되던 무상 중등교육이 폐지됨을 의미했다. 엄청난 수의 학교, 여름캠프, 청소년 클럽들이 사유화되고 해체되었다.124) 교육과 과학에 지원되던 국가 예산은 90%까지 축소되면서 교육체계는 붕괴되었다.125)


[모스크바의 한 여성이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뒤지고 있다.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흔한 광경으로 구 쏘련 지역의 노동자들은 노숙인과 포기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극장은 사유화되고 없어지거나 너무 비싸져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출판사들은 문을 닫게 되었다. 쏘련 공산주의 지역에서 전 세계 책의 60%를 발간했었지만 자본주의 5년이 지난 후 독자층은 제3세계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쏘련 시기 금지되었다고 서구에서 선동하던 서구 문학을 처음에는 사람들이 접해보려고 열광했었다. 하지만 주로 미스터리, 로맨스류의 ‘이류’ 쓰레기 소설이 범람하자 사람들은 쏘비에트의 출판 기구가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하기 시작했다. 126)


[폴란드 바르샤바의 문화-과학 궁전의 동상, 노동자의 손에 있는 책에 맑스, 엥겔스, 레닌이라 쓰여 있다. 스탈린의 이름은 흐루시초프 시기에 덧칠해 지워졌다.]

쏘비에트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없어졌었던 문맹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교사들은 목격하게 되었다. 이유는? 불행히도 교육에 대한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003년 당시 루마니아에는 7,616개의 유치원이 존재했었지만 2007년에는 그중 1,731개만이 남아있었다. 이에 대해 ‘세이브더칠드런’의 루마니아 사업진행자는 “교육 분야의 지나친 정치화”의 결과라고 말한다.127)

2006년 유럽회의(Council of Europe) 의원들은 교육에서 반공주의 캠페인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새로운 캠페인에는 새롭게 개정된 교제, 공식적인 반공산주의 기념일 행사, 쏘련을 음해한 이들에게 바쳐진 기념관들 또한 포함될 것이다.128) 미국의 역사학자 페니 본 에셴(Penny von Eschen)은 최근 강연 순회에서 이러한 기념관들의 설립이 마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동독인의 혐오감의 증거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기념관 선물 매장에서는 서구 언어(주로 영어나 독일어)로 된 물건들만 파는지를 질문하자 그녀는 기념관들이 사설 기금으로 건설되었고, 지역주민들이 접근하기 어렵도록 중심 거리에서 멀찌감치 세워졌으며 주로 서양 여행객들을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독의 반파시스트 기념관과 수용소 기념관들은 역사 다시쓰기를 위한 반공주의 개혁운동의 제물이 되었다. 수용소에서의 국제적 연대와 같은 내용이나 전쟁 범죄에 대한 재판, ‘독일 제3제국과 산업 지배자들 간의 잘 입증된 연관성’과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부헨발트 지역 기념관 건물의 한 동은 해체되었다. 이제 이 장소에는 전후 수용자들-나찌 협력자들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대학살 범죄와 관련된-을 위한 특별한 기념관들이 들어섰다.129)


[스탈린의 생일날 그루지야의 집회(2004)]

2010년 고리와 트키불리 지역(편집자 주 -그루지야의 도시) 행정 당국은 스탈린 동상을 철거하도록 했다. 미하일 사카쉬빌리(Mikheil Saakashvili) 대통령(미 제국주의의 대리인이다.130)) 정권은 ‘젊은 세대’가 동상의 철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대중의 지지가 있다는 주장과는 반대로 공무원들은 많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한밤중에 동상을 철거해야만 했다. 고리 지역 동상은 원래 파괴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집단적 반발을 두려워한 사카쉬빌리는 동상을 스탈린 기념관으로 보내도록 했다. 그 기념관은 고리 지방에서 스탈린에 헌정된 것으로 노동자들의 기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동상을 강탈한 것에 대해 한 고리 주민은 “어떻게 동상을 없애려 할 수 있는가?...스탈린은 위대한 개인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루지야 사람이다.” 사카쉬빌리 정권은 그루지야 내에 반러시아 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기념물들을 2008년 러시아와의 전쟁 기념물로 대체하려 했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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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을 공격하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가 나찌를 변호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미국 주도로, 서구 자본주의는 나찌 독일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기획은 인류애에 반대하는 파시즘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면죄하는 반면 쏘련을 공격하고 중상을 가하기 위하여 계획되었다.

