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쏘비에티카(Sovietica)의 저자 이리나 말렌코(Irina Malenko)와의 인터뷰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7. 12:25

쏘비에티카(Sovietica)저자 이리나 말렌코(Irina Malenko)와의 인터뷰

 

<노동자정치신문>[102호(통합 114호), 103(통합 115), 2014년 2월, 3]

 

출처:

http://ideologicalfightback.blogspot.kr/2013/02/an-interview-with-irina-malenko-author.html

 

201322

 

쏘비에티카의 저자인 이리나 말렌코가 스리랑카의 사회주의 청년 조직 (Socialist Youth Union of Sri Lanka)의 스리랑카어 기관지인 SYU와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 내용은 SYU에서 곧 출판될 것이다.

 

 

이리나 동지 환영합니다. 스리랑카 사회주의 청년 조직의 기관지 SYU에서, 우리는 당신과의 특별한 대화를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나라와 청년들에게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쏘비에티카라는 저작을 통해 당신은 알려져 있습니다. 그 책에서 발췌되어 번역된 부분들이 이곳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쏘비에트에서의 학생생활과 쏘비에트 대학생에 대해 당신이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쏘련이라는 광대한 국가에서의 어린 시절, 학창생활에 대해 말입니다.

 

우선 먼저 당신에 대해, 당신의 삶과 활동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이리나 말렌코이고 45세이다. 나는 쏘비에트연방의 툴라(Tula)에서 태어났다. 쏘련에서 22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모스크바의 역사 기록 대학(Institute of History and Archives)을 졸업하였으며 그 뒤 개인적인 사정으로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8년을 살며, 레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에서 슬라브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직장을 찾아 아일랜드로 가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아일랜드에 살고 있다. 그리고 번역/통역자이면서 정치 활동가로 살고 있다. 제 마음이 원하는 것에 따라, 1999년부터 나는 무급 작가로 처음에는 다양한 러시아 웹 사이트에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만의 기사, 그리고 결국에는 쏘비에티카라는 소설이 2009년에 나오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가 공산주의자이고 쏘비에트 여성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질문: 당신은 쏘련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괜찮다면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당신이 어렸을 때의 쏘비에트 사회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할 때 정말 행복해진다. 그것은 단지 평범한 것이 아니다. 쏘련에서 성장했던 나와 같은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상당히 젊었을 때에 하나 뿐인 아이로 태어났다. 나의 어머니는 당시 21세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25세 대학원생이었다. 나중에 아버지는 교수가 되었고 어머니는 큰 공장의 부장이 되었다. 어머니는 직업적 기술자였다.

 

우리 가족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본다면, 우리는 많은 세대 동안 노동자 계급의 출신이 되었다. 우리 조상 모두는 금속 노동자 그리고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총포 대장장이었다. 우리 어머니의 세대는 대학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였다. 혁명 이전에 할머니의 오빠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9살의 나이로 공장 일을 시작했어야 했다.

 

우리 세대 때가 되어 그러한 것들은 먼 과거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나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린이들은 일곱 살 때부터 10년간의 집중적인 교육(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을 받게 되었다. 어린이들은 종종 쏘련에서 유일한 특권 계급이라고 불리고는 했다.

 

모든 교육은 완전 무상이었고, 상당 수준이 높은 것이었다. 우리는 또한 방과 후에 다양한 클럽활동을 할 수 있어서, 체육활동을 하거나 악기 연주를 완전 무료로 할 수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한 것들로 어린이 여름캠프, 어린이 카페, 어린이 철도,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어린이의 기지(식물 돌보기를 연습할 수 있는 장소) 등이 있었다. 짧은 인터뷰에서 언급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두 살 때 이혼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가 17세가 될 때 까지 나는 어머니, 조부모님과 삼촌(어머니의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우리 조부모님은 공장노동자로 퇴직을 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삼촌은 경제학자이다.

 

우리의 생활은 상당히 안전하고, 보장되어 있었고, 조용했으며 스트레스라고는 없는 환경이었으며, 특히 마약이나 범죄가 실질적으로 없었다. 사회적인 많은 제어가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의 동료나 이웃들이 잘못을 교정시켜 주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들을 제외한 모든 성인들은 고용되어 있었고, 만약 집에 있기를 원하거나 퇴직한 사람들은 집안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은퇴 연령은 여성은 55세 남성은 60세였다.

 

쏘비에트 사람들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예술은 다가가기 쉬운 곳에 있었다. 도서관은 무료였다. 도서, 연극, 콘서트, 박물관, 전시회는 매우 저렴하였다.

