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다시 경제주의에 대하여 ― 노동전선 토론회를 중심으로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7. 12:49

다시 경제주의에 대하여

노동전선 토론회를 중심으로 

 

 

<노동자정치신문>[104호(통합 116호), 2014년 4월]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이하 노동전선)이 지난 326<박근혜 정권 반동성의 본질과 2014년 정세, 노동자투쟁 방향과 실천방안>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박근혜 정권의 공세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정권의 본질과 그것의 공세에 따른 2014년 정세, 그리고 이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투쟁방향을 점검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기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눈앞의 이해만을 조합주의적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총체적인 정세분석을 통해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공동으로 대응함으로써 노동자 계급 전체의, 더 나아가 인민 전체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방어하고 이로써 근본적 해방으로 가기 위한 계급적 전진을 이루어내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발제와 토론에 참여한 단위들이 좌중우를 막론하고 있는 것도 의미가 크다. 고착화된 정파 간의 분열 구도 속에서도 공통의 인식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공동의 실천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박근혜 정권의 파상적인 공세를 막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토론회의 주제가 박근혜 정권의 반동성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고, 또 발표 내용 중에 정권의 성격을 둘러싸고 상당한 이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재 매섭게 몰아치고 있는 공세의 성격, 목적, 목표는 무엇이고, 따라서 노동자 계급이 어떠한 방향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투쟁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발표문 상에 두드러지게 드러난 쟁점, 이견을 중심으로 토론이 진행됐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각각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버린 것은 정작 중요한 쟁점을 비켜간 것이고, 토론회를 개최한 목적에도 부합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해 11월 발행한 [100호 증보판(통합112)]에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민주주의 투쟁과 한국판 경제주의>라는 기사를 통해 이른바 좌파조직들의 뿌리 깊은 경제주의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경향들은 완강하게 지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박근혜 정권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동성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 투쟁의 진정한 의의를 인식하지도, 따라서 현 시기 노동자 계급의 올바른 투쟁방향을 도출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노동전선 토론회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

지독한 노동자주의, 경제주의 편향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를 대표하여 발제자로 나선 김태연은 박근혜 정권 공안탄압의 배경과 노림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두 가지 답변, 이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언급하는 것으로 발제를 시작한다.

 

통진당 해산까지 들고 나오는 박근혜 정권 공안탄압의 배경과 노림수는 무엇인가(3.19 공안탄압대책 토론회에서 나온 질문)”

답변1. 심오하게 기획된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대선 후보토론 때 이정희 대표의 공격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보복과 위기에 몰린 국정원의 생존전술이다.

답변2.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위기가 총체적으로 터져 나올 상황에서 이를 누르기 위한 지배세력들의 통치전략이다.

 

답변 12는 모두 박근혜 정권의 반동성의 배경이 될 것임. 그러나 1은 반동성의 본질에 접근하지는 못함. 이런 시각은 2013년 공안탄압 국면에서 국정원 촛불을 중심으로 투쟁방향을 반민주투쟁에 무게중심을 둠. 그러나 국정원 촛불의 반민주투쟁은 대중적으로 확대강화되지 못함.(인용자: 반민주투쟁은 모두 민주주의 투쟁을 의미. 강조는 인용자)

 

