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 민주주의 투쟁과 한국판 경제주의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7. 12:36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민주주의 투쟁과 한국판 경제주의

 

<노동자정치신문>[100호 증보판(통합112), 201311]

 

 

민주주의 투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8월 말 국정원에 의해 조작발표된 내란음모 사건이후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밀리던 진보진영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탄압 받는 중심에 있던 통합진보당이 전열을 정비하면서 힘 있게 전선을 사수하고 있고, 노동시민사회를 아우르는 폭넓은 연대가 구축되고 있다.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내란음모가 조작된 것임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으며,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심판 청구는 박근혜 정권이 최소한의 합법성도,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원칙조차 남김없이 씻어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촛불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시작으로 종교계가 박근혜의 퇴진을 촉구하고 나섰다.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정세가 역전되는 순간, 박근혜 정권의 종북 매카시즘 공세로 움츠러들었던 민중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하다.

 

정세 변화를 감지한 민주당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총체적 부정선거였음이 사실로 드러난 상황에서도 대선무효를 선언하지 않고 고작 박근혜의 사과를 요구하는 정도로 부정선거를 물타기시도한데 이어,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을 가결시킴으로써 민주주의자들의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바 있다. 그런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사퇴 촉구 시국미사를 진행하자마자 이번에는 새누리당에 대해 ‘4인 협의체를 제안하면서 또 다시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민주당은 겉으로는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박근혜 퇴진과 그로부터 전면적으로 확장되고 쟁취될 민주주의에 의해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방어해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위협받을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으로부터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지켜내야 하는 역사적 소임으로 인해 박근혜의 부정선거 앞에서 좌충우돌, (갈 지)자 행보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투쟁이 격화될수록 일시적으로 권력욕을 누그러뜨린 채 극우반동의 품에 투항하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진보진영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 투쟁이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종북매카시즘 공세의 목적과 의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이들의 공세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다.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른바 진보적지식인언론정치인들은 양비론으로 위장한 하이에나가 되어 피해자인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물어뜯고, 박근혜 정권의 종북매카시즘 공세에 진보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공안탄압에 복무했다.(이른바 진보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노동자정치신문98(통합 110), “‘종북마녀사냥과 진보의 동조자들에서 이미 상세히 논한바 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변혁, 해방,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고 있는 정치조직, 단체들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현 정세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현 정세를 박근혜 정권의 공안탄압에 의한 민주주의의 후퇴로, 노동자민중에게 닥친 위기로 인식하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지독한 경제주의로 인해 경제투쟁과 민주주의 투쟁을, 경제와 정치를 분리사고하거나, 노동조합주의적 정치활동을 강화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자생성, 경제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심지어는 촛불 투쟁을 소부르주아 투쟁이라거나 대선에서 패배한 피해의식이라 매도하면서 민주주의 투쟁에서 기권한 채 성명서 한 장 발표하거나 기관지(신문)에 관전평을 늘어놓는 공허한 좌익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변혁정치라는 이름의 경제지

 

 

지난 119모임의 단계를 넘어 공식적으로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킨 변혁모임은 다음 글에서 민주주의 후퇴를 사유화, 유연화, 노동기본권 무력화 등 노동자와 직접 관련된 현안 문제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투쟁으로서의 민주주의 투쟁의 독자적인 의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경제민주화 및 복지공약 파기, 철도가스의료부분 등 공공영역 전반에 걸친 사유화', 노동기본권을 무력화시키는 탄압 등 박근혜정권의 반노동()민중적 정치행보는 거침이 없다. 이를 관철해나가는 방식 역시 강력한 친정체제 구축과 소위 찍어내기'밀어붙이기'로 권위주의 통치의 면모를 과감하게 보이고 있다. 이는 분명 민주주의 후퇴다. ...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개혁세력들의 주도권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생존과 정치적 권리다. 그 핵심에 민영화, 유연화, 노동탄압' 문제가 놓여 있다. 예컨대 자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 자본의 먹이()감으로 전락할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맞선 전민중적 투쟁이다. 노동자민중투쟁을 중심으로 박근혜정권과 자본에 맞선 전국적 투쟁전선을 구축하는 것! 그것만이 박근혜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선지현, 변혁정치“‘민주주의 수호로 박근혜를 무너뜨린다?”, 2013.11.07)