 

우리는 주택과 직장과 유급 휴일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주택 가격은 매우 저렴하였다. 사람들은 고작 수도요금과 전기 요금만 납부하면 되었고, 이는 전체 임금의 3~4% 정도 비중이 되는 것이었다. 국가에서는 인민들에게 평생 동안 무료 아파트를 제공하였고, 거기서 자녀들도 함께 살수가 있었다. 다만 그 아파트를 판매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음식 뿐 아니라 공공 교통 요금 또한 매우 저렴하였다. 어린이 의류와 신발들은 국가에서 지급되었다. 교과서도 무료로 지급되었다.

 

나는 우리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말할 수 있다. 내가 쓴 책 쏘비에티카에서 가능한 상세하게 우리의 삶을 그려내려 노력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이미 알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믿기 어려워한다.

 

성장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우리는 매우 어린 나이 때부터 뭔가를 하기 전에 우리의 행동이 다른 주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을 고려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날 까지도 여전히 실행하고 있다. 이는 쏘비에트 인간으로서의 내가 행하는 방식이다.

 

 

질문: 우리 스리랑카에서는 부모와 자녀들 외에도 조부모님들 또한 한 집에서 사는 것이 매우 흔한 일입니다. 도시 지역에서 이웃들 간의 관계가 상당한 수준으로 약해지고 있음에도, 시골 지역에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여전히 공동체와 이웃들 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당신의 가족은 어떠했습니까? 어릴 적 고향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아마도 당신의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가르쳐 주었고 글 쓰는 능력도 상당히 북돋아 주었을 것이라고 분명 생각하는데요!

 

그렇다. 그것은 쏘련과 상당히 유사하다! 많은 사람들은 확대된 가족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한 집에 여러 세대가 같이 살았고, 특히 어린이들에게 훌륭했다! 조부모 두 분 중 우리 할머니는 나의 성장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할머니는 가정주부가 되었기 때문에(공장 일을 그만 둔 후에),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보내주셨다. 할머니는 우리가 모두 귀 기울여 들었던, 강한 인간성을 가진 조용한 여성이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우리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참을성 있고, 지적이고, 도덕적 가치를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할머니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모범에 따라 생활하려 모두 노력하였다. 할머니는 내가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일을 그만 두셨다. 그는 집을 수리하고 돌보며 우리 집 야채밭에서 일을 했다. 할아버지는 또한 나를 위해 많은 이야기를 지어 주었고, 나를 숲에 데리고 다니며 버섯을 따고, 낚시도 다녔다. 할아버지와 삼촌은 아버지를 대신해주는 좋은 분들이었고, 그래서 내 가정환경에서 남성 역할 모델은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이웃들 또한 매우 중요했다. 내가 사는 거리에는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있는 가정(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어머니는 풀타임으로 일을 했고, 그 집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았고, 아버지도 자신의 일을 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종종 거리로 나와 있고는 했다. 그렇지만 모든 거리의 사람들은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서구에서는 이웃들은 단지 사회복지사를 불러줄 뿐이고, 사회복지사들은 와서 아이들을 부모들로부터 데려가려 할 뿐이다. 그러면 그들의 생활은 파괴될 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며, 이런 것들을 두고 그들은 보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쏘련에서 사람들은 진짜 보호를 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음식이나 옷을 주었고, 항상 아이들을 주의해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 여섯 아이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가족을 꾸리게 되었다. 일을 하고 있다. 만약 그 아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랐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났을지 나는 종종 생각해 본다. 아마도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은 큰 행운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운아였다! 엄청난 행운이었다!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다섯 살 때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었다. 그 때 나는 이미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나의 첫 번째 (비카라는 이름의 작은 소녀의 모험- 우리 할머니의 여동생, 나의 삶에 중요한 사람 중의 한 분인 그분이 주말마다 우리와 함께 보내며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들을 편집한 것)’을 썼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읽었던 책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었고, 이 책을 본 이후로 나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느끼게 되었다.

 

 

질문: 유치원에 다녔었습니까? 유치원은 아이들에게 어떤 장소 인가요?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내가 세 살인가 네 살 때에 유치원을 잠시 다녔었다. 엄마가 첫 번째 일을 다시 시작했을 때이다. 유치원은 어머니의 공장 내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그곳에서 하루 종일(아침 8시부터 저녁 6시 까지) 지내도록 하기 위해 어머니는 임금의 일정 비율을 지불했었다. 유치원은 상당히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공동체의 일부분이 되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었고, 우리나라의 중요 정치적 부분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음악 수업도 있었고, 장난감도 많이 있었고, 공원에 가는 야외 활동도 있었다. 나의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내가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친구들과 사귀기를 어려워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다섯 살 때에는 유치원에 가는 것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루 종일 나를 돌봐주게 되었다.

