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 저자 그로버 퍼와의 인터뷰(종합) “흐루시초프는 100% 거짓말을 했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10. 14:24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 저자 그로버 퍼와의 인터뷰(1부)
“흐루시초프는 100% 거짓말을 했다”  

 

<노동자정치신문>[86호(통합 98호)-88호(통합 100호), 2012년 6월, 7월, 10월)]

 

 



[편집자 주: 그로버 퍼(Grover Furr)는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몽클레어 주립대학(Montclair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역사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한 교수다. 최근 퍼는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라는 제목의 책을 러시아어로(2007), 영어로(2011)로 출판하면서 흐루시초프(Nikita S. Khrushchev)가 1956년 2월 25일 비밀연설에서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이나 베리야(Beria)에 대해 했던 “폭로(Revealation)”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혔다.

필자는 지난 2012년 3월 16-18일에 있었던 레프트 포럼(Left Forum)에서 퍼가 주재한 쏘련의 1930년대의 역사에 대한 토론에 참가하고 나서 며칠 후에 뉴저지의 몽클레어 주립대학으로 퍼를 찾아가 약 4시간 30분가량 마라톤 인터뷰를 진행했다. 퍼는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이민족의 후손으로, 그가 그의 연구들에서 보여준 냉철함과 철저함과는 달리 정말 사람 좋은 분이었고, 다소 도발적인 질문도 다 받아주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필자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재차 삼차 질문을 하면서 그의 책이 의미하는 바와 쏘련의 역사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러시아 역사를 몇 십년간 연구해오고 있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한 퍼는 쏘련의 역사를 연구하여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워나가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여기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스탈린을 ‘악마’나 ‘자본가’, 쏘련과 세계혁명을 망친 ‘관료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는 한국사회의 지적, 정치적 풍토 속에서 뜨거운 논란꺼리를 제공할 것이다. 그로버 퍼는 오랫동안 학문적 열정을 가지고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해왔다. 퍼의 스탈린과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통상적인 쏘련과 스탈린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다르다. 퍼의 저작은 국제 운동진영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퍼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되어야지만 본격적인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퍼의 저서가 국내에 번역되고 그 주장의 정당성, 진실, 관점 등이 검증되는 속에서 인터뷰가 이뤄지는 게 맞다. 이점에서 인터뷰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과 쏘련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제국주의 진영의 일방적인 악선전이 판치는 상황에서 퍼 교수에 대한 인터뷰는 쏘련 사회주의와 스탈린에 대해 과학적으로, 새롭게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자극과 긴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1. 선생님은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스탈린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나는 다만 쏘련 시절에 발간된 1차 자료들을 활용하여 러시아 사회 역사에 대해 연구했다. 쏘련에서 발간된 자료들은 쏘련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많은 자료들이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트로츠키를 포함한 반공산주의 연구자들은 스탈린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거짓말을 해왔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러한 ‘악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스탈린에 대한 모든 진술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1956년 흐루시초프 연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흐루시초프의 연설의 모든 한마디 한마디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흐루시초프는 100% 거짓말을 했다. 그러므로 쏘련의 역사에 대해서 최소한 몇 십년동안 이루어졌던 일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견해로 보아야 한다.


2. 선생께서 쓰신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인지요?

나는 흐루시초프가 그의 연설에서 ‘폭로한’ 스탈린의 ‘악행’들을 61개로 나누어서 분석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스탈린이 그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을 도덕적·육체적으로 절멸시켰다는 것, 전반적인 집단억압 (Mass Repression Generally), '고문 전보(Torture telegram)', 스탈린이 전쟁에 대한 경고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거기에 대해 대비하지 않은 점, 전쟁초기에 스탈린의 사기저하, 주코프(Zhukov)의 강등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편집자 주: 퍼가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말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흐루시초프가 비밀연설에서 “스탈린이 그의 의견에 대해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그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집단지도체제에서 제거되었고 도덕적·육체적으로 절멸상태로 되었다.”고 ‘폭로’한 것에 대해 퍼는 “스탈린의 전 생애에서 스탈린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단지도체제’로부터 누군가를 ‘제거’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고 반증했다.

‘전반적인 집단억압’에 대해서, 흐루시초프는 “1935-1937-1938년의 시기는 쏘련정부를 통해서, 첫 번째 오랫동안 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패배당한 레닌주의의 적들 - 트로츠키주의자, 지노비예프주의자, 부하린주의자에 대해, 이어서 많은 무고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그리고 내전(Civil War)의 무거운 짐을 감내해 냈고 집산화와 산업화의 가장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보냈고 레닌주의 당노선을 견지하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투쟁했던 당의 핵심간부들에 대해서, 대중억압(Mass Repression)이 시작된 시기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스탈린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대학살자’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퍼는 다음 증거를 들어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했음을 밝힌다. 즉, “니콜라이 예조프(Ezhov, 1936-1938년 동안 내무인민위원회 또는 비밀경찰(이하 NKVD)의 수장)보다도 오히려 흐루시초프 자신이 더 ‘집단억압’에 대해 책임이 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과 중앙당 지도부에게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흐루시초프가 가장 상세하게 알고 있다. 흐루시초프는 ‘비밀연설’을 하던 날부터 24일전까지인 1956년 2월 1일까지도 예조프와 야고다(Iagoda)를 옹호했고, 1956년 2월 18일 그의 연설문 초고에서도 그들을 옹호했는데, 이는 흐루시초프가 실제 일어났던 어떠한 음모도 부인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비밀연설에서 흐루시초프는 예조프가 저지른 일체의 억압조치에 대해 스탈린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예조프의 억압조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흐루시초프 자신도 잘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조프가 대규모 불법적인 억압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흐루시초프는 포스펠로프 보고서(Pospelov Report, 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후보위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억압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보고서)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당 간부들이 부당하게 처형당했다고 했는데, 이 주장은 증거를 입증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이 숙청당했다는 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많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당간부들, 두 NKVD 의장이었던 야고다와 예조프, 고위 군지도부,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반정부 음모에 가담한 우파-트로츠키주의자 계열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그 당시 스탈린정부에 의해 파악된 대략적인 상황과 비슷하다. 다만 예외적으로 예조프가 우파 음모자들의 지도부에 가담했다는 것과 같은 몇 개의 중요한 사건들의 경우에는 그 당시에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한편, 여러 정황증거로 볼 때, 흐루시초프 그 자신이 우파-트로츠키 음모에 참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많이 있다.”고 밝혔다.

