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쏘련은 왜 붕괴하였는가? ― 붕괴과정과 붕괴의 객관적ㆍ주관적 요인들에 관한 연구 ― 야마시다 이사오(山下勇男)(정세와 노동)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6. 6. 27. 20:07


특별기획 :

쏘련은 왜 붕괴하였는가?

붕괴과정과 붕괴의 객관적주관적 요인들에 관한 연구

 

 

 야마시다 이사오(山下勇男)

 

어떤 대상을 고찰하고 연구함에 있어 우리가 근거로 해야 할 분석 방법을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하겠다. 어떤 경우에도 그러하겠으나 대상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진실은 다 보이지는 않는다. 페로스트로이카의 발단에서부터 쏘련붕괴에 이르는 과정을, 그것의 전사를 포함하여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武井昭夫페로스트로이카와 인터내셔날리즘 진행하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의 자기쇄신」『社會評論82).

첫째, 국제적인 시점에 서는 것. 두개의 사회체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상호규정적인 관계를 포함하는 대항관계를 통해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인 시점을 잃지 않는 것. 페로스트로이카를 분석평가할 때에도 그것이 왜 필요했는가는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와 경험에 비추어 고찰되어야 한다.

셋째, 계급투쟁과 국제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 현존하는 사회주의를 평가할 때에 그것을 어떤 입장에서 보는가에 따라 결론은 180도 다르게 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입장,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입장에서 그것을 본다. 현상분석은 물론 사회주의의 전망을 고찰하는 경우에도 이런 입장이 관철되어야 한다.

 

1. 페로스트로이카 발동기의 세계정세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의 자기쇄신

 

쏘련 붕괴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붕괴를 일으킨 객관적 및 주체적 요인들 중 후자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것은 객관적 요인들을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 요인과 주체적 요인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얽혀 있고, 환언하면 피하기 어렵게 부단히 존재하는 외적 장애를 이겨내야 하는 내적 계기가 상실되어 버린 결과 쏘련은 붕괴되었으며, 체제와 운동의 내부에 있는 잘못이나 결여, 약점 등을 적출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에 더해서 게다가 주체적 요인에 관한 우리의 분석은 당장은 쏘련 및 쏘련공산당의 문제에 한정한다. 원래 우리의 기본적 입장은 쏘련 및 동구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것을, 쏘련 및 동구의 당들노동자계급만이 아니라 국제공산주의운동과 세계노동운동이 제국주의자본주의와 벌였던 투쟁에서 패배했던 귀결로서 파악해 왔다.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쳐서 중쏘공산당 간의 논쟁에서 기원하여 급기야 무력충돌을 포함한 국가 간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했던 양당양국 간의 관계는 각 나라의 공산당노동자당을 분열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평화운동이나 청년운동, 부인운동 등 광범위하게 대중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자본주의의 연명에 근거를 주고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되는 먼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초래했던 파괴적인 작용은 아직도 총괄되지도 않았고 수복되어 있지도 않다. 또 쏘련과 동구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그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감히 사상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서두가 길어졌다. 사회주의의 자기쇄신을 지향하여 페로스트로이카가 발동되었던 1985년 전후의 시기에 서로 대항관계에 있던 두개의 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각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었는가? 각각이 안고 있던 모순과 갈등이 우선 미리 밝혀져야 한다.

1차세계대전후에 사회주의와의 대항을 확인하였던 자본주의 재건의 짜임새에 본격적인 위기가 닥쳐온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로의 전락, 달러위기의 발생은 1950년대 말에 시작하여 수차례에 걸쳐 달러방어책을 책정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도 1971년의 달러-금 교환정지에 의해서 달러를 기축으로 해서 재건되어왔던 전후의 자본주의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위 IMF체제의 붕괴였다. 달러위기의 추세를 가속화시키고 급기야는 파탄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은 최대일 때 미국제국주의의 지상병력50만을 못 박게 했던 베트남인민의 항미구국민족해방투쟁이었다. 사회주의와의 대항 선상에서 공황 회피뒤로 미루어 처리하는 재정금융정책에 의해서 일정한 소득재분배를 실시하였고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을 도입하였던 자본주의는 국채의 증발에 의해서 재정적자를 팽창시켰고 경기후퇴와 인플레이션의 진행이 동거하는 업병(業病)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쳐 스테그플레이션이 출현하여 자본주의 경제를 특징짓고 있었다. 부르주아 이코노미스트들은 당시 이것을 OPEC에 의한 석유생산의 제한, 석유가격의 대폭적인 인상, 소위 석유쇼크(1971)로 귀착시키는 OPEC 주범설을 주창하였으나, 자본주의 세계를 덮쳤던 1974-75년의 공황은 사회주의와의 대항으로 규정되는 전후 자본주의 재건의 짜임새를 파탄시킨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었다. 그것은 5년 내지 10년을 주기로 하는 순환성의 공황과는 달리 케인즈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 공황을 뒤로 미루어 처리하는 정책에 의한 자본의 과잉축적, 재정 파탄에서 보이는 구조적인 요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2차 대전 후의, 특히 1960년대를 정점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자본의 고축적)은 종말을 고했으며 저성장(자본축적의 곤란의 증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재기를 시도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려고 결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반격은 세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ME(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 기술 혁신을 생산과정에 적용하는 것에 의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따라서 노동생산성의 비약적인 향상, 그리하여 또 노동과정에서의 노동조합의 영향력의 축소, 그런 것들의 결과로서 이윤율의 회복과 사회주의에 대한 우위의 확립. 둘째로 자본의 이윤을 계속 침식해가고 있는 노동계급의 공세에 대한 반격과 노동조합의 전투력 파괴, 따라서 임금이나 사회보장제도 등 노동자계급에 대한 양보에 의해서 잃었던 진지의 탈환, 그리하여 또 노자 간의 힘 관계에서의 자본의 우위, 즉 자본축적조건의 재형성재확립(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두에 걸쳐서 성립하였던 3개의 정권, 대처, 레이건, 나까소네가 맨 먼저 착수하였던 정책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셋째, 사회주의 세계체제와의 강제된 평화공존으로부터 이탈하고 쏘련을 바로 정복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서 초군비확장 정책 개시, 즉 쏘련을 군비확장 경쟁으로 끌어들이고 경제적으로 피폐시키고 최종적으로는 그 붕괴까지도 목표로 했던 반혁명전략의 발동이 그것이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중쏘 간의 대립으로 이분화되었고 통일적인 반격의 태세를 갖추지 못하는 한편, 제국주의 진영은 1975년에 제1회 선진국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제국주의 국가 간의 이해 조정을 본격화하였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이 분열하고 있어 통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약점에 더하여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부에서는 위에서 열거했던 첫째, 둘째로서 특징지워진 새로운 자본공세와의 투쟁에서의 노동운동의 패배와 후퇴가 사회주의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체제붕괴에 이르는 객관적 토양이 형성되었다. 쏘련은 결코 사회주의에 내재하는 약점 때문에, 단지 그것만의 요인으로 붕괴되었던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패배, 노동운동의 역사적 후퇴가 쏘련의 붕괴를 객관적으로 준비하였다.