 

질문: 어린 시절에 쏘련의 아이들은 어떠한 것들이 가능했던가요? 이야기책이나, 만화, 어린이 영화, 체육활동 등이 가능했는지 이야기 바랍니다. 어린이들은 어떻게 보호 받았는가요? 여기 스리랑카에서는, 끔찍한 수준의 아동학대가 발생하고는 합니다. 아동학대가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모든 것들이 가능했다! 어린이 도서만을 특수하게 발행하는 출판사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어린이만을 위한 만화, 장편 영화가 엄청나게 많았다. 어린이를 위한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이 매일 나왔다. 또한 우리 모두가 보던 동화 만나기같은 주말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매주 새로운 동화로 하는 특작 영화가 방영되었다.

 

모든 스포츠클럽은 완전히 무료였다. 어린이들은 스포츠클럽에 참여하기를 장려 받았고, 우수한 이들은 체육 학교로 진학하도록 선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쏘련이 올림픽에서 그렇게 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모든 이들이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영화에서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타이 바비로니아(Tai Babilonia)의 아버지가 그녀의 스케이팅 레슨을 위해 한꺼번에 세 개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극장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영화 특별 오전 상영이 있었고, 극장표는 할인을 받았다. 종종 한 반 전체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또한 각자의 흥미에 따라 다양한 방과 후 활동을 할 수 있는 피오네리 회관(피오네리(Pionery, Pioneer)는 쏘련의 9~14세로 구성된 청소년 조직- 편집자 주)이라는 곳이 있었다. 모든 어린이들의 학교 과정 중의 하나로 수영 연습 시간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옷이나 책, 장난감, 보육 등 어린이들을 위한 것은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지원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 가지는 것은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다라고 말한다. 가족의 크기를 제한하는 단 하나의 요소는 아파트의 크기일 뿐이었다.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아동학대란 것은 실제로 거의 들어보지를 못했다. 아동학대를 보도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성인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아이들을 해칠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낯선 사람들이 주는 달콤한 음식은 받지 말고 낯선 사람들을 절대 어디에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었지만 단 한 번도 접근해서 그랬던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들과 별다른 감시를 받지 않고도 하루 종일 밖에서 놀았다. 내가 살던 도시(50만 명이 사는!)에서 20년 동안에 단 한 번의 아동 살해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던 아이의 엄마에 의한 것이었다. 노숙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만약 한 어린이가 거리를 혼자 배회하고 있다면, 처음 본 어른은 아이의 부모님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고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준다.

 

 

질문: 학교생활은 어떠했습니까? 학교는 어떠한 곳이었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을 인기 있고또는 앞서 나가는’(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보다 특권적이고 시설이 잘된 학교라는 것이다)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큰 경쟁을 벌입니다. 쏘비에트 지역에서도 어린이들 사이에 거대한 경쟁이 있었습니까? 학교 방과 후 사설 교육 체계는 어떠했습니까?

 

쏘련에서는 단 한 가지 학교 체계만이 있다. 모든 이들이 똑같은 학교를 가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학교를 가기 위한 경쟁은 없다. 처음에는 8년 동안의 교육과정이 의무교육이었고, 나중에는 의무교육이 10년으로 되었다. 자신들이 원한다면, 일부 학생들은 8년 학교 과정이 끝나고 떠나지만 학생들은 직업과 관련된 것을 배우기 위해 칼리지에 들어간다. 그리고 칼리지에서 똑같은 10년의 학교 과정을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아이들의 배경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정말로, 진정으로 모든 아이들을 위한 체계였다. 단 하나 학교 형태에 차이점이 있는 것이라면 장애가 있어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뿐이다. 한 과목을 특히 다른 것보다 훨씬 깊이 있게 공부하는 학교도 있는데 수학 학교나, 외국어 학교 등으로, 특별히 그곳을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이다.

 

어린이들이 겪게 되는 단 한 가지 경쟁이라면, 한 교실 내에 여러 그룹들 사이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는 것이다. 학생들은 세 개나 네 개 정도의 "고리(link)"로 나뉘게 되었는데 한 고리에는 네다섯 명의 아이가 한 모둠으로, 직접 뽑은 조장도 한 명 씩 있다. 보통 가장 잘 하는 학생들이 잘 못하는 학생을 학교 끝나고 숙제 등을 도와주고는 했다. 그런 방식은 다른 어느 사설 교육보다 아주 효과가 좋았다. 잘하는 학생들은 잘못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지난 학교생활에서 오직 일부 학생들이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부 과목이 부족하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 사설 교육을 받았다. 나도 학교 다녔던 동안 프랑스어 사설교육을 두 달 정도 받았다. 하지만 서구 자본주의와는 달리 사설 교육은 활발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여러 가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단지 교실 안에서가 아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다양한 야외 활동, 밭에서 일하기, 집단 농장에서 하루 동안 농작물 수확 돕기, 주말 자발적 노동(subbotnik)에 참여하기, 학교 정원 청소하기 등을 했다.