예조프가 스탈린에게 보냈다는 383명의 명단에 대해서, 흐루시초프는 “쏘련의 NKVD가 군사재판이나 사전에 형을 선고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미리 준비해왔던 악독한 짓이 용납되었다. 예조프는 준비된 형벌을 승인받기 위해 스탈린에게 개인적으로 명단을 보냈다. 1937-1938년 사이에 당, 소비에트, 공산청년동맹(Comsomol), 군대, 경제활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포함한 383명의 명단이 스탈린에게 보내졌다. 그는 이 명단을 승인했다.”고 ‘폭로’했다.

퍼는 “이 명단은 존재한다. 현재 이 명단은 처음에는 CD로, 그 다음에는 인터넷에 ‘스탈린주의자 총살자 명단(Stalinist 'Shooting' Lists)’으로써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총살되어질’ 사람들의 명단이 전혀 아니다. 이 명단은 만약 기소된 개인이 선고를 받을 경우에 받을 수 있는 형량, 즉 기소가 법원에서 적용될 때의 형량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 명단들은 ‘검토용으로’ 스탈린에게 보내졌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기소되지 않았거나 더 경량으로 기소되거나, 총살당하지 않았다... 스탈린이 아니라 바로 흐루시초프 자신이 이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제안된 형량에 대해 범위를 설정하는 일을 했던 장본인이었다. 흐루시초프는 NKVD가 이 명단을 준비했다고 언급했으나, NKVD와 당지도부가 함께 일했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이 명단에 있는 많은 이름들이 흐루시초프의 관할 지역에서 더 많이 유래한 것임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38년 1월까지 흐루시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당의 제1서기장이었다. 그 이후 그는 우크라이나의 제1서기장이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스탈린이 “고문전보(Torture telegram)”를 보냈다는 주장을 하면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1939년 대량 체포의 흐름이 있을 때 공화국공산당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s of Republic Communist Parties), NKVD(People's Commissars of Internal Affairs), NKVD 조직들의 수장에게 전보를 보내어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와 볼셰비키(Bolsheviks)의 허가 하에 1937년부터 NKVD에서 물리적 탄압을 시행하게 된 것을 설명’하였다. 흐루시초프는 이 전보에서 ”왜 사회주의 정보기관들이 노동자계급과 콜호즈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자본가들에게 더 인간적이어야 하는가? 중앙위원회와 볼셰비키는 잘 알려져 있고 완강히 저항하는 인민의 적에게는 ‘예외적인 경우로써’, 정당하고 적절한 방법으로써, 물리적 억압을 의무적으로 사용해야한다.“라는 말을 스탈린이 언급했다고 인용하면서, 스탈린이 중앙위원회와 볼셰비키의 이름으로 사회주의 적법성에 가장 치명적으로 위배되는 고문과 억압을 정식으로 허가받았는데, 이것이 후에 무고한 사람들을 비방하고 질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고 ‘폭로’한다. 이에 대해 퍼는 "흐루시초프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즉, 그는 전보 내용 중에서 중요한 문장들을 숨겼고, 청중들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전보’는 확실히 발송되지 않았던 것(이 전보는 1956년에 만들어진 복사본 같다)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흐루시초프는 위조된 이 ‘전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이 전보의 ‘원본’은 1990년대에 공표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그 안에 모든 문제들을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한편의 논문 같았다"고 하면서 이 전보가 보내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면서 이 전보의 전체 부분이 매우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퍼는 또 주코프가 쓴 Inoy Stalin에 있는 1차 자료에서 당의 제1서기들이 사형제도를 주장했을 때, 스탈린과 당의 중앙위원회 지도력은 이를 강력하게 거부했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정황상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의 주요 목적은 흐루시초프 자신과 같은 제1서기들의 잔인함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반론을 펴고 있다.

또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전쟁에 대한 경고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거기에 대해 대비하지 않은 점과 전쟁초기에 스탈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점을 폭로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퍼는 “나찌공격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하면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난하는 것은 결국, 스탈린을 전지전능한 신의 수준으로 올려놓는 ‘개인숭배’를 하는 셈”이라고 반론하고 있다.]        


3. 선생님은 이 연구를 위한 참고자료를 어떻게 구하셨나요?

트로츠키와 관련한 자료는 세 곳이 있는데 암스테르담, 하버드, 스탠버드 대학의 후버연구소다. 나는 여러 자료들을 중복 체크를 한 후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한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다른 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재차 확인했는데, 그들은 트로츠키가 거짓말한 것을 발견했고 나는 그것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다.

[편집자 주: 퍼는 로버크 콘퀘스트 (Robert Conquest)가 쓴 “대공포: 1930년대 스탈린의 숙청(The Great Terror: Stalin's Purge of the Thirties”(1968) 원본을 보여주면서 말한다.]