 

사회주의 쏘련은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다른 한편 페로스트로이카 발동기의 쏘련경제는 불가피하게 경기 변환 사이클을 그리는 자본주의 경제와는 달리 완만한 감속경향을 보이면서도 안정적으로 추이하고 있었다. 보일 R. 그레고리/로버트 C. 스튜어트의 ?쏘련경제-구조와 전망-? (동경 교육사 1987)으로부터 두 종류의 지표를 발췌한다. 1950년대의 전반기로부터 페로스트로이카가 발동되기 전까지를 두루 살펴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경제성장률이 감속하는 경향이다. 이 수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자본주의 경제를 74~75년 공황이 덥쳐 왔고 주요 나라들이 잇따라 마이너스 성장으로 빠져들었으며 그 이후에도 단기 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던 데에 반해서 쏘련경제는 그런 여파를 받지 않았고 3% 정도의 성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던 것. 후르시쵸프가 눈부시게 미국을 따라잡자”,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슬로건을 내걸었던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전반기에 걸친 경제성장률은 5% 전후에 있고 후루시쵸프 이후의 시대는 이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 이것이다.

                     후르시쵸프 시대의 집계적 경제 실적

 

연평균 성장율

1951-1955

1956-1960

1961-1965

국민생산물

5.5

5.9

5.0

공 업

10.2

8.3

6.6

농 업

3.5

4.2

2.8

서 비 스

1.9

3.5

4.4

소 비

4.9

5.7

3.7

투 자

12.4

10.5

7.6

출처: U.S. Congress, Joint Economic Comittee

USSR: Mearsures of Economic Growth and Development 1950-80  


(Washington,D.C.: U.S.Governmemnt Printing Office,1982)


후르시쵸프 이후의 집계적 경제 실적

 

연평균 성장율

1966-1970

1971-1975

1976-1980

1981-1982

1984

국민생산물

5.2

3.7

2.7

2.1

2.6

공 업

6.3

5.9

3.4

2.4

4.2

농 업

3.5

-2.3

0.3

1.8

0.0

서 비 스

4.2

3.4

2.8

 

 