 

우리의 성장 과정은 또한 정치적인 것이었다. 1학년 때 우리는 모두 “10월의 어린이가 되어 특별한 배지를 달고 행동 방식을 배운다. 3학년 때에 우리는 피오네리(Pioneer)가 되어 붉은 타이와 배지를 작용한다. 학교에서 특별한 행사로 데리고 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우리는 젊은 피오네리(Young Pioneer)의 맹세를 한다. 나는 이 날과 우리가 레닌의 무덤을 방문했던 것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14세가 되었을 때, 우리는 콤소몰(Komsomol, 공산주의 청년 동맹, 14세에서 28세를 위한 조직)에 가입할 수가 있었으며, 대부분은 가입했다. 콤소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 단계에서 수락을 받아야 했고, 다음으로 지구 단계에서 특정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회원 카드를 받았던 그 날은 정말 흥분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또한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배웠다. 9학년 때에 우리는 여름 4주 간 진짜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임금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루에 단지 4시간이나 5시간만을 일했다. 우리가 학교를 떠나기 전에 노동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한 취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를 배웠다. 학교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 우리는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했었다.

 

 

질문: 단지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은 사람을 교육시키는데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쏘비에트 인간성을 형성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어떠한 지원을 해 주었습니까? 삶과 인류, 자연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형성되도록 학교와 사회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쏘비에트 학교에서 우리는 어린 나이 때부터 애국심에 관련된 많은 수업들을 들었다. 퇴역한 참전군인들, 심지어 어린 시절에 레닌을 만났었던 여성이 학교에 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또한 우리는 대조국전쟁 게임, 관련 노래와 행진 대회를 하기도 했다. 쏘비에트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들은 외로운 노인들을 돌봐주고 방과 후에는 집안일이나 시장보기, 청소 등 여러 일들을 돕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아카디 가이다(Arkady Gaida)가 집필한 유명한 어린이 책 티무르와 그의 팀(Timur and His Team)”을 따라서 티무르(Timur)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Timurovtsy”라고 불리었다.

 

학교를 다니는 상급 어린이들은 어린 학생들을 돌봐주었고, 주말에 방문을 하거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지도자 또는 안내자라고 불렸다.)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수업이 끝난 뒤에 인간의 삶과 그것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로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반에서 같이 일하고, 추수 기간에 집단농장을 도와주는 일은 우리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학교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을 존경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빵 한 조각도 땅바닥에 버리지 않도록 배웠는데, 그 빵은 다른 사람들의 고된 노동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문학 교과서는 우리에게 좋은 행동의 예시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연에 대해 말하자면, 청년 자연보호주의자 그룹이 있었고 지역의 숲이나 공원을 돌보는 일을 했다. 몇몇 학교에서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을 두어 동물들을 살게 하고 어린이들이 동물을 돌보는 것을 배우게끔 했다. 만약 청년 피오네리나 콤소몰 회원이 뭔가 잘못된 일을 했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한 반 전체가 그 행동에 대해 토론하고, 반 학생들 전부가 그러한 행동을 고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쓸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방법에 대해 민주적으로 투표를 하는 것이었다.

 

 

질문: 자본주의 체제는 질병과 다툼으로 단지 어린이들을 신체적으로 병들게 할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마음을 침해하여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것들을 시장의 논리와 행동에 따라 판단하도록 훈련시킵니다. 청소년 시기 올바른 태도를 형성하기 위해 쏘비에트 시스템에서 이용했던 몇 가지 사례를 말해주기 바랍니다.

 

돈을 버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 “모든 것에는 가격이 있다등과 같은 태도들은 아주 역겨운 것으로 여겨졌다. 쏘비에트 영화나 책들에서 이러한 삶의 태도가 비웃음을 샀을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의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는 어떠한 대가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배웠다.

 

누군가가 당신을 도와주었을 때에 그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은 모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의 자본주의 삶에서 돈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누군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돈을 받지 못하겠다. 나는 진실로 무료로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다. 금전적인 대가가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게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나는 행복을 느낀다. 이러한 가치관은 우리 부모님과 학교에서부터 물려받게 된 것이다.

 

 

질문 : 오늘날 젊은 여성들의 안전은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쏘비에트 러시아에서 그 문제는 어떠했습니까?

 

! 여성들은 매우 안전했다. 여성들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우리 사회 (그리고 여성 자신들은, 확실히)는 성차별을 용납하지 않았다. 소년들과 남성들은 육체적으로 더 강하기 때문에, 여성은 단지 평등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도와주고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소년들은 배웠다.

 

성폭행이나 강간 같은 범죄들은 극히 드물었고 만약 그러한 일들이 발생한다면, 범죄자들은 종종 재판 뒤에 사형을 받았다(쏘련에서는 중대 범죄들에 대해서 사형죄를 적용했다).