이 책을 보라! 그는 증거라고 하면서 각주를 달았지만, 그것은 다른 역사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1차 자료원이 아니다. 그것은 2차 자료이다. 어디에 증거가 있는가? 이것은 증거가 아니다. 수백 개의 각주가 있더라도 그것이 1차 자료에서 온 것이 아니면 증거가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2차 자료 [다른 사람들이 쓴 책]에서 인용을 했지만 이것은 증거가 아니다. 진짜 역사책은 1차 자료를 통해서 증거가 획득되어야 한다.  우리는 1차 자료가 필요하다. 내 책에는 많은 1차 자료들이 있다. 단 몇 개의 1차 자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여러 자료원으로부터 자료들을 모아서 서로 비교해야 한다. 연구의 과학적인 과정에 의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우선 2차 문헌들을 완벽히 소화하고, 1차 자료 증거들을 확인하고, 그 증거의 위치를 찾고, 그것을 획득하고, 연구해서, 그 증거로부터 충분한 자격을 갖춘 정확한 결론들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의 책을 인용한다. 거기엔 증거가 없다. 우리는 확인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쏘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수십 년간 거짓말을 들어왔다. 나는 키로프암살에 대해 책을 썼는데 이 책이 유일하게 역사적 사실을 분석한 책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를 분석한 문헌들은 없는지요?)

러시아에서 일부 사람들이 반공주의자의 견해가 아닌 책을 발간하기도 한다. 그들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다. 현재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발간되지 않는다. 예측 컨데 미국에서는 거의 발간되지 않았다. 지금 레프트 포럼(Left Forum)에 나왔던 모든 미국의 출판사들도 스탈린에 대해 출판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나는 책을 러시아어로 발간했다. 나는 2년 후에 트로츠키에 대한 책을 마무리할 것이다. 스탈린은 아직 러시아에서 유명하다. 러시아에는 친스탈린 책들을 파는 곳이 아직 많이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쏘련의 역사에 매우 관심이 있다.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쏘련에 대한 관심이 없다.


4. 1930년대 대숙청(Great Purge)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쏘련에서 집산화와 산업화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쏘련에서는 매 2-3년마다 대기근이 있었는데, 이 대기근을 이겨내기 위해 농업을 집산화해야 했다. 집산화 과정에서도 1930-1932년에 대기근이 있었다. 2차 대전 후에 1946-1947년에도 대기근이 있었지만 이것을 제외하곤 1930-1932년에 있었던 대기근이 마지막 것이다. 이 기근 때 집산화가 필요했다. 집산화는 산업화를 가능하게 했다. 스탈린과 쏘련 공산당이 집산화 과정에서 사적소유가 활성화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비난을 받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다. 반공산주의자들이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스크바 재판에 대해 범행이 조작되고 사람들이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증거는 없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자백을 했다.

1930년대 쏘련 역사에서 모스크바 재판에 대한 트로츠키의 해석이 스탈린에 대한 “본보기 해석(Template interpretation)”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트로츠키의 쏘련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반공산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주장을 따라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1934년 키로프(Kirov) 암살 관련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1930년대 쏘련의 역사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 완전히 거짓이다. 흐루시초프는 그의 연설에서 트로츠키가 말했던 것과 유사하게 거짓말을 했고, 이어서 고르바초프(Gorbachyov)는 반복해서 같은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반공산주의의 입장이다. 나는 이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1차 자료를 다 찾아보고 트로츠키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5. 왜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하게 됐다고 생각하나요?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그가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몇 십 년 동안 배웠던 1920-1930년대 쏘련의 역사는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한 이유를 두 가지로 상상해볼 수 있다. 첫째,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시인하면 그의 추종자들은 스탈린의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여 그를 불신했을 것이다. 그는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이 그를 논리적으로 믿게 되면 그 거짓말을 한 사람은 항상 거짓말을 하게 된다. 두 번째 그가 만약 그가 쏘련에서 음모에 가담한 것을 시인하면 그는 망명했던 나라들인 노르웨이,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나라에서는 그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때만 거주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절대 음모에 가담했다고 시인하지 않았지만 그는 음모에 가담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최소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트로츠키는 한 측면에서는 이론가인 측면이 있지만 또 한측면에서 볼 때 그는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트로츠키가 1930년대에 스탈린과 쏘련을 묘사한 것이 그의 사후 반공산주의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가 오직 이론을 이야기했다면 문제가 없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론이 틀릴 수도 있다.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그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나빴던 이유는 그가 음모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다는 데에 있다. 누군가가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100% 거짓말을 한다면 그는 반공주의자이다.

왜 그가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가? 반공주의자들은 트로츠키의 저작에 대해 출판을 하며 무척 많이 지원을 했다. 트로츠키주의는 자본가들에게 매우 잘 받아들여졌다. 1930년대에 트로츠키는 뉴욕타임즈 등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 언론에 많이 발표를 했다. 자본가들은 혁명을 밀어내길 원했는데, 그들은 왜 트로츠키에게 돈을 주었겠는가? 이렇듯 트로츠키는 단지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반공산주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트로츠키는 반공주의자라고 불려야 한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면 그것은 반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으며 자본주의자들과 같은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문제는 트로츠키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후세대의 문제인가요?)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 예로 트로츠키는 키로프 암살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키로프에 대한 트로츠키의 해석이 반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거짓말이다. 우리는 이제 증명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트로츠키가 쓴 책들을 읽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에 흐루시초프가 트로츠키가 말한 바와 매우 유사하게 스탈린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 후, 트로츠키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트로츠키는 쏘련의 역사에 대한 반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왜 트로츠키 운동은 영구혁명론과 같은 트로츠키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로자 룩셈부르크를 따르는 이들은 완전히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운동은 그의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1930년대 스탈린과 공산당의 묘사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이론과 그의 거짓말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

(누가 트로츠키의 청중이었나요?)