1947년 미국은 전직 고위 나찌 장교들의 모여 동유럽 전선 역사를 쓰는 임무를 맡은 군사작전역사(독일)부를 설립했다. 이러한 나찌 잔학행위에 대한 고의적인 백색세탁(white-wash)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서방 자본주의 역사를 변호하는 기초가 되었다. 전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서방으로 도피했던 동유럽 출신 나찌 협력자들은 또한 쏘련을 공격했던 자신들 방식대로 전쟁 역사를 쓰도록 고취되었다. 1953년에는 우크라이나 나찌 협력자들 단체에서 ‘크렘린의 검은 행적’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널리 인용되고 사용되는데, 작가 중에는 트레블링카(Treblinka) 집단 처형장 감시원, 나찌 정예부대(SS)의 몇몇 성원들과 나찌 선전상이 포함되어 있다.

서독 대학 체계는 나찌 변호론자들을 위한 중심부가 되었다. 유명한 베를린 자유대학 명예교수인,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는 나찌즘과 유대인 대학살은 “‘볼셰비키 침략’”에 대응하는 “‘정상적인’”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행위라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그는 나찌의 쏘련 침공은 방어 전쟁이었고 집단 수용소에 유태인들을 수용한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 동조자들’”이었으므로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나찌 선전기구에서 했던 변명과 같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어떻게 발발했는지에 대해 많은 서구 자본주의 학교와 대학들에서 가르치는 기초가 된다.

나찌에 대한 쏘련의 승리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노력으로 많은 나찌의 잔학행위가 쏘련이 자행한 전쟁 범죄로 낙인 찍혀 왔다. 폴란드에서 카틴숲 대학살(Katyn Massacre)은 가장 유명한 예이다. 안나 씨엔씨알라(Anna Cienciala), 이네싸 라즈보로프스카이야(Inessa Iazhborovskaia), 그리고 발렌티나 파르사다노바(Valentina Parsadanova) 같은 현대 역사학자들은 고의적으로 조작한 증거를 가지고 이 사건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우선 믿을만한 증거가 무시됐는데, 그것들은 무덤들에서 발견된 독일제 탄피, 러시아 법의학자들의 실험들, 러시아 조사에 대한 미국 관찰자들의 증언, 다른 나찌 잔학행위와 방식의 유사성, 나찌 점령 동안 범죄 장소에 있었던 희생자들의 개인적 유품, 나찌가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고 그리고는 그것을 은폐하는지에 대해 묘사하는 나찌 정예부대(SS) 한 장교와 몇몇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의 증언들이다.  

더욱이 ‘진짜’ 증거는, 나찌 선전이, 고의적으로 왜곡했던 것이다. 괴벨스 선전 라디오 방송들은 순진하게 ‘독일 라디오’라고 불린다. 나찌 정예부대(SS)원, 게슈타포, 그리고 선전 각료들로 구성된 나찌 조사팀은 ‘독일 야전 조사관’이라고 불쾌하지 않게 불린다. 사실상 그들은 쏘련에는 모든 종류의 독을 퍼붓는 한편 나찌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 결과는 뉘른베르크 재판 동안 수집된 쏘비에트 조사와 증거는 명백한 ‘허위선전’이라고 즉각 다뤄지지 않거나 기각당하는 반면 나찌 선전은 ‘합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오늘날 카틴숲에 폴란드 방문자들은 폴란드에 대한 가공의 쏘비에트 잔학행위를 기념하는 새로운 유적을 만난다. 이 같은 역사 다시쓰기는 빈니차(Vinnytsia), 우크라이나와 다른 많은 곳에서도 일어난다. 서구 자본주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쏘련이 유대인 대학살에서 히틀러의 행위를 강요했다고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정 정도 유대인 대학살을 기획했다는 놀랄 만한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인기 있는 유행이 되고 있다. 쏘련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냉소적으로 만드는 고의적인 음모이다.  

-Ronald Smelser and Edward Davies,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
-Douglas Tottle, Fraud, Famine, and Fascism: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
-Ernst Piper, Forever in the Shadow of Hitler?: Original Documents of the Historikerstreit
-Anna Cienciala, “"The Katyn Syndrome,”" Russian Review, No. 65, January 2006.
-Yuri Mukhin, Katynsky Detective
-NYT, “"Soviet Blames Foes in Killing of Poles,”" 1/27/44; “"Katyn Graves Story Declared Grim Fraud,”" 6/29/45; “"Light on
the Katyn Murders,”" 6/30/45; “"Hitler Apologist Wins German Honor, and a Storm Breaks Out,”" 6/21/00.
-CHALLENGE, “"PBS Anti-Stalinism is Based on Nazi Lies,”" four part series, 1990.
-Edvins Snore, The Soviet Story (documentary),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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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에 대한 향수(Ostalgie)

‘Ostalgie’는 서독이 독일민주공화국(Ost는 독일에서 “‘동쪽’”이라는 말이다)의 멸망에 대해 동독에서 커지지는  괴로움을 준다는 말이다. 유럽 자본주의 도처에서 동유럽인들 사이에 쏘련에 대한 비탄과 근심의 향수(nostalgia)가 늘어나고 있다. 노르웨이 정치과학자인 요아킴 엑크만(Joakim Ekman)은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향수’의 잠재적 위험성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한다”라고 경고한다.132)