소 비

5.3

3.6

2.6

1.8

4.3

투 자

6.0

5.4

4.3

3.2

2.0

a, 1983년에 대한 퍼센트로 표시되었던 1984년의 쏘련 공표통계

b, 쏘련국민소득

c, 소비재생산

출처: U.S. Congress, Joint Economic Comittee,

USSR: Mearsures of Economic Growth and Development 1950-80 (Washington,D.C.: U.S.Governmemnt Printing Office,1982) ; Handbook of Economic Stastistics(Washington,D.C : Directorate of Intelligence, 1983), 63: "The Report on 1984 Plan Fulfillment" Current Digest of The Soviet Press Ⅹ Ⅹ Ⅹ ⅩⅡ.4(1985).10.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를 경제 성장률이라는 단 하나의 지표를 가지고 대비해 보았다. 실제 전제 조건을 사상해버린 이런 대비가 지닌 타당성은 당연히 재음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80년대에 들어서면 미국 레이건 정권이 군사 면에서 벌이는 대소 강경책이 전개되었고, 군축으로의 길을 만들기 위한 현명한 외교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지출의 부담은 쏘련 경제의 무거운 족쇄가 되어버렸다. 군수생산은 생활수단으로서는 물론 생산수단으로서도 아무 쓸모가 없는 사회적 공비이다. 자본주의에서 군수 생산은 군수산업에게 이익을 주고 자본축적의 근거이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커다란 손해이고 질곡으로 된다. 쏘련경제는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 대한 지원을 한 몸에 떠맡고 있었고, 또 부득이하게 군수지출을 확대하는 이중의 부담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쏘련 경제의 실적이 5개년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에 들어섰을 때부터였다. 미국 공산당기관지 ?Daily World? (현재 ?People's Weekly World?)의 특파원으로 2번 모스크바에서 주재하였던 마이크 데이비도우(MIKE DAVIDOW, 지금은 고인)는 그의 저서 ?페로스트로이카 고양과 좌절 ―?(PERESTROIKA: Its Rise and Fall)에서 취재활동을 다니게 되었던 두 시기를 비교하고 있다. 1기는 1969년부터 74년까지로 완만하기는 하였으나 착실한 개선이 보였던 시기이고 제2기는 1982년 이후의 시기로, 노동규율이 이완되어 가고 정체가 농후하게 보였던 시기이다. 1기는 196299일의 리베르만 논문계획, 이윤 및 보너스가 쏘련공산당기관지 ?프다우다?에 게재되었고 이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이 벌여졌던 것, 시행착오를 거쳐서 1965년부터 실시되었던 소위 코스이긴 개혁이 개시되었던 후의 시기에 해당한다. 쏘련의 제2차 대전 후의 경제개혁의 진행에 대해서 상술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생략할 수밖에 없으나 앞에서 게재했던 두 종류의 경제지표는 후르시쵸프 이래의 경제개혁이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페로스트로이카 발동기에는 쏘련은 급기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곤란과 만나게 된다. 74~75년 공황 후의 위기로부터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던 제국주의진영과 대립하면서 안으로는 경제사회의 정체상황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긴박한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사회주의의 자기쇄신으로서의 페로스트로이카는 그것을 누가 담당하든 간에 쏘련 사회주의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페로스트로이카는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던 안드로포프 정권(1982~84)에 의해서 그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19853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취임, 그 다음 달인 4월의 당 중앙위원 총회를 기점으로 해서 본격화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취임당초부터 쏘련의 붕괴를 기도하여 왔던 확신범의 배반자였는가? 아니면 후르시쵸프 이래의 개혁들의 성과와 결여 주로 결여 가 충분히 총괄되지 못하고 그 약점을 계속 안은 채로 과거의 경험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결과 결국 뜻에 반하여 붕괴를 막을 수 없었던가? 평가는 나누어졌으나 우리는 후자라 본다. 고르바초프는 쏘련 붕괴 후에 자신은 원래 사회민주주의자였다, 쏘련을 붕괴시킨 것은 옳았다는 입장에서 자기정당화의 논진을 펴기도 했다고 하지만, 고르바초프에게 제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하여도 책임을 그 혼자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유로 코뮤니즘으로 상징되는 국제공산주의운동 내에 발생했던 사회 민주주의적 조류의 영향이 유럽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동구나 쏘련에도 침투해 들어갔고 이데올로기투쟁의 관제고지(管制高地)기 붕괴되어 갔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다.

이리하여 페로스트로이카는 첫째, 쏘련 사회주의가 그 발전 도상에서 해결해야 할 내부개혁으로서 둘째,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심화로의 사회주의 측의 대응으로서 발동시켜졌다. 게다가 그것은 지금까지도 개혁은 말해져왔으나 관철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코 중도에서 좌절시켜서는 안 되었던” (고르바쵸프 발언, 사상운동시리즈 제21987) 긴급성을 가지고 발동되었다.

 

 

2. 페로스트로이카의 전개과정

발단에서 쏘련붕괴에 이르기까지, 변질과정에 관한 소묘

 

페로스트로이카의 전개과정은 1985년에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취임했던 그 다음 달인 4월에 페로스트로이카를 선언했던 당중앙위원회총회부터 19886월 제19회 전국협의회까지의 제1, 199112월 쏘련 붕괴까지의 제2기로 나누어 질 수 있다. 1기는 더욱이 19862월의 제27회 당 대회를 사이에 두고서 전후로 구분될 수도 있다 (武井昭夫 페로스트로이카와 인터내셔날리즘 진행하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의 자기쇄신」 ?社會評論?82). 또한 쏘련 붕괴 후 러시아 최고쏘비에트가 러시아군에 의해서 포격 당했고 방위전 끝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던 199310월까지를 분석의 대상으로 한다면, 이것이 제3기를 구성한다 (L.콘라포프 러시아반혁명의 추면」 ?사회주의과학연구? 11994년 봄호 국제관계연구소). 그러나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페로스트로이카의 전개과정을 간단히 소묘하려는 것이므로 시대구분방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겠다.

 

외형적인 조방적 확대에서 내포적인 집약적 발전으로

페로스트로이카의 출발점에서 주된 정책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경제 발전의 가속화(우스까레에니에)이고, 또 하나는 제국주의 진영이 수작을 걸어 추진하고 있던 군비확장 경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평화정책의 전개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후자를 전자와의 관계에서 언급하는 데에 그치겠다.