그의 가장 핵심적인 청중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1930년대 트로츠키의 논문은 소수에게만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트로츠키는 뉴욕타임즈, 영국신문 등 부르조아 언론에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들은 반공산주의의 견해라면 모두 발간하고자 했는데, 트로츠키는 진정한 혁명가라고 자칭하면서 쏘련이 끔찍하고 스탈린이 혹독하다고 했다. 그는 위대한 리더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트로츠키가 쓴 것을 모두 믿었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가? 현재 트로츠키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트로츠키와 소비에트의 문헌을 두 개 다 확인해보면서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하버드와 후버연구소에 갔는데 특히 하버드에서 매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아직도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의 저작들을 읽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은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트로츠키의 이론이 매우 좋다고 하더라도, 그가 1930년대의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은 그를 따랐나요?) 

왜냐하면 트로츠키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0-1940년에는 매우 극소수만 트로츠키를 따랐다. 이후 흐루시초프가 연설을 한 후, 그는 트로츠키가 1930년대에 말한 많은 것을 인용했다. 흐루시초프의 연설은 트로츠키를 매우 비범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자본가계급은 트로츠키를 자본주의 중심 대학의 교수로 만들려고 했다. 트로츠키는 항상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자본주의자에게는 혁명가이자 좌파임을 자처하면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트로츠키가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반공주의를 사수하는데 매우 적임자였던 것이다.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이 트로츠키를 믿게 된 가장 주요한 계기는 흐루시초프가 트로츠키를 미화시킨 측면이지만, 이에 더하여 쏘련의 멸망도 트로츠키가 옳았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흐루시초프는 트로츠키의 거짓말을 그대로 적용하여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두 거짓말이 매우 유사하다.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한 것은 트로츠키의 거짓을 이용한 것이다.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했다는 가설을 가진다면 우리는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쓴 것이다. 트로츠키와 흐루시초프의 거짓말이 비슷하므로 나는 트로츠키가 거짓말을 했다는 가설을 가지고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트로츠키도 거짓말을 했다고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아직 트로츠키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직 혁명운동을 하나요?)

1956년 흐루시초프의 연설 전에는 트로츠키의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흐루시초프가 트로츠키에게 이익이 되게 만들었다. 흐루시초프의 연설이 있자, 사람들은 ‘이것은 20년 전 트로츠키가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일 것이다. 우리가 그를 따르자.’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혁명가였을 텐데 그가 왜 반공주의자로 변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맑스의 유명한 저작들을 보자! ‘공산당선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 등등.  맑스는 우리의 사회에 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같이 단계가 있다고 했다. 맑스를 이러한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장시간의 자본주의의 시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맑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맑스는 어느 부분에서는 모든 사회가 모든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더 나아가 맑스주의는 방법이지 대답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맑스가 말한 부분의 요약이라면 그것은 도그마티즘이다. 우리는 맑스가 말한 것만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노동자계급과 공산주의 운동은 맑스가 겪지 못한 많은 경험들이 있다. 우리는 이미 맑스가 갖지 못한 많은 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맑스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맑스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늘날 5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고 있다. 맑시즘은 방법론이지 대답이 아니다. 이것은 마지막 대답이 아니고,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트로츠키주의는 도그마티즘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아직도 트로츠키와 스탈린 중에서 누가 더 레닌을 더 잘 해석했는가?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쏘비에뜨가 잘못되었는지? 중국혁명이 잘못되었는지 다 알아야 한다. 마오주의자들도 마오쩌둥의 시기에 마오쩌둥이 잘못한 것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

(흐루시초프에 대한 마오쩌둥의 의견은 어떠했나요?)

중국은 아무 증거도 없이 스탈린에 대해 반대했다.

[편집자 주: 정확히 말하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진 직후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 뒤에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공은 70%요, 잘못은 30%다.”라며 스탈린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퍼는 마오가 말한 이 30%의 과오에 대해서조차도 흐루시초프의 주장한 것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몇 개의 논문에서 스탈린의 과오를 지적했으나, 스탈린을 비판하는 정확한 증거가 없이 오직 흐루시초프가 말한 바를 인용했을 뿐이었다. 마오쩌둥은 어떤 자료도 없고, 단지 일반적인 소견으로 스탈린이 오류를 범했다고 했으나 거기엔 어떤 증거도 없다. 마오쩌둥은 쏘련의 역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흐루시초프가 말한 바에 의존했던 것 같다.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은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진정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공산주의자가 되길 원하는 러시아의 젊은 역사가들 중에 한사람인 칼로프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거짓말을 발견했다. 9년 전에 칼로프가 키로프 암살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그는 키로프가 단지 어떤 한 사람[편집자 주: 스탈린]의 음모에 의하여 죽임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1934년 니콜라이가 키로프를 죽였을 때, 반공산주의자들은 키로프가 [스탈린의] 음모에 의해 죽임당한 것이며, 이렇게 볼 때, 쏘련 당국이 그 당시에 무고한 사람들을 귀양 보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칼로프는 키로프를 죽인 니콜라예브는 혼자 진행한 것이며,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음모에 의한 것은 아니어서 [무고한] 사람들이 추방되어서는 안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탈린주의자로서 정직하게 연구한 것이다. 칼로프는 스탈린이 이 점에서는 잘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로프의 주장은 틀렸다. 나는 키로프 암살에 대해 책을 하나 썼는데, 키로프암살은 진정 음모(Conspiracy)에 의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 칼로프도 니콜라예브가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무고하게 추방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은 지노비예프(Zinovyev)의 음모가 키로프를 죽인 것이다. 트로츠키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쏘련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6. 대부분 공산당들은 흐루시초프의 연설을 따랐나요?