 

더욱이, 쏘련에는 포르노가 없었다. 해외에서 포르노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불법이었고,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는 일체의 포르노물도 방영하지 않았다. 졸업 이후 네덜란드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처음으로 포르노를 접했을 때, 나는 몇 년 동안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것들이 판매용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접했을 때 모욕감을 느꼈고, 자유롭고 해방됐다고 하는 서방 여성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극악하고 전반적이며 우리 모두에게 멈추지 않는 모욕을 감수하고 심지어 그것에 맞서 저항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리고 나는 23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여성에 대한 공격과 함께 여성 모욕은 1988-1989년 경, 고르바초프 정권 하의 쏘련의 마지막 시기에 시작됐다. 이전에는 규제됐던 포르노물들이, 영화에서 성애의장면들과 성애의잡지들로 허용됐다. 우리의 소녀들은 매춘부가 얼마나 멋진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문구로 집중공세를 당했는데 - 그리고 그 공세는 또한,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당 지도자들의 반역자 무리들로부터 비롯됐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나의 저작에서 오늘날 러시아와 비교해서 쏘비에트 거리의 안전이라는 내용에 대한 부분을 발췌해 보겠다.

 

내가 여섯 살 때, 엄마가 나를 모스크바로 데리고 가셨다. 엄마는 미국 아이스 쇼 «빙판 위에서의 휴일(Holiday on Ice)»을 보려고 어렵게 티켓을 구했다. 우리는 그 쇼가 끝난 뒤에 야간 완행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객차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거의 전 거리를 엄마의 무릎 위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는 우리는 새벽 4시에! 도시 전역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었다. 그 여름밤은 아주 좋았는데 따뜻하고 고요했다. 여름밤은 환상적이었고, 어느 것도 혹은 누구든지 무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따금 우리는 연애 중인 커플들과 야간 교대로부터 돌아오는 노동자들 같이 간헐적인 통행인들과 마주쳤는데 그 누구도 조금이라도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지금, ‘해방된민주주의 흉내를 내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그 밤에 혼자서 길을 가는 우연히 가면서, 누군가가 어떻게 아이와 함께 있는 한 여성을 강간하거나 강탈할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있는가? 한 영화 비평가가 최근 아주 심각하게 말한 것처럼, ‘쏘비에트 정신으로부터 규범까지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변화’! - 그 규범은 자본주의 규범이다!

 

최근, 나는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짧은 얘기를 우연히 찾아냈다. : 1983년 모스크바에서 의 한 학생 파티. 부유한 가정 출신인 외국 학생들 중 한 명이 술에 취해서 우리나라와 전통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불만들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벌써 취했고 혼자서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는 여성이 필요하다. 나는 돈이 많다(그는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어느 정상적인 나라에서라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취하기에 충분할 텐데, 쏘련에서는, 만약 내가 거리에서 한 여성이나 여기 학생 기숙사에서 돈을 준다면, 나는 그저 뺨을 얻어맞을 수 있다. 진짜 당신들 모두는 미쳤다!’

 

누구도 그와 말다툼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모든 사람들은 이런 어릿광대를 향해 조소를 보낼 따름이었다. 그때 내가 나의 나라와 우리 여성들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정상적인 나라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여성들에 대한 쏘비에트의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 여성들 자신들의 도덕적인 규범에 있어서도 이러한 부정적 예가 실제로는 전체적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 : 사랑은 젊은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사랑에 대한 쏘비에트 사회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재산, 직업, 종교, 피부색, 국적, 기타 등등은 쏘비에트 사회에서 사랑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우리사회에서 사랑은 역시 아주 중요했다. 우리는 사랑은 순수하고 조건 없는 감정이고 사람은 오직 사랑만 가지고 결혼해야 한다는 관념을 배웠다. 사랑은 하나의 진지한 감정으로서 여겨졌고, 예를 들어, 네덜란드에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큰 사랑을 찾기 위해 다른 작은 사랑들을 시도하는 것은,” 쏘련의 가치 체계에서는 당치 않는 일이었다.

 

사랑의 주요한 전형은 죽을지언정, 사랑 없는 키스는 하지 마라!”고 유명한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작가인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끼(Nikolai Chernyshevsky)에 의해서 표현됐다. 쏘비에트에서 사랑에 대한 견해는, 재산,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직업 종류, 국적이나 피부색 또는 종교적 문제들 따위가 아니었다. 쏘련 결혼에서의 1/4는 다른 민족 배경 출신의 사람들 사이였다. 심지어는 유태인 소녀와 키르키스인 소년, 에스토니안 소녀와 베트남 소년 등등 같은 가장 독특한 결합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다민족 사이에 결혼한 가정의 아이를 기차에서 본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 아버지는 어디 사람이니?”