경제발전의 가속화는 노동력과 자원을 대량으로 투자하는 경제의 외연적 조방적 확대로부터 과학-기술의 연구개발과 그 응용을 지렛대로 하는 노동절약적인 투자의 촉진(자본주의에 비추어 말하면 자본의 유기성 구성의 고도화”)에 의해서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지향하는 내포적 집약적 발전으로의 전환으로 정식화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생산부문으로의 중점적 투자가 계획되었다(맑스가 ?자본론? 2권 제3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확대재생산은 생활수단의 생산부문에 대해서 생산수단의 생산부문의 보다 급속한 확대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경우, 노동력의 수급관계가 핍박하고 노임이 등귀하였던 70년대 말, 자본은 가정 안의 주부층을 파트타임으로 노동시장으로 끌어냄으로써 이런 것에 대처했다. 쏘련의 경우는 여성해방의 대원칙과 더불어 성인남자노동력을 제2차세계대전에서 대량으로 잃었기 때문에 여성의 취업률은 아주 높았으며, 따라서 추가노동력을 확보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미 기술했듯이 쏘련은 기술혁신과 그 성과를 노동과정에 결합시키는 긴박한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제약이 발생했다. 조금 일찍 ME기술을 실용화했던 자본주의에 비해 쏘련은 뒤떨어졌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신기술의 도입은 COCOM(대공산권수출통제조정위원회)의 규제와 제국주의의 대소 강경책이 동시에 작동되어 바람처럼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속화 전략은 얼마 안 가서 속도를 잃어버렸다. 불행하게도 농업생산이 거듭 떨어졌고, 식량부족이 노정되었다. 당면의 필요에 끌려서 중점을 생활수단의 생산부문으로 돌려야 하는 새로운 조치가 강구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페로스트로이카 전반에 공통하고 있는 체계성의 결여, 일관성 없음이었다. 페로스트로이카가 개시되자마자 당과 정부의 호소로 시작되었고 결국 실패로 끝나버렸던 알콜 중독 근절캠페인(19855폭음과의 투쟁 강화에 대한 간부회령), 절주를 촉진하기 위한 주류가격의 대폭적인 인상(19868) 등을 보면, 임시변통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페로스트로이카에서의 체계성의 결여, 일관성이 없음은 과거에 몇 번 시도되었던 경제개혁이 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는가가 충분히 총괄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27차 당 대회(19862)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강조와 함께 페로스트로이카의 그 후의 전개를 크게 좌우하게 되었던 공개성”(글라스노스트)을 내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미디어를 통해서 여론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전화한 것은 제27차 당 대회 이후이다. 미디어 관계자들과 회동을 갖는다든지, 혹은 미디어관계자들에게 당의 견해를 표명한다든가 할 기회가 부쩍 증가하게 되었다. 고르바쵸프는 미디어를 통해서 대중의식을 유도조작하는 방법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글라스노스트는 미디어가 당의 노선으로부터 벗어나서 독자적인 길을 시작하고 페로스트로이카의 방향을 왜곡하려고 하는 반사회주의 세력에게 알맞은 무기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페로스트로이카는, 그것을 추진하였던 당의 지도자들에게 있어 시종 위로부터의 개혁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최초의 발동부터 여론유도의 지렛대로 사용되었고 결국은 빗나가게 되었던 글라스노스트를 거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의한 순식간의 권력 장악(후술하겠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밑으로부터, 결국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이어야 할 노동자농민병사를 결집하는 구상력을 전혀 갖지 못하였다. 아니 구상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단의 당 조직은 그 시기에 이미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

경제 가속화에서의 차질은 그 주된 요인을 정치체제의 결여에서 구하는 방향에 길을 열었다. 1987년 당중앙위원회 1월 총회는 복수정당제를 포함하는 정치개혁의 추진을 결정하였다. 페로스트로이카는 경제개혁에서 출발하여 정치개혁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러할 때 마침 19871110월 사회주의혁명 70주년 기념집회에서 연설하였던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쏘련사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내세움과 동시에 스탈린 개인숭배와 행정적 지령적 지도방법을 새삼스럽게 비난하였다.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를 암흑 속으로 덮어 감추고 사회주의를 열등시, 자본주의를 미화하는 청산주의적 역사관이 횡행하는 기초가 이렇게 해서 다져졌다.

운동의 역사에는 새로운 조건의 출현에 대응하여 방침을 크게 전환해야 할 때가 있다. 과거의 경험은 점검이나 재검토를 강요받게 된다. 그런 것이 기회가 되어 여러 가지 견해가 표출되고 그들 사이에 대립논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는 진자가 극단적으로 반대방향으로 흔들리듯이 과거의 방침이나 지도방법을 전부 부정하는 청산주의적 견해가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표면에 등장하게 된다. 그런 것을 극복하는 일에 실패하게 되면, 파괴적인 작용을 일으키게 되기도 한다. 사회주의 쇄신의 괘도를 벗어나 반혁명으로 전락해가는 페로스트로이카의 변질과정은 시류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풍조가 넓어지는 와중에 쏘련공산당이 청산주의와의 투쟁, 그것의 극복에 실패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새로운 사고” (전인류적 가치론)의 등장


페로스트로이카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19886월 쏘련공산당 제19회 전국협의회의 개최였다. “정치개혁의 추진이 거듭 결의되었고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관제고지를 폐기하는 새로운 (정치)사고가 표어로 등장하였다. 고르바쵸프 서가장의 보고쏘련공산당제27회대회의 결정의 수행상황과 페로스트로이카를 심화할 과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핵 위협의 증대나 다른 글로벌한 문제들의 첨예화, 세계, 그 모든 모순 속에서 점점 일체화해가고 상호 의존하는 세계의 모든 프로세스의 국제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의 입장으로부터 우리는 맑스주의 속에 처음부터 있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익과 전인류의 이익 간의 상관이라는 사상을 보다 깊게 고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현대에 있어서는 전 인류적 가치가 우선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여기에 새로운 정치사상의 핵심이 있다” (?쏘련공산당제19회전국협의회-자료집?도요쿄, 貿易協會, 19891)

이리하여 체제 간의 대립공존을 기본으로 하는 세계구조인식을 뒤집어엎는 세계 공동체개념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독점자본주의는 현대자본주의에 적합한 형태이다라고 하는 기본적 자본주의관의 수정을 수반하였다. 외교노선은 미쏘 협조를 기조로 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쏘련 공산당에 수정주의가 대두한 것은 페로스트로이카가 개시된 후 갑자기 출현하여 왔던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부식 과정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직접적인 영향이나 유로코뮤니즘의 침수 등을 매개로 해서 종종 진행되어 왔다.