그렇다. 흐루시초프의 연설 이후,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 동의해야했다. 안 그러면 축출 당했다. 대부분 공산당들은 항상 흐루시초프의 말을 따랐다. 스탈린이 죽고, 혼돈의 시기에 흐루시초프가 쏘련공산당 지도자가 되었고, 쏘련공산당은 쏘련혁명의 성공을 근거로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흐루시초프 연설 이후, 사람들은 이 연설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흐루시초프는 1964년 8월에 축출되었으나, 1961년 8월 제 22차 당대회가 있을 때, 흐루시초프는 또 한번 스탈린이 잘못했다고 연설했다. 1964년 8월 스탈린에 대해 또 문제를 제기했다. 1961년에서 1964년 8월까지 모든 사람들이 흐루시초프의 연설을 믿기 시작했다. 이것이 러시아의 표준 역사가 되었다. 브레즈네프(Brezhnev)는 1964년-1982년 동안 이 모든 논란을 스톱시켰다. 브레즈네프가 죽은 이후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집권하면서 1987년에 반스탈린 캠페인을 벌였다. 그는 흐루시초프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대부분 공산주의당원들도 흐루시초프의 연설을 기반으로 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과 쏘비에트 역사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쏘련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약화시켰다. 1956-1957년 흐루시초프의 연설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50%가 공산주의운동을 그만두었다. 그들은 약 20-30년간 ‘악마’ 스탈린을 계속 따랐다는 것을 후회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을 그만두었다.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매우 빠르게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이어 스탈린시대의 ‘반역적’인 행동들을 ‘명예회복 (Rehabilitations)’시키려는 하려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나면서 흐루시초프의 패러다임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 결과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은 ‘반스탈린’ 패러다임의 기초가 되었다.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흐루시초프의 연설이 러시아의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으나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증거를 제공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흐루시초프가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퍼는 그의 책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흐루시초프는 그 자신이 1930년대에 ‘대중억압’의 과정에서 그 자신이 행했던 부적절한 역할을 은폐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흐루시초프와 그의 동맹자들은 쏘련에서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폐기하고, 스탈린이 했던 사회주의 건설과는 사뭇 다른 정치적 궤도로 나가길 원했다는 것이다. 흐루시초프와 그의 후손들인 브레즈네프(Brezhnev)와 주변 사람들의 친자본주의 정책들의 근원은 스탈린 이후, 흐루시초프가 쏘비에트 지도력을 획득하자마자 시작되었다. 사실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포기한 정책들 대부분의 기원은 ‘스탈린 말기’인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까지 로 거슬러 올라간다. 셋째, 유리 주코프(Iuri Zhukov)의 가설에 의하면, 흐루시초프의 목적은 스탈린과 최고간부회의 안에 있는 스탈린의 이전 동맹자들이 연관되어 있는 민주적인 개혁의 길을 확실히 차단하길 원했다는 것이었다. 이 개혁들은 당이 정치, 경제, 문화를 통제하는 것을 없애고, 이것들을 선출된 소비에트 지휘 아래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내부에서 ‘페레스트로이카’나 ‘혁신전략’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르바초프의 이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끈 ‘약탈적인 자본주의로의 복귀’와는 반대되는 것을 의미했다. 퍼는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 내용이 일관되고, 또 전체가 거짓으로 드러남에 따라, 주코프(Zhukov)의 가설이 흐루시초프의 거짓말의 근원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보고 있다.]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 저자 그로버 퍼와의 인터뷰(2부)
“쏘련 사회주의 역사는 무엇이었나?”

  

 

지난 호에서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의 저자 그로버 퍼(Grover Furr)는 흐루시초프가 1956년 2월 25일 비밀연설에서 스탈린과 쏘련 역사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쏘련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퍼는 쏘련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전환점을 만들었고 쏘련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956년 흐루시초프의 연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거짓 위에 구축된 ‘반(反)스탈린’ 패러다임의 근원을 밝히고 이를 제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퍼가 자신의 책 주제는 오직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로저 키란(Roger Keeran) 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벌써 흐루시초프의 거짓을 폭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쏘련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밝히길 원한다. 이번호에서는 퍼의 책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그에 대한 퍼의 의견을 다루고, 또한 퍼가 그의 책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가장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쏘련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한 퍼의 견해를 싣는다.



7. 로저 키란(Roger Keeran)은 선생님의 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비판적인 비평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키란은 미국공산당원이다.(편집자 주: 키란은 SUNY, Empire State College 교수이며, 그의 저서로는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이면(Socialism Betrayed: Behi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2004), 공산당과 전미자동차노조(The Communist Party and the auto workers unions, 1980) 등이 있다. 키란은 미국 공산당 내에서 우경화에 맞서 싸우고 있다.) 미국공산당은 매우 우경향으로 가고 있고, 그는 공산당에 만족해하지 못했다. 그는 나의 책을 보고 매우 행복해했는데, 다만 그가 내 책에 대해 비판한 내용은 잘못되었다.


[편집자 주: 퍼의 저작에 대한 로저 키란의 비평과 그로버 퍼의 반론 글을 살펴보는 것도 당시 상황을 균형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키란은 퍼가 흐루시초프 비밀연설이 스탈린과 쏘련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로서 중요성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퍼가 흐루시초프가 연설에서 ‘폭로’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 심지어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옳다고 지적하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키란은 이점을 전제하면서도 몇 가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첫째, 키란은 퍼가 ‘흐루시초프의 모든 진술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키란은 퍼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둘째, 키란은 퍼가 흐루시초프가 폭로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키란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노력하였다면, 퍼는 스탈린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을 부인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하고 있다.