우즈벡요.”

그럼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사람요.”

그러면 너는?”

그리고 저는 러시아인입니다!”

 

나는 다른 민족하고 심지어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진 누군가가 사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쏘비에트 환경에서 자랐다. 오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외국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본주의 세계에 이민가고 싶어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처럼 그것은 조국을 배신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여겼기 때문이다.

 

내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에티오피아 남학생이었는데,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나는 종종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의 종교 때문이라고는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는데(그는 무슬림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이상은 다른 나라 출신 혁명가들을 만나서 그와 함께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심각하게 그 생각을 했는데 - 나는 그의 문화에 대해 아주 많이 배웠고, 심지어 그가 러시아 말을 아주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나라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개인 수업을 받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내 남자 친구는 혁명가가 아니었는데, 나는 뒤늦게야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혁명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결별하는 주요한 이유였다. 그것은 쏘비에트 소녀인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내가 카리브인 출신의 한 젊은 남자와 결혼하게 됐을 때, 나의 가족은 진심으로 그에게 애정을 주었고 누구도 내 선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최고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훗날, 아이였던 딸을 조국에 데려 왔을 때 -딸아이는 흑인과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 태생을 가졌던 아버지를 둔 혼혈아였다- 모든 사람들은 딸아이에게 아주 경탄을 했다. 사람들은 내 앨리사에게 나라 간 우애라고 애정 어린 이름을 불렀다. 나는 딸아이가 순수한 러시아인이 아니라고 해서 결코 누구에게도 심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질문 : 당신이 학교에 다닐 때 희망들과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과 당신 친구들은 개인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예컨대, 오늘날, 해리 포터, 브리트니 스피어스, 호날두나 기타 등등처럼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꿈이 있었다. 우리는 유명한 혁명가들이나 또는 영웅들 같이 되기를 목표로 가졌다. 나는 18세 나이에 나찌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우리의 2차 대전 빨치산 영웅인 조야 코스모데미안스까야(Zoya Kosmodemianskaya)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우리는 팝 스타들과 배우 또한 좋아했지만,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들은 우리의 이상적인 영웅들이 아니었다. 어린 소녀가 다른 나라들의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서 거기에는 조로처럼, 부정의와 맞서 싸우는 영웅들이 나오지만, 내가 동경하는 영화의 영웅들은 거기에 나오는 배우가 아니었다.

 

체 게바라나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같은 혁명가들은 나의 진짜 영웅들이었다. 나는 단지 그들 같은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들처럼 영웅이 되기를 꿈꿨다.

 

 

질문 : 젊은이들은 스포츠, 패션과 음악에 특별한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학교생활과 그리고 대학 생활에서, 당신과 친구들은 스포츠, 패션과 음악 활동에 어떻게 참여를 했습니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곳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무상이었다. 고도로 높은 훈련을 받는, 올림픽 수준 훈련 또한 무상이었다. 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들은 이른바 노동과 방어를 위한 예비 전형이라고 불리는 육상, 수영, 스키 등등 특정한 스포츠 과목을 이수해야만 했다.

 

패션은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책들과 음반들을 좋아했지만, 다른 소녀들에게 패션은 중요했다. 학생들에게 금지된 유일한 것은 학생들이 아직 중등학교 과정에 있을 때에 화장을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아이에 불과했고 우리가 학교에서 무도장을 할 때를 제외하면, 학교는 아이들의 옷치장을 과시하게끔 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교 무도장을 위해서는 학생들은 화장을 하고 어떠한 멋있는 의상이라도 입을 수 있었다. 소녀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의상들을 손질할 수 있었고 우리는 또한 학교에서 적합한 바느질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이미 학교 무도장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또한 쏘비에트 음악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들로 된 나른 나라들의 최고의 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질문 : 쏘비에트 교육 체계와 직접 체험한 당신의 대학 생활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당신에게 주어진 시설들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의 대학 교사들은 어떠했습니까?

 

쏘비에트 교육 체계는 아주 간단명료했다. 모든 사람에게 10년의 똑같은 국립 학교 과정이 있었다. 3년의 초등학교 과정과 7년의 중등학교 과정은, 그 사이에 어떠한 시험도 없었고 모든 아이들은 최소한 8학년까지 같은 학급에 머물러 있었다. 8학년이 끝난 뒤에는 4번의 시험이 있었지만, 그 시험들은 누가 더 잘하는지 그리고 누가 학교를 그만두게 될지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한 결정은 아이와 아이 부모들에게 달려 있었다.

 

어떤 아이는 학구적 관심이 없고 8학년을 마치면 무역을 배우는데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기들이 선택하는 직업학교 과정 내에서조차도 전체 10년 중등학교 프로그램을 이수해야만 했다.