자본주의를 최고로 불안하게 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쏘련에서 경험이 자본주의에서 그들이 경험했던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001년 경 쏘련에서의 경험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던 사람의 수가 1991년 수준에 비해 불가리아 26%, 라트비아 15%, 헝가리 16%, 슬로바키아 17%, 슬로베니아 26%, 폴란드 27%, 루마니아에서는 29%까지 늘어났다. 이들 나라 전체의 인민 대다수는 쏘련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133) 독일민주공화국 하에서 삶이 더 좋았다고 말한 동독지역 사람들의 수는 1999년에 40%에서 10년 뒤에는 57%로 늘어나 동독에 대한 향수(ostalgie)가 단지 ‘일시적 유행’이라는 서독의 주장을 일축했다.134)  

2008년 갤럽 국제여론조사는 구 쏘련에서의 인민이 세계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사람들이었다고 결과를 냈다. 가장 불만족스러운 나라들 10개국 중 6개국은 구 쏘련 국가들이었다고 한다. 여론 조사원들은 동유럽에서 ‘민주주의’(자본주의를 위한 암호문)에 대한 환멸이 널리 퍼졌고, 또한 ‘엘리트들’(자본가 계급)에 대한 불신이 ‘비틀거린다’라고 언급했다.135)

불가리아에서는 주민 60% 이상이 쏘련에서 더 잘 살았다고 믿고 있다. 한 여성 노동자는 “우리는 휴일에 해변과 산으로 놀러 가곤 했고, 당시에는 많은 옷들, 신발들, 음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소득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음식에 소비하고 있다.”라며 ‘전제’국가 쏘련 하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회상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자본주의 이행에 대한 지지는 1991년 72%에서 2009년경에는 30%로 떨어졌다. 리투아니아에서의 지지는 4분의 3에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136) 폴란드 정부는, 쏘비에트 과거에 대해 커지는 향수를 우려해 2009년에 공산주의 상징을 표시하는 것을 불법화 했다.137)


[모스크바에서 노동절에 행진하는 소녀(2005)]

흐루시초프가 쏘련을 자본주의로 복귀하는 길을 닦기 위해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스탈린을 처음으로 공격하고 나서 55년이 지난 뒤에도, 러시아와 서방 자본주의는 여전히 노동자들 사이에 스탈린에 대한 계속적인 존경이 있다는 것에 대해 난처해하고 있다.138) 2008년 7월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의 이름을 묻는 한 TV방송 여론조사에서 스탈린이 1위를 차지하고 이어서 레닌이 2위를 차지할 것이 분명해지자 조사가 돌연 중지됐다. 러시아 자본주의는 여론조사 결과에 순응하지 않고 한 달 뒤에 라디오 방송국이 스탈린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하기 위해 숫자를 조작한 뒤 여론조사 결과를 다시 발표했다.139)


[고리에서 스탈린 대역을 맡아 그의 삶을 그린, 그루지야인 자밀 지야다리에프(Jamil Ziyadaliev) 쏘련에 대해 커지는 향수의 일부. (2008)]


동유럽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쏘련에서 자본주의 복귀는 그 지역의 수많은 노동자계급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유시장 천국이라는 모든 약속을 위해 서방 선전가들이 수년 동안 쏘련으로 투입됐는데,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고통과 죽음만을 당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일시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는 근심이 넘쳐나고 있다. 주민들은 점점 더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 그리고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횡행하여 벌어지고 있는가.

2009년 경제공황은 러시아 전역에 파업의 물결을 폭발시켰다. 파업들은 하루 서너 번 꼴로 발생했지만, 조직된 지도부 하에서 파업은 적었고 주로 비공인 파업(wildcat strikes)이었다. 키로프에 있는 몰로트(Molot) 공장 한 노동자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고 옷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었을 때, 그 아이들이 어떻게 나를 장사지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나라와 공장이 수치스럽습니다. 어떻게 국가가 이처럼 우리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라고 절망적 상황을 요약했다.140) 2010년 초, 그녀의 항변에 답하듯 러시아 도시 전역에서 일련의 거대한 시위들이 있었는데 그 시위에서 공산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개혁론자들은 푸틴/메드베데프 정권의 전격 사퇴를 요구했다. 대규모 경찰력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2,000명이, 칼리닌그라드에서는 10,000명이 시위를 했다. 그리고 아르항겔스크에 있는 레닌 동상 아래에는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 4,000명이 결집했다.141)

베를린 장벽의 붕괴 뒤 신 나찌(neo-Nazi) 조직원들은 새로이 빈곤에 빠진 동유럽 노동자계급의 고통에 기생하고 있다. 이들 빈민굴 파시스트의 노력은 자본주의 독일 경찰의 지원을 받고 있다. 마치 미연방수사국(FBI)이 미국에서 백인우월주의단체(Klan, Ku Klux Klan으로 흔히 KKK라고 부른다.-편집자)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과 같다.