키란은 '대중억압 (Mass Repression)'을 예로 들면서, 흐루시초프가 '대중억압'을 당했던 사람들이 무고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근거 없는 주장’을 벌인데 대해 퍼가 그들이 유죄였다고 하는 ‘근거 없는’ 주장을 벌인다고 주장한다. 키란은 “의심할 바 없이 심각한 반(反)소비에트 활동과 음모는 존재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억압'은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러나 반(反)소비에트 활동이 얼마나 대단하였고 누가 유죄이고 누가 무고한가? 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고 주장하면서 흐루시초프의 주장과 퍼의 주장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결국 키란은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퍼가 오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키란은 퍼가 그의 책에서 밝히지 않았던 ‘진실’ 밝히기에 나선다. 키란은 “첫번째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및 글을 읽을 줄 모르고, 가난하고 억압받고 미개발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지식, 문화, 물질적 풍요의 시대로 끌어올린 것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한 쏘련의 승리와 중국, 쿠바, 베트남 혁명 및 제 3 세계 해방투쟁에서 수행했던 쏘련의 역할은 러시아혁명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의 역사, 실패, 업적을 이해하는 것은 전문적인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게 최고의 관심거리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쏘련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키란은 바로 이러한 쏘련의 역사를 볼 때,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전능하고 과대망상증과 피해망상증이 있고 잔인한 독재자”라고 묘사한 것이 잘못되었다면, 퍼가 스탈린을 “대중억압(mass repression)과는 관련이 없거나 이를 반대했고, 그를 전복시키려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이고 교육적인 해결책을 사용했고,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억압(repression)때문에 부당하게 비난을 받은 지도자”라고 묘사한 것도 또한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키란은 “1930년대의 숙청은 혁명적인 폭력(Revolutionary Violence)이라는 전후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고 하면서, 1930년대부터 2차 대전 발발 때까지 쏘련 사회주의가 국외 제국주의 세력들과 국내 반대세력에 의해 극도로 위험한 시기가 조성되자, 파시즘과의 생사를 건 전쟁의 수행을 준비하기 위한 통일되고 견고한 지도력을 세우기 위해서 심지어 과도할 정도로 숙청이 필요하였다고 주장한다.

키란은 “스탈린이 이 모든 숙청을 주재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숙청이 역효과를 낳게 되었을 때, 그것을 끝낼 수 있는 통찰력, 용기와 불굴의 강건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혁명과 국가는 독일의 침략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수백만 명 이상의 인민들이 고통을 받았을 것이고, 실제 죽은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쏘련 혁명의 역사의 정당성을 피력한다. 키란의 주장을 요약하면, 스탈린 시대에 벌어졌던 숙청이 왜곡되고 과장되게 알려졌지만 일부 무고한 사람들도 그 과정에서 숙청을 당했는데 그것은 치열한 계급투쟁 과정에서 벌어졌던 문제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키란의 반론에 대해 퍼의 반론 또한 매우 흥미롭다. 퍼는 그가 책에서 보여주고자 한 핵심적인 이슈는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밝힌 것이라면, 키란은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마치 퍼에게 흐루시초프의 거짓말을 증명해주는 것 뿐 아니라 실제 무엇이 일어났는가? 까지도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데서 둘 차이의 이견이 있다고 반론을 편다. 퍼는 거짓을 폭로하는 것과 진실을 밝혀나가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퍼는 자신의 책 주제는 오직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면, 키란의 반론은 흐루시초프의 거짓을 폭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진실을 밝히길 원했다는 것이다.

또한 퍼는 키란이 “퍼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내가 내 책에서 키란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연구하지 않고 내가 증명하기로 한 것만 증명하는 것에 국한시킨 것 때문에 키란이 내 책이 ‘매우 결함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토로한다. 퍼는 그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서 61개의 거짓에 대해 ‘폭로’ 했다고 해서 흐루시초프의 다른 진술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퍼는 오히려 흐루시초프가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충분히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왜 퍼는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거짓이라는 것만 밝히는데 가장 심혈을 기울였는가? 그 이유는 20세기에 세계를 가장 깜짝 놀라게 했던, 쏘련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전환점을 만들었던, 그리고 쏘련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956년 흐루시초프의 연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퍼는 거짓위에 구축된 ‘반(反)스탈린’ 패러다임의 근원을 밝히고 이를 제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8.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나는 이 책에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완전히 거짓이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스탈린이 ‘대량학살자’라는 거짓말과 ‘반(反) 스탈린’ 패러다임의 근원을 밝히고, ‘반(反) 스탈린’ 패러다임의 골격 중에 하나를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흐루시초프가 그의 연설에서 한 모든 진술들을 연구하고 조사하고 논쟁하지 않았다. 단지 61개의 ‘폭로’가 나의 연구의 주제이다. 이들은 세상을 놀라게 한 고발들이다. 흐루시초프 연설은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절반이 당 활동을 청산하게 만들었고, 직접적으로 중소분쟁을 낳았고, 후에 고르바초프가 약탈적인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위장술이 되었으며 쏘련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과거 50년간 공산주의운동이 흐루시초프의 연설과 흐루시초프와 그의 심복들에 의해 스탈린에 대한 지속적인 거짓말을 통하여 다시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흐루시초프가 세계를 놀라게 한 연설이 사실상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생동안 유지해 왔던 정치적인 신념의 기초를 흔드는 일이다.