 

변혁정치의 이 글에서는 민주주의가 후퇴되고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이 곧 자유주의개혁세력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민주주의 수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박근혜 정권처럼 민주당 역시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지배계급이기에 이들의 계급지배를 용인하고 강화하는 민주주의 수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수호가 어떻게 자유주의 세력, 개혁세력의 주도권을 강화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변혁정치 주장의 요지가 그러하다면 응당 정치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적 권리의 전면적 획득, 공안기구 해체, 국가보안법 철폐와 같은 정치적 요구, 즉 자유주의개혁세력은 결코 할 수 없는 요구이면서 오히려 자유주의개혁세력의 한계와 기만성을 폭로할 수 있는 요구를 중심으로 반()박근혜 투쟁 전선을 구축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변혁정치는 민주주의 후퇴를 생존권적 권리의 후퇴만이 핵심인 것으로 한정하고, 독자적인 정치적 요구와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직 경제투쟁을 통해서만 정치투쟁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노동자민중투쟁을 중심으로 박근혜정권과 자본에 맞선 전국적 투쟁전선을 구축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박근혜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인가?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저작 전체에 걸쳐 비판하고 있는 경제주의적 경향, 경제투쟁 그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경향이 변혁정치 정세인식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르티노프가 사회민주주의 앞에 경제투쟁 그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하는임무를 제시할 때, 어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가 그의 말에 내포되어 있는가? 경제투쟁은 노동력 판매에 있어서의 더 좋은 조건을 위해서, 더 향상된 삶과 노동조건을 위해서 노동자들이 그들의 고용주에 대항하여 벌이는 집단적 투쟁이다. 이 투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조합투쟁으로 되는데 그 이유는, 노동조건이 직종에 따라 크게 다르고 따라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투쟁은 직종별 조직에 기초해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괄호 안은 생략) 그런고로 경제투쟁 그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런 직종별 요구조건의 충족과, “입법적이고 행정적인 조치”(괄호 안은 생략)를 통해서 분리된 각 직종의 노동조건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확히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하는 일이고 언제나 해왔던 일이다.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저작집1>>, 전진, 1988, p.215)

 

레닌의 말처럼, 변혁정치기사가 주장하고 있는 경제주의적 정치투쟁은 정확히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하는 일이고 언제나 해왔던 일이다.” 일상적으로는 개별 자본가나 자본가 그룹에 대항해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에 맞서 투쟁하거나 행정적입법적 조치를 강제하기 위해 투쟁한다. 따라서 경제투쟁 역시 정치적 성격을 배제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노동조합에 의한 대정부투쟁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경제적 투쟁은 정확히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치활동이며 이것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적 정치활동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다.

(레닌, 같은 책, p.218)

 

(또한) 경제투쟁은 단지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깨닫도록 내몰뿐이다. 따라서 경제투쟁 그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하기위하여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경제투쟁의 틀 안에 머무는 한은 절대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의식의 수준까지) 발전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틀이 너무나 좁기 때문이다.

(레닌, 같은 책, p.228)

 

노동자들이 생존권 투쟁을 통해서, 또 이 요구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정부에 맞서 대정부 투쟁을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사회주의정치활동이 아니다. 특정 정권에 반대해서 싸운다 하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본질에서 비롯된 문제임을 효과적으로 폭로하지 못한다면 노동자들은 생존권적 권리의 억압이 단지 특정 정권의 반노동자적 태도, 반노동자적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협소하게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사회주의정치의식을 형성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선지현의 글에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다. 변혁정치창간준비 8호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발행된 전체 신문의 내용이, 정치신문이 아니라 차라리 경제지라 해야 할 정도로, 경제투쟁으로 채워져 있다. , ‘변혁정치라는 이름으로 노동조합주의적 정치활동을 하고 있고 전투적 조합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사노위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제주의적 경향 때문인데(물론 구 사노위 출신 이외의 회원들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은 이행 문제에 있어 표면적으로는 정치권력 장악을 중심과제로 상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나, 정치권력, 즉 계급사회의 국가가 마치 중립적일 수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장악 없이도 재벌 (자산) 몰수 사회화할 수 있다는 듯이 얘기하는가 하면, 마치 경제가 민주화라도 될 수 있다는 듯 독점자본 합리화 프로젝트에 불과한 경제민주화를 긍정하기도 한다. ()사노위의 이러한 경제주의적 경향이 변혁모임에도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는 오직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 그것만으로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과 더불어 경제투쟁과 자본주의 철폐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문제이다. 이는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혹은 당면 요구와 궁극적 목표에 대한 강령적 인식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원칙이 서 있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다.

