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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죽음(정태춘)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6. 7. 28. 12:04


우리들의 죽음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엔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 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장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 저기 옮겨 붙고 훨, 훨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 훨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방문은 꼭 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엄마, 아빠... 엄마, 아빠...

"우린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 안고 떨기 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어푸러지기 전에,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에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 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 갈 수만 있었다면...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뚱이.
몸뚱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리 다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