 

몇몇 열등한 학생들은 그들의 시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10학년 말까지 학교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아무 문제가 없다. 10학년을 마치면 우리는 모두 최종 시험을 치렀다. 만일 학생이 대학에 가는 것을 선택했다면, 그 학생들에게 평균 성적은 대학 입학시험을 위해 중요했다. 전체 7년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적용됐다.

 

보통은 시험 전에 마지막 수업 종(The Last School Bell)” 파티가 있었고 시험 이후에 마지막 작별 파티가 있었다. 내 경우에 우리는 지역 놀이 공원에 갔는데, 그곳은 그 행사를 위해서 밤새 개장돼 있었고, 우리 모두 - 도시의 모든 학교에서 온 졸업 예정자 -는 그날 밤에 모든 놀이 기구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누구도 음주를 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어떠한 무질서도 없었고, 그것은 가장 인상적이었고 즐거운 밤이었다. 그 후에 학생들은 한 달의 휴식을 가졌다. 그러면 우리들 중 일부는 곧바로 일하러 가거나 일부는 학업을 계속했다.

 

(총 네 번의) 대학 입학시험 체계는 학교 프로그램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대학 수업들은 모든 학생들이 5년이었는데 (“학사석사같은 것은 없었다), 미래의 의사들에게는 6년이었다. 모든 대학 수업들은 전적으로 무료였고 우리는 심지어 국가로부터 약 40루블 정도와 몇몇 대학에서는 그 이상의 보조금을 받았으며, A학점으로 시험을 통과한 우수한 학생들은 그 시험 이후 전체 다음 학기에 그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신에게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개념을 주기 위해서, (보통 한 방에 두세 명이 거주하는) 학생 기숙사에 방이 있는 곳은 전기료와 물세와 다른 사용료와 가구, 차 주전자와 그리고 심지어 매 2주마다 우리들에게 무료로 세탁이 되고 교체되는 침구류를 포함해서 한해 전체에 24루블이 든다! 학생들 교재는 대학 도서관에서 전체 학기 동안에 완전히 무료로 그냥 빌릴 수 있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걱정 없이 제대로 공부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교수들은 우리가 학생이었을 때 거의 동료처럼 우리를 대했고, 만약 우리가 해야 할 과제를 선택하면 교수들은 이미 연구를 위한 것들을 준비하였다. 학생 생활은 실로 가장 아름다웠고 우리 삶 중에서 최고로 멋진 시기였다. 나는 집에서 3시간 거리 떨어진 모스크바에 있는 학생 기숙사에서 살았고, 그 시기에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질문 : 교육 이후 직업에 대해 당신은 어떤 종류의 태도를 가졌습니까? 그 직업은 쓸모가 있었습니까? 당신은 그 직업이 쓸모 있다고 만족했나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미래 직업이 안정된 것이었다고 알았다.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와 그녀의 학업이 끝나면 자리를 제공받게 되었고, 만일 직장이 다른 도시에 있다면, 경영자는 또한 주택을 당신에게 공급했을 것이었다. 처음으로 제공받은 자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고, 당신은 다른 일자리를 논의하거나 또는 졸업 이후에 당신을 받아들일 경영자와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유일한 조건은 당신이 할당을 받은 뒤 같은 곳에서 3년 동안 일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학 교육 5년 동안 전적으로 무상 지불에 비하면 아주 작은 대가였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실업자가 없었던 것이었고, 우리가 그 당시에 그것을 충분히 감사해하지 않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모든 초심자들의 봉급은 그들이 보내진 곳에 상관없이 대체로 같았다. 나는 고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게 아주 편안했다.

 

그러나 나는 졸업 이후 학업을 하기를 원했다. 나는 3개월 동안 일하고 나서 대학원 과정 입학시험을 위한 허가를 줄 것을 내 경영주에게 요청했고, 그는 그렇게 하도록 했다. 나는 이러한 시험들을 통과했고 두 개의 다른 대학원 자리를 선택했는데 그것들 중 하나는 내 인생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때쯤 나라는 해체하기 시작했고 나는 떠났다

 

 

질문 : 당신은 그 당시의 쏘비에트 젊은이들과 오늘날의 러시아 젊은이들의 특성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비교하나요?

 

그것을 솔직한 관점에서 보면, 그 차이는 충격적이다. 나는 자본주의의 사악한 주술 속에서 젊은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당신은 스스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 중 아주 많은 것들이 해를 끼치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인터뷰에서 쏘비에트 젊은이들이 무엇을 좋아했던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의 젊은이들과 쏘비에트의 젊은 사람들은 -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나라들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슬픈 것은 오늘날 러시아 젊은이들 다수는 오늘날의 열악한 교육과 자본주의 미디어에 세뇌당하여, 사실상 쏘련에서의 삶과 쏘비에트 가치에 관하여 실제로 더 이상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은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오늘날의 우리의 비극적 현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만간 그들 중 대다수는 우리의 쏘비에트 근원들로 가는 길을 찾고 그 답을 찾기 시작한다.