독일 정보부는 동유럽에서 신 나찌 단체를 조직하고 건설하기 위해 정보요원을 비밀리에 이용했다.142) 2010년 초반에 구동독에 있는 작은 도시인 드레스덴(Dresden) 폭탄 투하 65주년 기념일에, 6,400명의 신 나찌들이 독일 전역에서 도시를 행진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5,000명의 반인종주의 시위자들은 도시 중앙으로부터 기차역을 구분 짓는 엘바강 맞은 편 다리 위로 인간 바리케이드를 형성했다. 5,700명의 독일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분쇄하기 위해 집결했는데 나찌들이 도시를 공격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반인종주의 시위자들의) 영웅적인 노력 끝에 인종주의 경찰과 그들의 보호를 받는 나찌들은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갔다.143)


경찰이 드레스덴에서 신 나찌 행진을 저지하려고 15,000명의 노동자들이 만든 바리케이드를 분쇄하려 시도하고 있다.(2010)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깰 수 없게 되자 그 행진은 취소됐다.)


구 소비에트권 전체 노동자들은 다양한 공산당들에게 집단적으로 투표하게 되었다. 1990년과 1991년에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선거에서 공산당을 강제로 금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 나라들에서 공산당은 놀랄만한 승리를 기록하면서 여전히 출마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공공연한 선거 개입에도 불구하고 공산당들은 어김없이 선거에서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하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2001년 연대노조(Solidarity)가 한 석을 얻는데도 실패한 반면 공산당은 의회에서 과반 의석을 획득했다. 독일에서 구 동독(독일민주공화국) 공산당의 계승정당인, 민주사회당(PDS, 원문에서 SPD는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은 어김없이 지역과 지방선거에서 승리한다. 몰도바에서는 공산당이 2009년 의회 선거에서 절반을 득표 하자 유럽은 충격을 받았다.144)

이들 당들은 모두 구 쏘비에트권의 공산당들을 계승한 정당들이다. 예외 없이 그들 정당 전부는 그들의 수정주의 계승자보다도 심지어 더 부패하다. 그들은 야바위 자본주의 선거를 믿고, 치명적인 민족주의를 조장하며, 시장개혁을 분쇄할 어떠한 진정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민들은 이러한 잘못된 지도력에 대해 투표하기 보다는 쏘련에 대한 기억에 대해 투표한다.


[부다페스트에서 쫓겨나는 시위 노동자들 (2010)]

이는 놀랍고도 중요한 현실인 한편 한계를 가진다. 인민들은 좌절하며 쏘련 체제 하에서 삶을 그리워하지만, 그것은 혁명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 쏘비에트권의 노동자들에게는 혁명적 지도력이 부족하다. 이러한 지도력 없이는 그들이 1980년대에 자본주의 길로 그렇게 무작정 내려가게끔 했던 공산당들처럼 냉소로 붕괴하거나 똑같은 파산으로 후퇴하기 쉽다. 강령이 있는 혁명적 공산당의 지도력은 지배자들의 거짓 선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동유럽에서 계급적 증오의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불꽃이 될 노동자 계급의 힘에 달려있다. [끝]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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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의 종말”은 지배계급과 한패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책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 발간된 후 유명한 승리의 외침이 되었다. 책에서 후쿠야마는 인간은 사회-문화 진화의 끝에 도달했고 자본주의는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 또는 전쟁 후 역사의 특정 기간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 그 자체, 인류 이데올로기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며 인류 통치 형태의 마지막인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보편화이다.”
2. 가짜 좌파에게 쏘련의 붕괴는 환영할 일로 기록된다. 영국 뜨로츠키 그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맑시즘 2009 행사에서 상당한 부분을 쏘비에트 공산주의의 사망을 기념하는데 할애했다. 붕괴를 거대한 “발전”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 계급에게 가져다 준 압도적 가난과 격렬한 인종주의와 성차별, 너무도 많은 수백만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어 보였다. 물론 1928년 이래로 뜨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의 파괴를 목표해 왔기 때문에 이는 놀랄 일도 아니다.
3. NYT, “A Fateful Day, and the East Tasted Freedom,”11/8/09.
4. Der Spiegel, “Berlin Celebrates the Day the Wall Fell,”11/9/09.
5.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Rational Fascism and the Overthrow of Communism,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97), p 116-117; NYT, “reacherous Transition,”12/20/93.
6. See PLP, “Road to Revolution III,”available on the website, www.plp.org
7. 당은 쏘련의 역사와 교훈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해 왔다. 웹사이트를 참고하라.
8. 경제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던 흐루쇼프의 시장개혁 정책은 실제로 쏘비에트 경제의 침체의 시작이 되었다. 이는 점차 하나씩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연속이었으며 이는 쏘비에트 경제를 내부에서부터 악화시켰다.
9. NYT, “Many Living on the Edge from Hungary’s Inflation,” 2/27/90.
10. NYT, “Soaring Unemployment is Spreading Fear in Russia,” 5/8/94; Vladmir Bilenkin, “ussian Workers Under the Yeltsin Regime: Notes on a Class Defeat,”Monthly Review, Vol. 48 No. 6, January 1996.
11. NYT, “Russians Choosing Today, Either Reforms or the Past,”ß 6/16/96.
12. People’ Weekly World, “People Before Profits: Capitalist ‘emocracy’–Life in the Former Soviet Union; Wages, Pensions, Public Health, Education are all Devastated,”12/23/05.
13. NYT, “Russians Choosing Today, Either Reforms or the Past,” 6/16/96.
14. John Green and Bruni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ß Paradise: Socialism in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What Can We Learn From It? (London: Artery Publications, 2009), p 41.
15. Patty Lee Parmalee, “Learning to Live With Capitalism in East Berlin,”Z Magazine, Vol. 5 No. 7-8, July/August 1992.
16. Der Spiegel, “Homesick for a Dictatorship,”7/3/09.
17. Nicholas Eberstadt, “Demographic Shocks After Communism: Eastern Germany 1989-1993,”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 20 No.1, March 1994.
18. BBC, “Child Poverty Soars in Eastern Europe,”0/11/00.
19. John Green and Bruni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 Paradise, p 38-40.
20. 같은 책, p 39-41.
21. People’s Weekly World, “Another View of ‘Lives of Others,’3”6/1/07.
22. Der Spiegel, “The Price of a Failed Reunification,” 9/5/05.
23. The Guardian, “When the East’ Dreams Evaporate,”11/19/94.
24.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05.
25. Vladmir Bilenkin, Monthly Review.