흐루시초프는 ‘비밀연설’에서 스탈린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거짓말로 비난한 것에 대해 유죄가 있다. 흐루시초프는 트로츠키가 1930년대 쏘련의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함으로써 트로츠키를 부활시켰다. 트로츠키의 1930년대 쏘련역사에 대한 평가와 흐루시초프의 연설이 모두 반공주의 진영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모든 반공주의자들은 트로츠키와 흐루시초프의 연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의 거짓말이 드러난 만큼 트로츠키가 했던 스탈린과 쏘련사회와 정책에 대한 매우 편파적인 묘사는 비평적인 눈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에서 스탈린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아니라 흐루시초프가 그의 비밀연설에서 스탈린과 베리야에 대해서 거짓으로 주장한 것을 ‘폭로’한 것이다. 흐루시초프의 연설에는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뿌리가 있다. 그것은 쏘련의 역사 속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스탈린은 레닌의 분석을 그가 쏘련과 세계 공산주의운동에서 발견한 조건들에 적용하려고 했다. 레닌은 결국 맑스와 엥겔스의 통찰력을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레닌은 현대 공산주의의 창시자들의 저작들로부터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그 스스로 어떤 혁신을 주장하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레닌의 지침을 따르려고 했다. 그동안에 트로츠키, 부하린, 그리고 다른 반대파들도 레닌의 저작들 속에서 그들이 제안한 정책을 뒷받침 해줄 근거를 구했다. 흐루시초프는, 고르바초프를 포함한 그의 후손들처럼, 그가 선택한 모든 정책을 좌파 또는 레닌주의로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레닌의 언어를 인용했다.

그러므로 때로 레닌의 저작들과 레닌의 위대한 스승들인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 중의 그 무엇인가가 그의 충실한 계승자인 스탈린이 정직하게 만들어 놓은 오류(errors)들과 그의 부정직한 계승자인 흐루시초프가 그 자신의 배반을 은폐하기 위해 자행한 오류들을 가능하게 했다.

스탈린, 레닌, 맑스, 엥겔스는 공산주의 운동과정에서 그들의 최선을 다했지만 최초로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므로 오류도 많았다. 그러나 같은 오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는 일은 공산주의운동에서 우리의 선각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야 했던 성공과 실패의 교훈들을 낭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들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에서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새로운 오류, 창조적인 오류, 보다 고차원적인 오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맑스 엥겔스가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척 위장한다면, 레닌이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척 위장한다면 (마오주의자들은 문자 그대로 마오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로 트로츠키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최소한 그들이 성취한 것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비극은 20세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역사가 실패했다는 데 있다. 우리가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내지 않는 한, 우리는 익살극으로 파멸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범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유산에 대해 비평적인 눈으로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쏘련은 처음으로 공산주의 혁명(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한 국가였다. 우리는 쏘련이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한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죽자 스탈린을 보고 악한이라고 했다. 그게 문제였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쏘련 역사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인류의 공산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선조들의 지적, 헌신적, 현명한 경험을 배워야하고, 그들이 했던 것 중에서 옳은 것은 배워야하고, 그들의 잘못된 점을 피해야한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가 거짓으로 점철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우리는 정확한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우리는 거짓말로 된 총체적인 거짓말을 볼 것이 아니라, 실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어 필자는 퍼가 그의 책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 Khrushchev Lied, 2011)에서는 담고 있지 않지만 그가 우리에게 꼭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쏘련 사회주의 역사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9. 쏘련은 사회주의 사회였나요?

그렇다. 그들은 자본가들을 무너뜨리고 지주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왜 사회주의가 아니란 말인가?

[편집자 주: 여기에 대해서 로저 키란의 의견도 퍼와 비슷하다. 로저 키란은 “쏘련 사회주의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유일한 사회주의 체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맑스에 의해 정의된 사회주의(socialism)의 필수적인 요소, 즉 자본주의 사적소유, "자유시장", 자본가 국가를 전복하고 그것을 집단소유, 중앙계획, 노동자들의 국가로 대체했다.”고 주장하면서 쏘련은 사회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Roger Keeran and Thomas Kenny 2004, p.2)]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을 사회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타락한 노동자국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쏘련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 우리는 단지 트로츠키, 흐루시초프, 반공주의자들의 거짓말의 일부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은 역사를 전혀 모른다. 페리 앤더슨(Perry R. Anderson), 브레진스키(Brzezinski, Zbigniew K),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등은 반공주의자들의 견해를 믿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탈리아 몇몇 사람들과 알고 지내고 있는데, 모든 반공주의 논문들과 트로츠키 논문들의 90%는 증거가 없다. 이러한 논문들은 어떤 증거를 대지 못하면서 말하고 있다. 왜 그들이 말한 것을 그냥 믿는가? 어떤 사실에 근거한 증거도 없는 말을 믿는가?

사회주의의 정의를 볼 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사회주의는 없다. 트로츠키는 “쏘련이 사회주의가 아니다.”라고 보았다. 누구의 정의에 의한 것이어야 하는가? 쏘련은 집산화, 산업화를 했고, 강한 산업화국가를 만들었다. 20세기에 쏘련은 1930년대를 거쳐서 자본주의 없이 산업화한 유일한 나라이다. 트로츠키는 쏘련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사회주의의 정의로 볼 때,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쏘련이 사회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를 서로 다르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용어에는 단 하나의 정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 가지 원칙만을 들이대면서 사회주의다 아니다 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트로츠키는 거짓말을 했다.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쏘련에서 관료주의가 문제였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본질을 현혹(mystification)시키는 것, 즉,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완전히 자본주의가 발전할 때까지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에 도달하려면 매우 많은 소비재(consumer goods)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매우 발전한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면 소비재가 희소하므로 이것을 분배하는 역할을 할 관료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은 관료주의란 말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관료주의가 잘못 활용되고 있고 이러한 의미의 사회주의의 정의는 잘못된 것이다. 누가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화(goods)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는가?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서로 재화를 공유하는 것이지 누가 분배를 해줄 필요가 없는 사회이다. 이렇게 볼 때, 나의 견해에 의하면 트로츠키의 정의는 잘못된 것이다. 누가 사회주의가 단지 잉여재화(suplus goods)가 충분할 때만 가능하다고 했나? 이러한 사회주의의 정의는 맑스, 레닌, 엥겔스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들도 사람이라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사회주의를 꼭 이러한 방법으로만 정의해야하는가? 맑스주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 맑스와 레닌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맑스주의가 도그마(dogma)가 아니라면, 이것은 발전해야 한다. 맑시주의는 ‘방법’이지 정답이 아니다. 트로츠키의 견해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협소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가장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1923-1924년 트로츠키와 레닌의 논쟁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1920년대 큰 이슈는 “한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가?”였다. 많은 볼셰비키들은 처음에는 한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다른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23-1924년 이후 더 이상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이 운명을 다한 것인가? 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오직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공산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질문은 혁명이 고립되고 발전된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곳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었다.