19회 전국협의회를 전후해서 연방구성각공화국과 자치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의 요구, 주권선언이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데모나 폭력이 발트3국을 필두로 해서 각지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러시아주의와 반러시아주의 간의 반목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갔고 쏘련은 끝을 모르는 민족분쟁의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반사회주의친자본주의의 기치를 선명하게 내세웠던 정치세력들이 계속 끊이지 않고 자기 이름을 대면서 복수후보제를 지렛대로 해서 공화국과 자치공화국에서의 정권탈취가 계속 되었다. 쏘련의 국가와 당은 브레이크가 풀린 차가 비탈길을 내달리듯이 파국을 향해 돌진해갔다.

사회주의를 쇄신하기 위한 경제개혁은 자본주의화로 길을 터주는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급속하게 변질되어 갔다. 제국주의 진영으로부터 보내어졌던 부르주아경제학자와 쏘련 경제학자가 공동의 프로젝트를 조직했던 반혁명의 시나리오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일례를 든다면, 쏘련 대통령부 사회경제발전분석정치예측부A. 미뤼코프를 단장으로 하는 쏘련의 포괄적인 경제조사단이 198911월과 19904월의 두 번,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자민당간사장)의 주선으로 일본을 방문하였고 그 보고서가 ?일본경제에서 배운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연표적으로 회고해보면, “시장경제의 도입을 둘러싼 상극이 당 및 정부 내에서 표면화되었던 것은 19909월 이후이고 점진적인 이행을 설파했던 루이치코프(수상) 안과 급진적인 이행을 주장하였던 샤탈린 안이 서로 대항하여 싸웠다.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가 9월에 중앙의 당사자들을 제치고 샤탈린 안 ?500일 동안의 시장경제이행계획? (야블린스킨페도로프샤탈린 외 저, ?쏘련의 시장경제로의 이행?, 한종만 옮김, 열린책들, 1991년 참고)의 도입을 단독 결정하였던 것을 돌파구로 해서 그 다음달 10월에는 쏘련최고회의가 양쪽 안을 절충하였던 국민경제안정화와 시장경제이행의 기본방침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서는 짧은 머리말 뒤에 “1. 선택은 이루어지고 있다를 배치하고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대신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계적인 경험은 시장경제의 생명력과 효율성을 증명하였다. 우리 사회에서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은 인간의 이해에 의해서 완전히 운명지워져 있으며 그 목적은 사회적으로 방향 잡혀져 있는 경제를 창출하는 것, 생산 전체를 소비자의 필요에 따르게 하는 것, 부족과 줄서기의 불명예를 극복하는 것, 실제로 시장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 노동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창조성, 이니셔티브, 높은 생산성을 장려하기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것이다” (일본공산당중앙위원회출판국발행 ?세계정치? 9012월 상순호). 사회주의의 폐기, 자본주의로의 굴복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페로스트로이카의 전개과정을 소묘한다고 말해놓고서는 지면을 대폭 초과해버렸다. 쏘련 붕괴에 이르는 과정에는 훨씬 중요한 절목(節目)이 되었던 중요한 사태사건이 있으나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고서 기를 말게 되지만 이하의 전개를 고려하여 할애해둘 수밖에 없다.

 

 

3. 쏘련사회주의체제붕괴의 원인과 교훈

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 B. 아자드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사회주의 국가 쏘련을 해체시킨 요인들-에 관한 평

 

쏘련의 와해, 반혁명의 승리를 위한 방아쇠를 당겼던 19918월 사건을 향하여 사태는 급진전 되어가고 있었다.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공동체(CIS)를 창설하는 신연방조약의 체결을 저지하려고 야나에프 부통령 등 8명이 연명으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설치를 선언하였던 것이 819. 권력 장악에 성공하였다고 보았던 것도 잠깐 동안, 엘친 부류의 반혁명 ()쿠테타를 만나 어이없이 항복, 문자 그대로 3일천하로 끝나버렸다(이 항에 대해서는 武井昭夫 사회주의 쏘련의 운명 위기에 들어선 국가와 당본지 84호 참조).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지령에 의한 쏘련 공산당 해산 (같은 달 즉 8), 연방해체CIS발족(12)을 저지할 힘은 이 때 쏘련 공산당으로부터 급기야 소진되어 있었다. 69년에 이르는 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싱겁게 막을 내렸다.

쏘련붕괴의 원인을 생각하는 경우, 그 가까운 원인, 즉 첫째, 페로스트로이카의 추진 와중에 노정되었던 개혁이론의 불비약점이 들추어짐과 아울러 그 먼 원인, 즉 둘째로, 페로스트로이카 발동이전에 그 해결에 실패했던 마이너스의 유산(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발생했던 각종 왜곡), 셋째로 세계 노동운동이나 평화운동,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쏘련의 사회주의건설에 미쳤던 부정적인 영향 등이 쏘련의 내외정책의 전개와 관련시켜져 밝혀져야 한다. 쏘련 붕괴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중첩되어진 결과이며 단 하나의 원인으로 해소될 수 없다. 여기에서는 지면이 허락하는 한에서 제2의 논점을 다루려고 한다.