김태연은 답변1과 관련하여 박근혜 정권 공안탄압의 배경과 노림수로 충분히 언급될 수 있는 수많은 주장 중 한 가지, 그러나 대단히 협소하고 일면적인 하나의 주장을 들어 마치 그것이 박근혜 정권 공안탄압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배경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그래서 민주주의 투쟁을 주장하는 자들은 대단히 근시안적이고 비본질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김태연은 이러한 근시안적이고 비본질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민주주의 투쟁, 촛불투쟁은 애초부터 대중적으로 확대강화될 수 없는 투쟁이었던 것처럼 주장한다. 나아가 답변 12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자신의 주장(답변2가 누구의 주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태연이 주장하는 바와 내용은 동일하다.)이 박근혜 정권 반동성의 본질에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부정선거와 국정원을 규탄하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과 함께 수백 여 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는 급기야 8월에는 전국 10(서울 5)이 운집하는 대규모 투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김태연은 민주당 투쟁방식의 한계에 갇혀 발전하지 못했다면서 촛불집회를 폄훼한다. 설사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 투쟁에 기권하거나 소극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올바른 방향,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노동자 계급이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지 못했던 것 역시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에 나서도록 조직하지 못한 활동가들, 제 정치조직들의 한계와 오류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의 일차적인 책임은, 미안한 얘기지만, 왜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에 나서야 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이른바 좌파활동가들과 좌파조직들의 한계와 오류에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태연은 현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제출한 반자본/반신자유주의 투쟁 방향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단히 주관적인 정세인식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폐해로 인해 노동자민중투쟁 현장에서는 정권과 자본을 곤혹스럽게 만들 사안들이 산적함. 현대차와 삼성의 비정규직 문제,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 유성 등 계획적인 노조파괴 등. 즉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파괴 문제 등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노동자민중이 반격하고, 자본과 정권은 방어하는 형국에 놓임.

 

신자유주의 착취의 극단적 폐해에 맞서 그간 자본을 압박해 왔던 투쟁들 즉 현대차비정규투쟁, 쌍차 정리해고투쟁, 유성 노조탄압책임자 처벌투쟁 등을 다시 대중투쟁으로 복원하는 것임.

 

그간 신자유주의 폐해를 전사회적으로 부각하면서 자본을 궁지로 몰아넣어 온 현대차비정규투쟁, 쌍차 정리해고투쟁, 유성 노조파괴 분쇄 투쟁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삼성전자 비정규투쟁을 대중적 연대투쟁으로 확대강화해야 함.(강조는 인용자)

 

정리해고 분쇄투쟁, 비정규직 철폐투쟁, 민주노조 사수투쟁은 그 중요성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이 일차적으로 투쟁해야 하는 과제이고 전 계급적 요구로 모아내 자본가 정권과 싸워야 하는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투쟁의 의의와 객관적인 양상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김태연은 마치 그동안 전개되어 온 위 투쟁들이 자본과 정권을 심각하게 압박하고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말하면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놓고 있다.

 

사실 위 투쟁들은 그 중요성, 의의에도 불구하고 단위 사업장만의 문제로, 단위 사업장 내에서도 비정규직만의 문제로 고립되어 힘겹게 진행돼 오고 있다. 희망버스가 조직되어 이 투쟁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했지만, 최소한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차원에서의 의미 있는 공동파업이나 실질적이고 위력적인 지지, 엄호가 조직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자본과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기는커녕 저들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 점거, 농성, 단식 등 노조 활동가들과 열성 조합원들의 초인적 의지와 헌신성으로 힘겹게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김태연은 앞에서는 민주주의 투쟁의 성장과 정권이 받은 위기감은 깎아내리는 반면, 경제투쟁의 성과는 비현실적으로 부풀리고 있다.

 

김태연의 이러한 태도는 결론적으로 제출하고 있는 투쟁방향에서 반민주투쟁을 넘어서서”(인용자: 정확하게는 민주주의 투쟁을 넘어서서라고 해야 맞다.)라며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한다. 차마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전면 부정할 수 없어 투쟁을 해야 한다고 언급은 하고 있지만, 여기에 집중하지도 않은 채 이 투쟁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기권하거나 대단히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태연이 노동자들의 직접적이며 일차적인 요구인 경제투쟁 과제는 강조하는 반면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축소하는 이유는 사상적 근저에 뿌리 깊은 노동자주의, 경제주의가 자리하고 있는 것 외에도 분파주의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태연은 민주주의 투쟁이 “‘통진당 사수투쟁으로 협소화되거나, 협소하게 이해되면서 투쟁이 발전하지 못했고, 민주노총의 상반기 주요한 투쟁 역시 3.15 4.19 6.10 등 민주주의 투쟁 일정을 되풀이 하고 있다면서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태연은 말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고, 따라서 민주주의 투쟁을 해야 하고, 그것도 민주주의 투쟁을 넘어서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민주주의 투쟁이 통합진보당 살리기로 비칠까봐 민주주의 투쟁에서 사실상 기권해버리고 있다.