 

오늘날 사회주의와 쏘련에 대한 관심은 10년이나 심지어 5년 전 보다 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그 관심은 점점 더 빠르게 커지고 있다. 나는 다시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했던 지난 몇 년 동안에 다른 구 쏘비에트 공화국들과 몇몇 젊은 공산주의자들을 만났던 것을 정직하게 얘기할 수 있다!

 

 

질문 : 젊은 시절에 당신은 삶을 즐겼습니까? 당신과 당신 세대는 어떠한 차별 없이 공부, 여행, 음악, 파티, 운동 등을 할 기회들을 가졌습니까?

 

나는 거의 확실하게 그런 기회들을 가졌다. 어떻게! 실제로, 삶에서의 모든 길들이 우리에게 열려있었다. 나는 앞서 교육, 스포츠, 여가 생활에 대해 말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그 지역의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 때문에 쏘비에트 전체 지역을 다 방문하려면 평생이 걸릴 것이다. 기차와 비행기 표는 아주 저렴했는데 게다가 학생들과 학교 아이들은 그 가격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공공교통망 체계는 넓고 잘 발달했다.

 

보통 쏘련과 여행에 대해 언급하면,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첫 번째 반응을 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해외로 여행할 수 없었잖아요!” 이것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해외로 여행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은 길었고 사람들은 적절한 예의를 가지고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해야 하고 자긍심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약간의 면접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만약 내가 해외여행을 하는 것(자본주의 러시아에서 러시아인들의 10퍼센트 미만이 현재에 그것을 할 수 있다!)이나 무상교육, 무상 의료보험, 완전 고용, 여성을 위한 안정과 사회주의의 다른 더 많은 장점들을 즐기는 것을 선택한다면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더 오래 살면 살수록, 러시아와 서방에서의 오늘날의 현실과 내 젊은 시절을 비교하면 할수록, 나는 우리가 쏘비에트 사회주의 삶의 경험에 대한 기회를 가졌던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었는지를 더욱 더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내가 쓴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만일 내가 한 마디로 자본주의를 표현하도록 요구를 받는다면, 나는 아마도 잔인함이라는 말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쏘비에트 러시아 이후 시기와 러시아의 정신적 스승 -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게 전적으로 해당된다. 만일 내가 사회주의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도록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북돋아 주는”(inspired)라는 한 마디를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쏘비에트 시대에 우리가 다음과 같이 경험한 것이다. “매일이 아닐지언정, 적어도 아주 자주.”

 

 

질문 : 쏘비에트 사회는 젊은 여성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인격을 도야하게 했습니까? 어떠한 종류의 도덕과 사회적 윤리와 행동들이 젊은 여성들을 형성하기 위해 사용되어졌습니까?

 

쏘비에트 젊은 여성들은 자존감과 긍지를 가지도록 자랐다. 이러한 것들은 사회가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도록 한두 가지 소양이었다. 젊은 여성 대다수는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불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마약은 젊은 여성들이나 젊은 남성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십대 임신부들은 아주 드물었다. 내 세대에는 17세의 나이에서조차 여전히 키스를 하면 애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할 정도로 젊은 여성들이 너무나 순진했다. 우리는 우리들 중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종교를 믿는 사람이 없었지만, 단 한 명의 아주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자랐다.

 

우리에게는, 이것은 그저 자긍심의 문제였는데,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것에 따라 살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이것은 우리의 이상이었다. 사회는 우리를 존중해서 대우했다. 해마다 우리의 건강을 돌봤고, 학교와 직장에서는 종합적인 건강 진단을 했다(성인 남성과 여성도 다시 했다). 우리는 단지 미래의 어머니로서 뿐만이 아니라 직장과 학업에서 평등한 동료로서 간주되었다. 서방 사회는 내가 처음으로 그 사회에 맞닥뜨렸을 때 나에게 극단적인 성차별을 가했다.

 

쏘련에서 나는 소년과 소녀들 사이의 갈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쏘비에트 소년과 소녀들은 참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여전히 러시아에서 축하행사가 개최되고 있는 국제여성의날은, 서방에서의 어머니의 날과 달랐다. 국제여성의날은 우리사회에 대한 여성의 기여와 우리들의 평등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이것은 남성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서방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평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평등했지만 특별했는데, 이것이 우리의 남성들 다수가 여성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다. 쏘련에서 젊은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질문 : 오늘날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볼 때까지 오래 사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보는 것을 넘어 활발하게 사회주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것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