26. “"Death Rates in Russia Rise Dramatically: Worse than Under Stalin,”" Annals of oncology, Vol. 8, 1997, p 926.
27. NYT, “"Many Living on the Edge from Hungary’'s Inflation,”" 2/27/90.
28.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07.
29. WHO, “"Suicide Rates per 100,000 by Country, Year, and Sex,”"2009. Sri Lanka would be 4th highest but was omitted because the most recent numbers were almost 20 years old (1991).
30. NYT, “"Russians Choosing Today, Either Reforms or the ast,”" 6/16/96; AFP, “"Crisis Bad News for Russia’'s Shrinking Population,”" 5/16/09.
31. Col. Jeffrey Holachek, “"Russia’'s Shrinking Population and the Russian Military’'s HIV/AIDS Problem,”" Atlantic Council of the United States, 9/2006. 대서양 위원회(Atlantic Council)는 1961년에 설립되었고 주로 나토(NATO)와 관련된 사안에 집중하는 외교 싱크 탱크이다. 오바마의 국가안전보장국(NSA)의 James Jones는 대서양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오바마의 UN대사인 Susan Rice와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특별 대표인  Richard Holbrooke 또한 대서양위원회의 과거 회원이었다.
32. Stratfor, “"Russia’'s Dwindling Population Ensures Rigid Foreign Policy,”" 4/13/00; CHALLENGE, “"Rulers’' Battleground Becomes Workers’' Bloodbath,”" 7/21/10.
33. Nicholas Eberstadt, “"Demographic Shocks After Communism: Eastern Germany 1989-1993,”" 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 20 No.1, Mar. 1994.
34. Regina Riphahn and Klaus Zimmermann, “"The Mortality Crisis in East Germany,”" Institute for the Study of Labor (Germany) Discussion Paper No. 6, May 1998.
35. See Sir Arthur Newsholme, Red Medicine: Socialized Health in Soviet Russia (1933); and for communist health care in China see Joshua Horn, Away With All Pests: An English Surgeon in People’'s China, 1954-1969.
36. William Cockerham, “"The Social Determinants of the Decline of Life Expectancy in Russia and Eastern Europe,”" Journal of Health and Social Behavior, Vol. 38 No. 2, 6/97.
37. 동일출처.
38.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07.
39. German Life, “"Five Years After Re-unification Easterners Discover Themselves,”" December 1995/January 1996.
40. Doctors Without Borders, “"MSF Launches Campaign to Prevent Winter Death Toll of Homeless on Moscow Streets,”" 1/15/03; BBC, “"Dozens Die in Russian Cold Snap,”" 1/19/06; Global Post, “"Freezing to Death in Russia,”" 1/3/10.
41. See the documentary film Power Trip (2003).
42. The Hindu (India), “"Russia: Forests Up in Flames,”" 8/23/10.
43. AP, “"Moscow Deaths Double Amid Smog to 700 People a Day,”" 8/9/10.
44. BBC, “"Moscow ‘'Hiding Heatstroke Cases’' After Death Rate Jumps,”" 8/12/10; Bloomberg, “"Russia Heat Wave May Kill 15,000, Shave $15 Billion off GDP,”" 8/10/10.
45. 로이터(Reuters), “"Opposition Says Putin Law Cripples Russia Fire Fighting,”" 8/4/10; 뉴욕타임즈(NYT), “"Russian Response to Fire Does Little to Calm Anger,”" 8/7/10.
46.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07.
47. William C Cockerham, M Christine Snead, and Derek F Dewaal, “"Health Lifestyles in Russia and the Socialist Heritage,”" Journal of Health and Social Behavior, Vol. 43 No. 1, March 2002.
48. Ria Novosti, “"Alcohol Abuse Kills 500,000 Russians Annually,”" 6/16/09.
49. 가디언(The Guardian), “"No Country for Old Men,”" 2/11/08; Pravda, “"Russian Men Become Extinct,”" 11/3/05.
50. Sir Arthur Newsholme, Red Medicine: Socialized Health in Soviet Russia.
51. Anna Louise Strong, The Stalin Era, (Altadena, CA: Today’'s Press, 1956), p 48-51.
52. Tanja van der Lippe and Eva Fodor, “"Changes in Gender Inequality in Six Eastern European Countries,”" Acta Sociologica, Vol. 41 No. 2, 1998.
53. Vladmir Bilenkin,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
54. 동일출처.
55.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09.
56. 모스크바 미대사관 John Beyrle 대사가 보낸 이 전문은 카운터펀치(Counterpunch)에서 전문을 발행한 것과 위키리크스에서 폭로된 것이다. Israel Shamir, Counterpunch, “"US Ambassador John Beyrle: ‘'Feminism’' is a Dirty World Fighting,”" 8/4/10; NYT, “"Russian Response to Fire Does Little to Calm Anger,”" 8/7/10.
57. German Life, “"Five Years After Re-unification Easterners Discover Themselves,”" December 1995/January 1996.
58. Patty Lee Parmalee, “"Learning to Live With Capitalism in East Berlin,”" Z Magazine, Vol. 5 No. 7-8, July/August 1992.
59. Telegraph (UK), “"Women’'s Love Lives Were Better in East Germany Before the Berlin Wall Fell,”" 10/19/09.
60. 동일출처;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15; Vladmir Bilenkin, Monthly Review.
61. NYT, “"With Prostitution Booming, Legalization Tempts Russia,”" 3/3/98.
62. CNN, “"Russia’'s Sex Slave Industry Thrives, Rights Groups Say,”" 7/18/08; AFP, “"Authorities Turn Blind Eye on Far East Russia Women Trafficking,”" 2/12/05.
63.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15.
64. Human Rights Watch, “"Too Little, Too Late: State Response to Violence Against Women,”" 1998.
65.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15.
66. 동일출처