 

변혁모임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로 한 단계 조직적 수준을 높여서 출범하고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보다 선명한 목표를 내걸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인 정치활동에서 경제주의에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변혁정치를 세워내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또한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가 내건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협소한 노동자주의로 갇혀 버릴 것이다.

 

 

국정원 촛불이 광장에 갇힌 이유

 

 

()사노위의 경제주의적 경향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백종성의 국정원 촛불이 광장에 갇힌 이유”(정치신문 사노위53, 2013.09.02 - 홈페이지 게시 날짜)이다. 백종성은 10만의 인파가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청 광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이 국정원 문제가 먹고사는 문제와 별로 연관이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는 첫째로, 이 사안 자체가 생존권 문제와 결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로 주체의 측면에서 조직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내용을 볼 때 이석기 내란음모 조작사건이 터지기 전, 촛불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집회 이후에 써진 것 같다.)

 

백종성은 촛불 투쟁이 보다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국정원 문제가 먹고 사는 문제와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된다는 것, 이렇다보니 조직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여기서도 국정원 촛불, 민주주의 투쟁의 출발, 주요한 계기는 역시 지갑을 지키는 경제투쟁이다.

 

백종성에게 있어 민주주의 투쟁은 경제투쟁을 통할 때만 가능하고, 따라서 모든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을 통해서만 성장발전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만약 백종성의 말이 옳다면, 시청광장에 모인 10만의 인파는 경제적 요구, 불만이 없는 사람들, 경제적 이해를 초월해 있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일한 정치이슈만으로 10만의 인파가 모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최초 수십, 수백으로 시작해 10만이 모일 정도로 성장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 광장을 뛰어 넘는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여 마치 민주주의 투쟁이 되지 않고 있다는 듯이 얘기할 수 있는 안목이 참으로 대단할 따름이다.

 

백종성은, 만약 민주주의 투쟁이 시청광장에 갇혀 역동성을 상실한 채 박제화 되고 있다면, 그러한 투쟁을 넘어 보다 공세적이고 전투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투쟁을 조직하고 확장할 지 전술을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공장 안의 노동자들이 민주주의 투쟁이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인식한다면, 민주주의의 확장이 노동자계급에게 어떠한 의의를 갖는지 설명하고 민주주의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조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장 안에 갇혀 있는 대중들의 의식을 옹호하면서 사회주의자가 아닌 경제주의자로 전락하고 있다.

 

대중에게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과 별 상관이 없는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투쟁이 여전히 국정원 개혁과 국정조사로 머물러 있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체념과 냉소일 뿐이다. ... 공장 안의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공장 밖의 시민들에게 지금의 이슈는 뭔가 중요하지만 자기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은 그 무엇이다.

 

이로써 노동자계급과 시민들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체념과 냉소를 걷어내고 촛불 투쟁에 전면적으로 결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지키는 투쟁, 즉 경제투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만약 백종성이 민주주의 투쟁과 경제투쟁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거였다면, 응당 민주주의 후퇴와 생존권 후퇴 간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분석하고, 어떻게 결합시켜 투쟁을 고양시킬 것인지 그 방안을 제출하며, 노동자계급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할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승기에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투쟁 의제의 확산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되는 것처럼 말하면서 백종성 자신과 같은 사회주의자들, 활동가들의 역할,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해 버린다. 백종성은 대중들의 꽁무니를 쫓아가기도 바쁘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이 자신들의 자랑거리인 민주주의 투쟁에서조차 무능함’, ‘의지없음을 보인다면 단순히 무능하다’, ‘의지가 없다가 아니라, 무능하며, 정권퇴진의 요구를 걸고 싸울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없는지, 왜 저들이 “‘의회복귀장외 투쟁을 저울질하며 갈팡질팡하는지를 폭로하는 작업, 민주당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급적 이해에 복무하면서 노동자민중을 기만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이 폭로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민주주의 후퇴는 그저 박근혜 정권만의 책임으로, 민주당이 무능하긴 하지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은 민주주의 세력으로 되는 것이다. 인식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폭로할 수 있겠는가? 대체 정치라는 것이 가능은 할지 참으로 답답한 형국이 아닐 수 없다.