 

전시체제로부터 평화적 조건하에서의 사회주의 건설로


쏘련 공산당=공산주의당들의 동맹 셰닌 의장은 쏘련붕괴를 다음과 같이 총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세계의 발전에 대응하였던 공산주의 운동과 그 조직체제의 쇄신강화에 있어 내세웠던 방침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보아 충분히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잘못된 요소도 포함되어 있어 특히 당 건설과 국내 정책의 측면은 커다란 결여를 지니고 있었다. 결여는 이전의 그것보다 큰 것이었고, 그것은 브레지네프 시대를 걸쳐서 확대되어 왔다. 특히 국민 경제의 지침에서 노선이 동요하였고 때로는 비관주의적인 것으로 편승된다든지 자의적으로 된다든지 하여 그러한 오류를 좀체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오류가 당에 만연되어 있던 관료주의와 결합되어 국민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의욕을 소진시키는 곤란이 생겼다. 더더구나 특히 당과 국가의 간부요직의 계급적 태도자질에 대한 심사가 그 엄격함을 상실하였고 그로부터 여러 가지 부패가 생겨났다(武井昭夫 거대한 성과와 통한의 패배로부터 학습해야 할 것 러시아 10월사회주의대혁명80주년을 즈음하여본지 111).

셰닌은 주된 문제를 제2차세계대전후에서 찾고 있다. 문제를 이렇게 제2차세계대전후로 한정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입장을 기술하겠다. 노도의 기세로 전후 부흥이 이루어진 후, 스탈린서기장의 서거(1953)를 거쳐 쏘련 공산당의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으로 되었던 제20회당대회(1956) 이후, 쏘련의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로운 조건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 쏘련이 살아남기 위해 믿고 의지할 곳이었던 유럽혁명 그 중에서도 독일혁명 에 대한 희망이 최종적으로 끊어졌고 끊임없는 외세의 위협과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사회주의를 일국적으로 건설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 위로부터의 자주 강제를 수반하는 행정적 지령에 의거하는 대중동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러한 일이 가능하였던 환언하면 당국가와 대중이 일체화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하였던 시대가 지나가버렸을 때, 쏘련은 그때까지의 사회주의 건설 방식으로부터 탈피전환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쏘련 공산당은 이 시기 노동대중의 자발성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지도방법으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가, 이룰 수 없는가? 당시로는 부득이 한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스탈린 시대에 누적해 왔던 마이너스의 유산을 청산극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급히 이하의 것을 기술해두어야 한다. 191710월 사회주의혁명에 승리한 후에, 제국주의에 의한 간섭 전쟁과 국내 반혁명세력들로부터 혁명을 방위하기 위해 채택되었던 전시공산주의의 시기(1918~21), 교전국들과의 강화를 거쳐 피폐된 경제의 재건을 사회주의로부터의 일시적 후퇴, 자본주의의 부분적인 부활에 의해서 성취하려고 했던 신경제정책(NEP)”의 도입(1921),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가 끝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유럽정세를 배경으로 하는 공업화논쟁의 전개와 사회주의공업화로의 전환(1928), 200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나치 독일로부터 조국을 사수했던 영웅적인 투쟁 어느 시기를 보아도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전개는 끊임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수미일관되게 건설할 수 있다 라고 하는 모범답안이나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맑스엥겔스가 다듬어놓았던 사회주의 원칙들을 현실에 적용하고 실현할 과제는 최초로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인미답의 창조적인 사업에 맡겨졌다. 10월 혁명이 승리하고 4년이 지난 1921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쏘비에트 체제를 우리가 건설할 때의 실패나 오류에 대해서 빈사상태에 있는 부르주아지나 남이 탄 말 뒤에나 타는 그런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파의 개나 돼지들이 악의, 잡언, 조소를 마음껏 퍼부어대고 있으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어도 된다. 우리가 실패나 오류를 실제로 많이 범하고 있고 지금도 많이 범하고 있음을 우리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 일찍이 없었던 모양의 국가기구를 만들어 낸다는, 새로운, 세계사 전체에서 전혀 새로운 일을 하는데, 실패나 오류를 범하지 않고 추진해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쏘비에트적 원칙들을 생활에 적용하는 그것은 아직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일을 개선하기 위해서 꾸준히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쏘비에트 국가의 건설을 비롯하여 그것에 의해서 세계사의 새 시대, 새로운 계급의 지배의 시대를 여는 행운을 입는 운명을 걸머지고 있음을 우리는 자랑할 권리가 있으며 또 그것을 명예로 삼고 있다” (10월혁명4주년을 맞이하여레닌전집 제33).

 

의식적 사상적 계기를 결여한 경제개혁의 한계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셰닌이 제기하고 우리가 인식하는 위의 관점에 서면, 재검토해야 할 것은 후르시쵸프 이후의 시대이다. 20회당대회의 특별보고로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던 후르시쵸프의 스탈린비판은 당과 국가의 권력을 스탈린 개인에게 집중시켰던 일, 당내민주주의를 유린하였던 일, 반대자들을 체포추방처형하였던 일 등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그 사정들을 폭로하였다. 원인과 책임의 추궁은 스탈린 개인 자질문제로 환원왜소화시켰다. 스탈린에 의해 통솔되었던 쏘련 공산당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코뮨테른)의 지도적 지위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동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스탈린비판과 같은 중대사가 우당을 배제하고서 사전에도 사후에도 일체의 연락상담도 없는 상태로 이루어진 것 자체가 운동을 근본으로부터 파괴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미국을 따라잡자를 표어를 내걸고 공산주의 사회를 전면적으로 건설한다 라는, 현실에서 벗어난 주관적 의도에 기초하였던 후르시쵸프 노선은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지상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은 앞에서 살펴 본대로 연 5%전후였으며 목표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것인가? 196299일에 ?프라우다? 지상에 발표되었던 리베르만 논문계획, 이윤 및 보너스는 기업의 업적평가 지표를 제품산출고로부터 잉여생산물의 산출비율(자본주의의 이윤율에 해당되며 종업원에게는 업적에 따라 보너스가 지불된다)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후에 리베르만 방식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던 새로운 제안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일련의 논쟁과 실험을 걸쳐 개선되었고 1965년부터는 소위 코스이긴 개혁으로서 실행에 옮겨졌다.