67) BBC, “Moscow Race Hate on the Rise,” 9/4/01. For a report on the experiences of African-American students in Moscow during the 1930s see Harry Haywood, Black Bolshevik: Autobiography of an Afro-American Communist.
68) See PLP pamphlet, Smash Racism: A Fighter’s Manual.
69) Amnesty International News Release, “Indifference to Racism Must be Addressed,” 4/19/02.
70) ABC News, “Violence ‘in the Name of the Nation,’” 10/11/07; Washington Post, “Moscow Killings Blamed on Racism,” 4/8/08.
71) The Confederation for an Independent Poland (KPN) and the Movement for the Defense of Human Rights (ROPiCO).
72) Wall Street Journal, “Poles Plant the Seeds of the Party System,” 10/26/81.
73) CHALLENGE, “Fascist Anti-Semitism in ‘Solidarity,’” 2/24/82;Washington Post, “Crackdown in Poland Raises Fears of Increased Anti-Semitism,” 12/26/81.
74) 이날은 폴란드가 거의 파시즘의 길로 떨어질 뻔 했던 1차 세계 대전 이래로 공산주의 폴란드에 의해 기념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폴란드의 독립을 2차 세계대전 여파의 시작으로 인식하였다.
75) CHALLENGE, “Fascism, Anti-Semitism and the Catholic Church,” 3/3/82.
76) Harold Segel, “Culture in Poland During World War I,” in European Culture in the Great War: The Arts, Entertainment, and Propaganda,1914-1918,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 60.
77) CHALLENGE, “Fascist Anti-Semitism in ‘Solidarity,’” 2/24/82.
78) CHALLENGE, “Western Bosses Cover for Solidarity Anti-Semitism,” 3/10/82; NYT, “Polish Aide Accuses US of ‘Immorality,’” 1/7/82.
79) NYT, “Poland’s Jewish Uproar, And with so Few Jews,” 9/17/90.
80) AP, “Walesa’s Slow Reaction to Anti-Semitic Sermon Causes Row,” 6/23/95.
81) NYT, “Poland’s Jewish Uproar, And with so Few Jews,” 9/17/90.
82) ECRI, “ECRI Report on Poland,” 6/15/10.
83) The Guardian, “Jewish Resistance Film Sparks Polish Anger,” 3/5/09.
84) SPLC Intelligence Report, “Night at the Museum: A Controversial Historian at the Holocaust Museum,” Winter 2009.
85) 이는 또한 베트남에서 행해졌다. 호치민의 당선과 훨씬 더 대중적인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를 두려워한 미국은 남북 베트남을 재통일할 예정된 선거를 연기했고, 결국 취소하여 베트남 전쟁의 확대로 이끌었다. 참조: Marilyn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86) Ronald Smelser and Edward Davies,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p 50-56.
87) Glen Yeadon and John Hawkins, The Nazi Hydra in America: Suppressed History of a Century, (Joshua Tree: Progressive Publishers, 2008), 278-287; Ronald Smelser and Edward Davies,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p 68, 72-73; also see Norbert Frei,Adenauer’s Germany and the Nazi Past: The Politics of Amnesty and Amnesia.
88) Glen Yeadon and John Hawkins, The Nazi Hydra in America, p 280-281; Tete Harens Tetens, The New Germany and the Old Nazis, (New York: Random House, 1961), p 76.
89) Berliner Zeitung, “A Nazi Quagmire,” 7/12/10; Jonathan Wiesen,“German Industry and the Third Reich: Fifty Years of Forgetting and Remembering,” Dimensions, Vol. 13 No. 2, 2000.
90) Patty Lee Parmalee, “Learning to Live with Capitalism in East Berlin,” Z Magazine, Vol. 5 No. 7-8, July/August 1992.
91) The Guardian, “Angela Merkel: German Multiculturalism has ‘Utterly Failed,’” 10/17/10.
92) Christian Science Monitor, “Why 13 percent of Germans Would Welcome a ‘Fuhrer,’” 10/15/10.
93) 동일출처
94) Washington Post, “German Politician Stirs Controversy with His Inflammatory Views on Muslims and Jews,” 8/30/10.