 

이러한 분파주의는 김태연만이 아니라 민주노총 최고 의결기구라 할 수 있는 대의원대회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지난 2014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일부 대의원이 투쟁방향 및 목표박근혜 정권의 종북공세를 분쇄하고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저지하며 반전평화, 자주통일을 적극 실현한다는 문구를 추가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심각한 찬반논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일부 대의원들이 대회장을 이탈하여 대회가 잠시 휴회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신승철 위원장이 민주주의 파괴 분쇄와 한반도 평화 실현 투쟁에 집중한다.”는 수정안을 제시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최초 제안자의 주장에 반대했던 대의원들이 보인 태도는 극단적인 분파주의였다. 더군다나 실제 박근혜 정권의 종북공세가 몰아치고 있고 일본 군국주의 부활과 미--한 동맹의 강화, 대북적대정책과 훈련 등으로 반도의 정세가 날로 격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주요하게 가져가야 할 투쟁방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노동자주의, 경제주의와 함께 극단적인 분파주의로 인해 애매한 반쪽짜리 투쟁방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현 시기 민주주의 투쟁은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고, 따라서 당연히 통합진보당 사수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만, 통합진보당을 엄호하는 투쟁을 비켜선 채 민주주의 투쟁을 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정작 옆에서 탄압을 받고 있는 대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엄한 곳에 가서 민주주의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만약 통합진보당이 해산될 경우 당장 김태연이 활동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의 운명이 어찌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통합진보당을 엄호하는 것은 전체 진보진영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찌가 권력을 장악하고 파시즘 체제를 건설해갈 무렵 나찌가 공산주의자에게 갔을 때 침묵한 것을 두고 보수적인 목사였던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가 훗날 탄식했던 것처럼, 통합진보당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훗날 박근혜 정권이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를 파괴할 때 손을 내밀어줄 곳은 없을 것이다. 단지 과거 역사를 회상할 때에만 참혹한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뿐, 정작 현실의 투쟁에서는 외면하는 것인가?

 

 

 

노동당,

종파주의적이며 심지어 반동적인

 

 

노동당을 대표하여 발제자로 나선 홍원표 정책실장은 박근혜 정권을 조금은 더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정권의 연장으로 규정한다. 현재 박근혜 정권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박근혜 정권이 파쇼정권이어서가 아니라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연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노동자를 탄압해 얻으려고 했던 것은 국가주도 발전정책에 순응하는 노동자와 국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노동자를 탄압해 얻으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닌 신자유주의 시장에 순응하는 노동자와 국민이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 정책의 핵심은 70년대식 안보 파시즘보다는 지난 10여년간 이어져 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권위주의적 변형에 더 가깝다.

 