리베르만 방식은 기업 및 종업원의 물질적 동기유발에 의해서 생산력을 증강시키는 일에 목표를 두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는 이윤개념은 그 위치 지움에서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론적으로 불명확하게 해둔 상태로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으로서의 이윤율을 사회주의 경제에 도입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원칙에 저촉될 위험을 안고 있다.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서는 다른 요인들, 예를 들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제나 목적의식적인 투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재생산되고 있는 관료주의를 극복해야 할 과제, 노동자계급를 정치적 사상적으로 조직해야 할 과제 등이 있고 그를 위한 이데올로기 활동을 개선하고 강화하는 일과 결합하여 경제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함은 분명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세 가지 주요한 문제가 제출된다. 첫째,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물질적 자극을 활용하는 문제. 둘째로, 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셋째로 혁명의 추진력으로서의 당의 존재방식.

물질적 자극을 활용하는 문제는 느슨해진 노동규율을 다시 세울 필요에서 안드로포프 개혁의 시기에, 또 페로스트로이카 시기에도 거듭 제기되었다. 후르시쵸프 시대에는 노동자의 구매력을 높이고 노동의욕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임금인상과 동시에 임금의 평준화가 이루어졌다. 안드로포프 개혁에서는 임금의 기계적인 평준화가 노동규율의 느슨함을 초래하였다고 하는 반성에서 차별적인 임금제도의 부활이 강조되었고 페로스트로이카에서도 이 명제가 다시 상정되었다.

19회 전국협의회에서의 고르바쵸프의 보고는 이런 점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노골적이든 암암리하게든 모든 형태의 식객근성이나 제대로 일하지도 않고서 유복하게 살려고 하는 상황을 방치해둘 수 없다. (중략) 일률적 평등주의는 우리의 심리와 경제에 실로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문으로부터 밖으로 몰아내면, 이번에는 창으로 들어가는 형편이다. / 우리는 임금의 개혁 과정에서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조건으로 옮겨진 노동집단에서는 노동생산성이 상승하고 임금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일률적인 평등주의는 퇴치되고 있지 않다. 기업은 우수한 일꾼들에게 그에 상당한 보수를 지급하고 태만한 자나 불량상품을 만든다든지 빈둥빈둥 거린다든지 하는 그런 친구들의 임금을 인하하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권리를 조심조심해서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도록 한다 라는 원칙으로 행사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그만큼 깊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이어야 할 노동자계급이 오로지 물질적 자극에 끌려서 노동의욕을 높이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존재라고 한다면, 도대체 자본주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 우리의 경험으로 보면, 자본주의 기업의 노무정책은 물질적 자극의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입안되고 있다. 자본주의 기업의 노무정책은 노동자에게 노동생산과정의 의사(擬似)적 주체로서의 관념 착각환상 을 불어 넣는 일에 아주 부심해왔다.

우리가 상상하듯이 쏘련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이어야 할 노동자계급이 객체로서 결국 사회주의의 제도적 수익자라는 지위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는가? 마이크 데이비도우는 두 번째의 모스크바 체류에서 관찰하였던 노동규율의 느슨함 속에서 행정적 지령적 지도방법에 억매여(억매여져서) 무기력화되어(무기력화시켜져) 버린 노동자상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였다. 19918월부터 12월까지 쏘련붕괴가 막 시작되고 있을 그 때에 노동자대중은 사회주의 방위를 위해서 결국 일어서지 않았다(당은 노동자 대중을 사회주의 방위를 위해서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라는 사실은 쏘련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사실상의 해체상황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해에 걸친 숙폐 관료주의와의 투쟁의 실패

이 문제와 관련해서 B. 아자드의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사회주의국가 쏘련을 해체시킨 요인들 ―?에 대해서 한 마디 해두겠다. 아자드의 저서는 우수한 연구서이기는 하지만 약점도 지니고 있다. 경제과정을 중심으로 해서 분석이 이루어져서 정치과정에 관한 분석은 거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아자드는 연구생이고 공부도 잘 되어 있음은 확실하나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의 실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여 붕괴의 원인을 탐구하는 작업을 유감스럽게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작업은 일차적으로 러시아의 공산주의자가 담당해야 할 것이며, 외부관찰자의 눈에는 자연히 한계가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말하자면, 아자드는 기계적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나머지, 물질적 자극만능론이라고도 해야 할 입장으로 경도되고 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적어도 그렇게 비친다. 아자드에 의하면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사회적 펀드를 확충함으로써 노동자의 생활이 임금에 의존하는 정도의 저하로서 실현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물질적 동기부여, 즉 차별적인 임금정책이 의식적 계통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물질적인 자극이 없어도 노동하는 인간으로 성립되는 사회이어야 하는데, 새로운 사회의 담당자인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어떻게 준비되는가? (“노동은 (중략) 모든 사회형태로부터 독립된, 인간의 한 실존조건이자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그런 까닭에 인간적 생활을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필연성이다.” 맑스 자본론1). 과도기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물질적 자극 만능론과 그 뒷면인 기계적 평등주의가 함께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노동자의 당연한 모습으로서는 이기적인 손익계산으로부터가 아니라 사회 성원의 공동 이익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기대된다.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의식개혁, 사상형성의 과제가 아자드의 관점에서 싹 빠져 있다.