 

백종성은 노동자계급과 변혁세력이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가 되어 이 투쟁을 지도하고, 이로써 전체 민중들로부터 신뢰를 획득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 투쟁 그 자체가 정치투쟁의 주요한 과제이며, 정권과 자본주의를 폭로타격하는 정치선동의 임무를 스스로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백종성은 이것을 철저하게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정원 촛불이 광장에 갇힌 이유는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경제투쟁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며, 백종성 같은 활동가가, ()사노위 같은 정치조직이 경제주의에 빠져 민주주의 투쟁을 기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제주의와 공허한 좌익주의의 결합, 해방

 

 

국가보안법에 의해 탄압을 받고 있는 노동해방실천연대(이하 해방연대)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들이 외쳤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정치활동 보장이라는 요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의 민주주의 후퇴와 촛불 투쟁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 하면서 맘껏 관전평을 늘어놓는다. 이들의 관전평을 보고 있자면 대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수준이 얼마나 저열하면 이런 자들까지 사회주의라는 간판을 버젓이 걸 수 있는지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신을 저술노동자라고 밝힌 박남일은 장엄한 비극 초라한 희극 야성(野性)을 잃어버린 야당의 민주주의”(해방80, 해방연대 홈페이지 게시일 미기재)라는 글에서 촛불 투쟁에 대해 “‘독재정권과 민주주의라는 익숙하고도 해묵은 전선 구도가 부활했다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불법 선거 개입을 문제 삼으며 국정원을 걸고 넘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정감사 등의 조치가 여의치 않자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그러자 국정원은 죽은 노무현의 NLL 관련 발언을 건드렸고, 이에 분개한 통합진보당 등 민족주의 세력과 여타 친노 자유주의 세력이 촛불에 가세하여 더욱 시끄러워졌다.

 

대체 얼마나 사회주의 정치실천을 해야 촛불 투쟁의 경과 과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이르는지 참으로 놀랍지만, 여기서 경과 과정을 시정할 여유는 없다. 박남일, 그리고 해방연대가 촛불 투쟁을 어떻게 판단하는지만 확인하자.

 

박남일은 촛불 투쟁은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국정원을 걸고 넘어진 것이고, 민주당과 범야권으로 엮을 수 있는 세력들이 죽은 노무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가세하여 시끄러워진 것,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그저 그런 해프닝에 불과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런 해석을 증명하듯 박남일은 다른 글 “‘국정원 촛불은 무엇을 비추는가?”(해방79, 2013.07.25)에서 이렇게 훈계한다. “대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현실과 미래를 직시하라.

 

이제 이들에게 촛불은 대통령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촌극에 불과할 뿐,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오히려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지는 통에 밥줄 끊긴 노동자들의 분노도, 전세대란의 주택위기도, 물가폭등의 불안도, 밀양에서 벌이는 한국전력의 만행도, 후쿠시마 발() 방사능 공포도 말끔하게 묻혀버렸을 뿐이다.

 

이들에게 촛불은 그저 부르주아지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일 뿐이고, 민주주의의 후퇴 역시 부르주아지민주주의가 후퇴되는 것에 불과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촛불 투쟁에 결합하기라도 하면 아직도 공허한 국가주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비난까지 뒤집어써야 한다. “야당의 민주주의는 자본 독재’() 합리화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일 뿐이니 노동자민중은 인민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단정지어버린다. 그러고선 인민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노동자들이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호소하는데,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의 핵심과제는 밥줄이고, ‘주택문제이며, ‘물가안정이고, ‘안전한 먹거리이며, ‘건강이다.