그런데 홍원표는 박근혜 정권을 그 이전의 신자유주의 정권과는 다른 정권으로 규정하는 듯한 말을 여러 곳에서 반복한다. 예컨대, “법도 원칙도 없는 (민주노총) 침탈이라거나, “박근혜 정부의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 이처럼 노골적으로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박근혜 정부가 처음이다.”라거나, “과거 독재 정권이 사용했던 반공주의를 명백히 통치의 주된 수단으로 다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현역 국회의원에 대해 내란음모죄를 적용하고 소속 정당 해산까지 거론하고 있으며, 국정원과 군부는 공공연히 직간접적인 정치개입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들이 그것이다. 홍원표는 박근혜 정권에 대해 이처럼 뭔가 다른 듯한 점을 언급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신자유주의 정권의 권위주의적 변형인 것처럼 결론을 도출한다. 그 이유는 김대중 정부 이후 이어진 신자유주의 정권이 추구해온 경제정책, 노동정책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원표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은 국가에 순응하는 노동자를 얻기 위해 파쇼적인 독재를 행했지만, 지금의 박근혜 정권은 국가가 아닌 신자유주의 시장에 순응하는 노동자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박근혜 정권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파쇼독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정권이 파쇼냐 아니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정권의 행위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어디에 순응시킬 것인가, 즉 국가에 순응시킬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순응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홍원표는 국가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즉 화해 불가능한 계급적대의 산물이고, 따라서 계급지배의 도구라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인 성질을 갖는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는 노동자들을 위한 국가여야 한다.”와 같이 국가에 대한 출처를 알 수 없는 환상에 사로잡혀 박근혜 정부를 향해 어깃장을 놓기 일쑤다. “타협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법도 원칙도 없다거나, “영혼 없이반복하고 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홍원표의 국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천박하고 몰계급적인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을 국가에 순응시키려 했고, 박근혜 정권은 노동자들을 시장에 순응시키려 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유아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홍원표의 말이 옳다고 가정했을 때, 그렇다면 박정희는 왜 노동자들을 국가에 순응시키려 했을까? 임금놀이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박정희가 노동자들을 국가에 순응하도록 철저하게 억압통제하고 관리했던 것은 그것이 곧 자본의 착취와 억압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자본주의 체제를 안착시키며 나아가 독점자본을 키워낼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박근혜가 다른 것은 권력이 우위를 점하느냐, 자본이 우위를 점하느냐의 차이인 것이지 노동자들을 어디에 순응시키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자본이 미성숙한 상태, 특히 독점자본의 성장이 미미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것을 국가가 틀어쥐고 자본까지 독재 권력의 하위에 둔 상태에서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억압통제하고 자본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반면, 박근혜 정권은 이미 독점자본이 거대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독점자본의 요구에 따라 노동자들을 파쇼적으로 억압하는 것이다. 이것은 21세기형 파시즘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날 것인지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지만, 적어도 홍원표가 주장하는 것에 근거를 부여하는 차이점은 결코 아니다.

 

이상에서 보여준 홍원표의 인식 수준은 차라리 순진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홍원표는 민주주의 투쟁과 사회경제적투쟁의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뼛속 깊이 반공반북주의에 사로잡혀 악랄한 종파주의와 반동성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지켜야 할 가치이고, 더욱 발전시켜야 할 문제이지만, 국정원이 해체된다고 골목상권에 대한 대형마트의 횡포가 사라질리 없고, 비정규직이 사라질리 없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간과한 민주주의 수호 투쟁은 반쪽짜리 민주주의인 87년 체제로 회귀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홍원표에 의하면 결국 국정원 해체와 국가보안법 철폐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통합진보당이나 자주민주통일 진영, 자본주의를 철폐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홍원표가 그리고 노동당이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임금노동을 철폐하며, 따라서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 소상공인이 독점자본에 의해 수탈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리고 반도에서 미제국주의의 억압을 쓸어버리고자 한다면 노동당은 그 즉시 국정원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탄압 대상에 오를 것이다.

 

국정원과 국가보안법의 역할이라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미제의 억압을 분쇄하고자 하는 자들을 억압하여 자본주의와 미제국주의 패권을 사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저한 반공반북으로 무장하고 있는 홍원표와 노동당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대단히 종파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 해체,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말하는 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결국 자신들은 비정규직을 철폐할 마음도, 소상공인들의 수탈을 중단시킬 마음도 없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홍원표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지켜야 할 가치이고, 더욱 발전시켜야 할 문제라면서 가증스러운 립써비스를 늘어놓고 있지만, 아무런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 바로 탄로 난다. 그동안 이 땅의 민주주의와 노동자 인민의 자유,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배 열사들이 역대 정보기관과 검사법부, 기무사 등 공안기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는지를 아는 자라면 국정원 해체가, 국가보안법 철폐가 민주주의와 노동자 인민의 해방에 얼마나 사활적인 문제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따위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은 자신과 노동당은 민주주의와 노동자 인민의 해방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 갇힌 정치세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니 철저하게 반공반북주의로 무장한 지배계급의 동조자라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다.