95)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12.
96) 동일출처, p 93.
97) Vladmir Bilenkin, Monthly Review.
98) Washington Post, “"Russia’'s Political Murders,”" 10/29/09.
99) Amnesty International, “"Torture in Russia –- ‘'This Man-Made Hell’',”" April 1997.
100) AFP, “"Medvedev Orders Crackdown on Russian Police Corruption,”" 2/18/10.
101) Patty Lee Parmalee, Z Magazine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82.
102)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82-83; People’'s Weekly World, “"Witchhunt Trials of East German Leaders Continue,”" 10/19/96; People’'s Weekly World, “"German Authorities are Turning History on its Head,”" 5/30/98.
2차 대전 이후 서독 정부는 결국 그들은 정부 내로 들어오게된 나찌들에게 상당히 관대했다. 구 나찌들은 군대와 외무부, 경찰분야에 매우 집중되어 있었다. 구나찌들에 대한 이러한 대우는 동독 관료들에 대해 빈번히 흔적없이 진행된 맹렬한 공격이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103) Patty Lee Parmalee, Z Magazine.
104) 동일출처. /학교와 정부 내 노동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는 대학 학장, 정부 나 연구 기관의 국장들, 75,000명이 넘는 교사를 포함하여 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John Green and Bruni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 Paradise, p 40.
105) Patty Lee Parmalee, Z Magazine.
106) Der Spiegel, “"Homesick for a Dictatorship,”" 7/3/09.
107) William Blum, Killing Hope: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 (Monroe, ME: Common Courage Press, 1995), p 314-320. For more on the FCF see this website, http://www.politicalamazon.com/fcf.html
108) 동일출처, p 320.
109) NYT, “"Pro-Western Albanian Chief Claims Victory in Chaotic Election,”" 5/28/96.
110) NYT, “"Walesa Takes Wide Lead in Presidential Voting,”" 11/26/90.
111) CHALLENGE, “"Solidarnosc’'s Leaders are Imperialist Agents,”" 3/31/82.
112) Washington Post, “"Wheeling and Dealing, Moscow Style,”" 9/26/91.
113) Andrew Felkay, Yeltsin’'s Russia and the West, (London: Praeger, 2002), p 78-79.
114) NYT, “"A Specter’'s Shadow Returns to Haunt Moscow,”" 10/11/08.
115) Peter Gowan, “"The Myth of ‘'Democracy Assistance’': U.S. Political Intervention in Post-Soviet Eastern Europe,”" Monthly Review, Vol. 58 No. 7, December 2006.
116) NYT, “"From Yeltsin, a Reminder of Stalin and Terror,”" 6/16/96.
117) NYT, “"Russia Heads for Trouble,”" 7/2/96.
118) The Guardian, “"Communism May be Dead, But Clearly Not Dead Enough,”" 2/16/06.
119) Michael Parenti, History as Mystery, (San Francisco: City Lights Publishers, 2001) p. 137-141; Patty Lee Parmalee, Z Magazine.
120) Patricia Brodsky, “"Germany Report: The Selective War on History,”" Progressive Clearing House Bulletin 5, 1998.
121) Der Spiegel, “"Homesick for a Dictatorship,”" 7/3/09.
122) Patty Lee Parmalee, Z Magazine John Green and Bruna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 Paradise, p 27-30.
123) German Life, “"Five Years After Re-unification Easterners Discover Themselves,”" December1995/January 1996.
124) Vladmir Bilenkin, Monthly Review.
125) People’'s Weekly World, “"People Before Profits: Capitalist ‘'Democracy’' –- Life in the Former Soviet Union; Wages, Pensions, Public Health, Education are all Devastated,”" 12/23/05.