물질적 자극으로 편중된 경제개혁의 약점은 관료주의의 극복 문제와 모순된 관계에 있다. 쏘련 공산당의 대회에서는 매회 반드시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 관료주의와의 투쟁의 중요성이 거듭해서 강조되어 왔다. 데이터가 있지는 않지만, 관료기구의 비대화와 사회에 폭넓게 뿌리내리고 있는 관료주의는 쏘련 사회주의가 제거해야 할 최대의 폐해였다. 여기에서도 아자드의 고찰이 중요한 시사를 주고 있다. 아자드는 당과 국가의 기능책임의 한계선이 애매한 점을 제국주의 포위 아래의 사회주의 건설기(1918~45)중요한 부작용으로 들고 있다. 국가기구와 그 담당자인 관료기구의 주요한 임무와 관심사는 현존하는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 게다가 관료조직에는 노동자계급의 장기적 이익과는 거리가 먼 특정한 이해관계를 독자적으로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은 국가기구를 감독하고 또 필요한 투쟁을 조직할 임무를 져야 한다. 당과 국가는 그 성격과 역할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며, 국가가 항상 현상유지적인 데에 반해서 당은 현상을 부단히 부정하고 변혁해가면서 노동자계급을 공산주의 사회 건설의 선봉에 서서 이끌어가는 안내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쏘련에서는 당이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했던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국가와 유착일체화되어 있었다. 지방의 당 조직과 지방의 정부 조직, 공장의 당 조직과 공장의 관리 조직 사이에도 똑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당의 기능이 국가 기능 속으로 해소해 들어가버린 결과, 당의 노동자계급으로부터의 유리, 노동자계급의 당으로부터의 이탈이 생겨나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고 노동자계급의 권력기구이어야 할 쏘비에트도 현저하게 형해화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중앙지도부는 그런 폐해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1988년 중앙위원회 5월 총회가 채택했던 당 협의회를 위한 중앙위원회의 테제당기관이 쏘비에트 그밖의 국가기구를 대신하고 경제행정관리의 당면 과제를 직접 해결하는 일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의 기본적인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많은 사회발전문제가 생겨났다” (전갈 ?쏘련공산당제19회전국협의회 자료집?, 도요쿄, 貿易協會, 19891)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폐해를 제거하는 유효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로 시간과의 경쟁에서 시류(時流)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쏘련공산당의 당원 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음과 같은 추이를 보여주었다. 17회 당대회 때(1952) 600만 명20회 당 대회 때(1956) 680만 명21회 임시 당 대회 때(1959) 762만 명22회 당대회 때(1961) 970만 명23회 당대회 때(1966) 1167만 명 24회 당 대회 때(1971) 1380만 명25회 당대회 때(1976) 1570만 명. 25회 당대회는 10회 당 대회의 2.6배가 되었다. 쏘련 공산당은 레닌의 유훈 적대계급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때에는 입당자격을 느슨하게 하고(왜냐하면 공산당원은 아주 위험한 임무를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반대로 엄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출세주의자들이 당내로 잠입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에 반하여 자리가 넘쳐나는 팽창을 계속해왔다. 셰닌의 인용으로부터 살펴보여지듯이 입당의 자격심사는 그 엄격함을 잃어버렸고 때문에 당은 출세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온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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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 90주년을 맞이한다. 그리스 공산당 등의 이니셔티브로 19995월에 제1회가 아테네에서 개최되었고 그 이래 계속해서 개최되어오고 있는 공산당노동자당국제회의(아테네회의)는 금년에는 114~5일 벨로루시공화국 수도 민스크에서 국제회의가, 6~7일에는 모스크바에서 기념행사가 계획되어 있다.

우리는 이상의 연구에서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망각되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매장되어버리는 지배적인 풍조에 대해서 우리의 역사인식을 분명히 하였다. 쏘련 및 동구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이 체제에 어떤 결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존재하였음의 의의를 역설적으로 부상시켜주었다. 자본의 본성과 운동에 대한 억제의 길을 잃어버린 세계 노동자인민은 지금 19세기로의 역행을 생각게 하는 야만적인 착취와 수탈에 시름하고 있다.

사회주의 세계체제는 차질(蹉跌)을 부득이 초래하였으나, 현대세계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로 파악하는 우리의 시대인식에는 흔들림이 없다.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최고의, 그러므로 최후의 발전단계인 제국주의는 부패성과 기생성으로 충만해 있고 인류의 생존 조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이 보다 긴 수명을 넘어 살아남는다면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지구환경의 불안한 격변 속에 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키기 위한 산고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상상력을 결여한, 방관자적 정서적 입장에서 쏘련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백해(百害)는 있어도, 하나도 이로울 것은 없다. 쏘련 붕괴 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와 정면에서 맞서고 있으며 플라스 측면은 물론 마이너스 측면도 이어받아야 할 책임을 떠안고 있다. 경험은 다음의 것을 가르치고 있다. 과거의 과오는 새로운 혁명에 의해서 정정되고 극복되어 간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지배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근본적인 사회변혁의 첫 걸음을 내딛었던 중남미 나라들의 인민 투쟁은 우리가-아니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노사과연>

 

 

특별기획 : 번역

쏘련은 왜 붕괴하였는가?

붕괴과정과 붕괴의 객관적주관적 요인들에 관한 연구

 

 

 번역: 김성칠(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