 

홍원표의 발언은 자신이 인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

좌익주의, 최대강령주의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의 발제자로 나선 양효식은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명박 박근혜정권에 의한 민주주의 후퇴/파괴또한 오늘날 해체되고 있는 자본주의 아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취하는 필연적인 모습으로 봐야지, 민주당이 말하는 유신독재의 부활이나 반파쇼 인민전선론자들이 말하는 지배계급 내 특정 분파(극우반동세력)의 파쇼적 공세와 같은 문제로 돌릴 문제가 아니다.

 

지배체제 전체의 문제이고, 위기에 휩싸인 지배계급 전체의 반동적 발악을 대표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박근혜 정권이 반동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권력의 반동적인 모습은 오늘날 해체되고 있는 자본주의 아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취하는 필연적인 모습이라는 규정은 양효식 개인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다함께 취하는 입장이다. 이로써 이들은 박근혜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가 파쇼적 공세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위기에 휩싸인 지배계급 전체의 반동적 발악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점, 그것이 바로 노동자 민중이 피로써 쟁취한 자신들의 권리이고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두보라는 점을 부정한다. 한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의 지도세력이었던 민주당(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은 권력을 잡아서는 반동적으로 노동자 민중을 억압했고, 현재는 부정선거 규탄 투쟁이나 내란사건에서 보듯, 정권의 민주주의 억압에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민주주의 투쟁을 주도할 수 있는 계급은 노동자계급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바로 지금에 와서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세력들이 취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문제는 오늘날 여전히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적극적으로 민주주의 투쟁에 참여하는 촛불로 대변되는 광범위한 세력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오늘날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을 부정함으로써 민주주의 투쟁전선에 대한 집중적인 대응을 막고 협소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민주주의 세력들을 민주당의 지도력 하에 방치하도록 만든다. 결국 민주주의 요구 투쟁 대신에 최대강령을 무매개적으로 들이미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실천적 결론은 당면한 민주주의 투쟁에 기권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과거에 등장했던 파시즘만이 진정 파시즘인 것이며, 오늘날 전 세계에 발흥하고 있는 파시즘은 파시즘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문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양효식은 이런 전제를 둔다.

 

현 남한 국가는 계급적 본질에서 자본가 독재이며, 국가형태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다. 이 점은 박근혜정권에 와서도 그대로다. 계급적 본질은 물론이고 국가형태에서도 바뀐 것 없이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과정에서 파시즘으로의 전환 같은 것은 없었다. 박근혜정권의 반동적 공격의 극렬함과 파시즘으로의 국가형태 전환은 별개의 문제이다.

 

, 박근혜 정권의 공격이 아무리 극렬하다 하더라도 파시즘으로의 국가형태 전환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직은 파시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효식은 계급적 본질이 달라져야 하고 국가형태가 파시즘으로 전환되어야만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형태로서 민주공화제가 파시즘으로 전환될 때, 그때에야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파시즘은 아무런 과정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에서 떨어지거나 솟아나야 하는 것이다. 양효식이 파시즘의 준거점으로 제시하고 있는 야당과 의회를 해산하고 일당독재를 수립하는 것도 아무런 징후나 경과 과정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양효식이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이처럼 비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그가 갖는, 정확히는 뜨로츠끼주의가 갖는 철학적 한계 때문이다. , 변증법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양질전화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차이일지라도 어떠한 작용이 계속될 경우 질적 비약을 경과하게 된다는 것이 양질전화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양효식은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연장 속에서 사소한 차이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축적되고 여기에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계기들이 작용하면서 질적인 비약을 경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차이들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특히 전 세계 대공황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이 이를 돌파하기 위해 노동자 인민에 대해 5년간의 공세를 취해오고, 그로 인해 계급역관계가 현저하게 불리하게 약화된 결과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고, 오늘날 이를 바탕으로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극렬한 조치를 취하게 이르는 과정을 무시한다.