126) Patty Lee Parmalee, Z Magazine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13.
127) Inter Press Service (IPS), “"Illiteracy Rising in Parts of Europe,”"5/12/09.
128) The Guardian, “"Communism May be Dead, But Clearly Not Dead Enough,”" 2/16/06.
129) Michael Parenti, History as Mystery, p 137-141.
130) See CHALLENGE, “"Rulers’' Battleground Becomes Workers’'Bloodbath,”" 7/21/10.
131) Reuters, “"Stalin Statue Removed From Home Town,”" 6/25/10; AP, “"Georgian Authorities Pull Down Stalin Monument,”" 6/27/10.
132) Joakim Ekman, “"Communist Nostalgia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A Matter of Principles or Performance?”" Paper Presented at the Nordic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s Annual Meeting, Aalborg, Denmark, August 15-17, 2002.
133) Joakim Ekman, “"Communist Nostalgia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A Matter of Principles or Performance?”"
134) CNN, “"Ex-East Germans Nostalgic for Communism’'s Simpler
Life,”" 11/9/99; Der Spiegel, “"Homesick for a Dictatorship,”" 7/3/09; France 24, “"Germans Miss the ‘'Good Old Days’' of the GDR,”"9/10/08.
135) Gallup International, “"Voice of the People 2008: Attitude Towards Life,”" 2008; Reuters, “"In Eastern Europe, People Pine for Socialism,”" 11/8/09.
136) Reuters, “"In Eastern Europe, People Pine for Socialism,”" 11/8/09.
137) Voice of America News, “"Poland’'s Communist Nostalgia at Odds with Official Ban,”" 12/15/09.
138) See, Radio Free Europe, “"Russia: Is the Country Pining for Stalin?”" 5/31/05; NPR, “"Stalin Nostalgia Growing in Russia,”"2/24/06; Ria Novosti, “"Fifty-Five Years on, Stalin Remains Iconic Figure,”" 5/3/08; BBC, “"Stalin’'s New Status in Russia,”" 12/27/08; AP, “"Russia Communists: Don’'t Slight Stalin on His Bday,”"12/21/09.
139) The Guardian, “"Medieval Warrior Overcomes Stalin in Poll to name Greatest Russian,”"12/29/08.
140) Radio Free Europe, “"Russia’'s Labor Tribulations Cast Shadow Over May Day Festivities,”" 4/30/09.
141) Radio Free Europe, “"Kaliningrad on the Brink,”" 2/2/10; Radio Free Europe, “"Thousands Take Part in Antigovernment Protests Across Russia,”" 3/20/10; Reuters, “"Thousands Protest Against Putin in Russian City,”" 3/28/10; AFP, “"Scores of Activists Detained at Russian Rights Protest,”" 8/31/10.
142) Victor Grossman, ZNet, “"Neo Nazis in Germany, or Deja Vu?”"9/4/07. For info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BI (and other U.S. police forces) and Klan see, Kristian Williams, Our Enemies in Blue: Police and Power in America.
143) Hürriyet Daily News & Economic Review, “"Thousands Prevent Neo-Nazi Rally in Dresden,”" 2/14/10.
144) William Blum, Killing Hope, p 314-320;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87-99; NYT, “"Russia Heads for Trouble,”"7/2/96; SF Gate, “"Ex-Communists Win Big in Polish Elections/Solidarity Loses, with Party Leaders Doubting its Future,”"9/24/01; People’'s Weekly World, “"Berliners Cheer German Election Results,”" 10/23/99; The Independent (UK), “"Uprising in Moldova as Communists Win Election,”" 4/8/09.

<노/정/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