 

박남일과 해방연대는 일상적으로 사회주의 정치실천을 한다고 자랑을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역할, 임무는 망각한 채 촛불 투쟁을 그저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투쟁인 것처럼 매도하고 민주주의 투쟁과 경제투쟁을 대립시키면서 민주주의 투쟁을 기각해버리는 좌익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경제투쟁을 핵심과제로 설정하는 경제주의로 빠져들고 있다.

 

바로 자신들이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저발전의 상징인 국가보안법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면서도, 그리고 무죄판결 직후 발표한 성명서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호소하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촛불 투쟁은 마치 부르주아지만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투쟁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남일과 해방연대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의의가 무엇인지, 국가보안법으로 억압하고 있는 정치사상의 자유를,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다름 아닌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도 모른 채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지키는 투쟁을 기각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촛불 투쟁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개량적이고 타협적인 지도부에 의해 지도되면서 정치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고, 광장에 갇혀 보다 전투적이고 역동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투쟁이든지 처음부터 사회주의적인 지도부와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대중들이 모여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한계가 있고 부족할지라도 그 투쟁을 지도하면서 정치적으로, 계급적으로 견인하고 보다 전투적이고 역동적인 투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 최소한 그러한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정치조직의 임무요, 역할일 것이다.

 

촛불을 밝혀 자신의 요구를 외치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유로운 권리이지만, 가뜩이나 취약해진 사회운동 진영을 조직적으로 거리에 동원하는 데는 무거운 역사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라고 훈계할 것이 아니라, 설사 아무리 개량적이고 심지어 기만적일지라도 그 투쟁이 나름의 의의를 갖는다면 최선을 다해 결합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려는 것이 진정한 정치조직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해방연대는 한편으로는 경제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공허한 좌익주의로 치달으면서 사회주의정치조직 본연의 역할마저 망각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박근혜 정권의 공안탄압, 민주주의 파괴는 직접적으로는 자신을 당선시킨 부정선거 사실을 은폐하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극우반동의 장기집권을 위한 전략임과 동시에 이를 통해 세계대공황으로부터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자본가 국가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박근혜 정권의 공세는 권위주의 통치의 강화나 대통령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지배계급 분파 간 권력투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파쇼화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의 정세는 그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투쟁이 진보진영을 넘어 전체 노동자민중의 삶에 사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노동자민중은 아직 민주주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노동자민중의 의식이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못하면서 여전히 경제투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변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경제주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 투쟁을 기각해버리는 일부의 정치조직들이다. 이들 정치조직들이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고 있는 사이 민주당이, 그리고 소부르주아 지식인언론정치인들이 마치 민주주의 투사인양 행세하면서 노동자민중의 의식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가둬두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지배에 복무할 뿐이고 이른바 진보를 입에 달고 사는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역시 박근혜 정권의 종북매카시즘 공세에 동참하면서 극우반동의 민주주의 파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민주주의 투쟁을 대하는 정치조직의 각성과 전면적인 결합이 매우 시급하다.

 

그것이 비록 부르주아민주주의일지언정 민주주의 투쟁에 가장 큰 이해를 두고 있는 계급은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이다. 부르주아지는 설사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파괴되더라도 자신들의 모든 것인 사적소유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에게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은 존재여서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해방 사업은 고사하고 경제투쟁조차도 제대로 행할 수 없다. 노동자민중이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로 서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비록 지극히 어려운 조건이지만 박근혜 정권의 공세에 의해 정치투쟁의 장이 열리고 있다. 박근혜 정권, 민주당, 자본가들, ‘진보를 참칭하는 소부르주아지들이 첨예한 정세 속에서 계급적 본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고, 민주주의와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요구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경제투쟁에만 매몰되어 있던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각성의 계기, 계급투쟁의 생생한 현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폭로를 조직하고 정치선동을 수행하자!

 

노동자계급이 모든 계급, 계층의 본성을, 집단들의 삶과 행동의 모든 측면들을 알 수 있도록, 지배계급의 비밀스러운 활동을 위장하려는 모든 구호들과 궤변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진보로 위장한 소부르주아지의 몰계급성과 우유부단함을, 뿌리 깊은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자!

 

 

노동자계급을 억압하는 굴레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억압을 깨부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자.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계급투쟁의 학교가 되고 있는 민주주의 투쟁에 발을 담그도록 정치폭로를 조직하고 정치선동을 수행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