 

철학적 빈곤으로 인해 양효식은 점진적인 양적축적만을 보지 단절과 비약의 질적 전환을 이루게 되는 중대한 계기를 무시하게 된다. 그래서 양효식에게 중요한 것은 의회가 해산되었는지, 일당독재가 수립되었는지가 중요할 뿐, 내란공작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시도가 그러한 질적 전환의 중대한 출발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파괴라는 것이 그러한 장치들이 일거에 파괴되고 정지되는 것으로만 사고할 뿐 순차적인 파괴나 형식은 유지하되 내용적으로 파괴해가는 방법 등은 떠올리지 못한다.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총체적 부정선거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효식은 파시즘 하면 정당 및 의회 해산, 일당독재 수립으로만 기계적으로 암기하듯 이해한다. 만약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극악한 탄압을 자행하더라도 파시즘의 명함도 내밀 수 없다. 당장 박정희 정권만 하더라도 집권 18년 동안 변함없이 이 조건을 충족시켰던 것은 아니다.

 

파시즘의 구체적인 형태와 정도는 어떤 사회의 구체적인 사회적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근본적으로는 계급투쟁의 정도 여하에 달려 있다. , 파시즘의 구체적인 형태라는 것이 각각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효식은 파시즘의 정의를 기계적으로 암기한 채 그 내용에 어긋난다 하여 박근혜 정권의 파쇼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의 황금여명당을 비롯해서 유럽과 전 세계에서 출몰하고 있는 신나찌들은 국가형태가 변화하지 않았으니 파시즘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양효식의 이러한 철학적 한계와 정세인식의 오류는 투쟁요구로 제출하고 있는 이행강령에서도 반복된다. 지면상 길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 양효식이 가교가 될 요구와 전술이라고 하면서 제출하고 있는 이행강령은 가교는커녕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했을 때나 가능한 최대강령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당면 정세에 대한 집중적인 대응, 당면한 요구를 중심으로 전선을 집중, 확대하는 것을 가로막고, 원리주의적인 요구를 중심으로 대응함으로써 현 정세의 당면한 요구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원리주의적인 요구는 행동강령이 아니라 행동을 가로막는 행동포기강령이라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이행강령에 대한 비판은 [노동자의사상 5]를 참고하기 바란다.)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가 되자!

 

 

현재 박근혜 정권의 공세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의회를 해산하고 일당독재를 수립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체제를 만들어낼 것인지,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인지는 역시 계급투쟁의 정도 여하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의 반동적인 공세의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은 의회를 해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쇼체제가 수립, 완성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안이하게 규정하여 박근혜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권리들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고 더 전진시키고 확장하기 위한 투쟁이다. 착취와 억압, 수탈이 없는 노동자 인민의 근본적인 해방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노동운동 내의 경제주의 정치세력들은 노동자 계급이 인민들의 광범위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받아 안고 민주주의 투쟁에 앞장서 전체 인민들을 해방으로 인도하는 과업을 방해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현안문제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과학적, 총체적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차단시키고 있다.

 

세월호 참살에서 보듯이, 정권의 억압적 성격과 반동성이 더 극렬해지고 있으며 노동자 인민은 학살정권에 분노하고 있다. 참혹한 세월호 참살을 보면서, 노동자 인민의 핏발서린 분노를 보면서도 이것이 현장의 현안문제가 아니라고 기권하고 침묵할 것인가? 정권의 극악함이 극에 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저들의 위기가 크다는 것이다. 저들의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말고, 뒤로 물러서지 말고, 위기에 내몰린 파쇼 정권 퇴진을 향해 단호하게 싸워 나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