멘셰비키는 “자본주의자들이 산업화된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멘셰비키는 모두 처음에 자본주의가 산업화를 이루고 나면, 자본주의가 어느 일정시기에 존재하면서 그 역할을 다 한 후에 사회주의로 나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멘셰비키는 지금 당장 혁명이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는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도 역시 산업화가 안 된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은 매우 유연했다. 레닌은 자본가들이 하려고 했던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트로츠키는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한 국가에서, 후진국가에서 사회주의를 만들 수 없다”고 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산업화를 할 수 없고 한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트로츠키는 “우리가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을 촉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우리는 혼자서만 생존할 수 없다.”고 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사회주의적인 관료주의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발전된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우리는 이 생산물들을 분배할 관료주의적 구조가 필요 없으나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만들기 위해 관료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우리는 자본가들이 산업화하기 전에 벌써 혁명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가들이 했던 것처럼 산업화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맑스는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공산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은 “우리는 한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이 해야 했던 것인데 그들이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후진적인 상태의 러시아에서 이미 혁명이 이루어졌으니, 우리 스스로가 발전된 산업화된 국가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혁명을 했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가서 자본가들이 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 왜 우리가 자본가계급이 산업화를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스탈린은 “우리는 물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발전되는 것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갈 필요는 없고, 우리 스스로 산업화된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레닌의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NEP)은 그 당시에 필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1920년대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지지했다. 이것은 제한된 한계 내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기능을 했으나 생산성이 증대할수록 모순이 증대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부농과 빈농, 농민과 노동자와 경영주 사이에 모순이 증대했다. 신경제정책이 그대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자본주의가 더 빨리 왔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신경제정책을 계속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의미에 불과하다.

쏘련에서는 혁명이후 1921년에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사회주의가 발전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레닌이 신경제정책을 지지했던 것이다. 레닌의 정책은 국가가 통제를 하면서 기업, 개인 기업가들의 사업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전으로 인한 불가피한 조치지만 공산주의 사회와 크게 모순으로 작용했다.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쏘련의 역사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요?)

현재 중요한 것은 어쨌든 쏘련사회가 자본주의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역사를 보자. 문제는 어떤 면에서 쏘련의 사회주의가 공산주의 이행으로 향하기보다는 자본주의에 의해 이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쏘련의 역사는 마치 교과서와 같다. 이것은 큰 스승이다. 우리는 쏘련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은 “이것이 쏘련의 역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실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들이 실수를 했다. 모든 사람들은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운다면 높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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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http://mltoday.com/subject-areas/books-arts-and-literature/khrushchev-lied-but-what-is-the-truth-1246.html
2.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
3. Grover Furr, Khrushchev Lied, Erythros Press and Media, LLC Corrected Edition, 2011.
4. Roger Keeran and Thomas Kenny, Socialism Betrayed: Behi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2004.
5. Bertell Ollman Market Socialism: The debate among socialists, Routledge 1998.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 저자 그로버 퍼와의 인터뷰(3부 최종)
“쏘련 사회주의 붕괴 원인은 무엇인가?”

  


[편집자주: 이번호에는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 저자인 그로버 퍼(Grover Furr)와의 인터뷰 3부를 싣는다. 1부에서는 쏘련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전환점을 만들었고 쏘련 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956년 흐루시초프 연설이 100% 거짓이라는 것을 밝힌 퍼의 견해를 실었고, 2부에서는 쏘련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퍼의 견해를 실었다. 이번 3부에서는 쏘련 사회주의 붕괴 원인과 운동 발전방향에 대해서 퍼의 견해를 인터뷰 형식으로 싣고, 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의 견해를 그들 저서에서 발췌하여 싣는다.]



10. 쏘련 사회주의 붕괴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쏘련 붕괴문제를 보려면 내부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쏘련 붕괴 원인을 반공산주의와 냉전 문제 등과 같이 쏘련 외부 문제에서 찾는다면 쏘련은 발전 기회가 없다. 항상 냉전과 반공산주의는 있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쏘련 붕괴 원인 중 하나로 시장경제를 든다. 참고로 로저 키란과 토마스 케니의 배반당한 사회주의(Roger Keeran and Thomas Kenny, Socialism Betrayed, 2004)라는 저서에서 시장경제에 관한 부분(3장)을 읽어보면 왜 그들이 시장경제로 나아갔는가? 에 대해서 나와 있다.

레닌은 맑스 엥겔스 저작들을 읽은 후 어떻게 혁명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1917년 쏘련 혁명이 일어난 뒤에 시민전쟁과 대기근이 있었다. 1차 대전 이후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1920년대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쏘련에서는 매년 당대회를 열어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정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지만 누구도 답을 갖지 못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20년 당시에는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가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가?”에 대해 통일된 의견일치도 없었고, 어떠한 해답도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스탈린 중심의 지도력이 논쟁에서 주도권을 획득한 후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개념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물질적인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즉 그 개념은 불평등(Inequality)이었다. 사람들을 일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임금에 차별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높은 임금으로 일하는 것을 촉진시키기 위해 임금 차이, 임금 불평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끝은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주의로 개념잡고 있던 것이 쏘련 붕괴에 대한 답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그것이 작동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사회주의가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쏘련이 첫 사례였다. 그들은 어떠한 청사진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행운이 없었다. 우리는 쏘련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데, 그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배울 수 없었다. 쏘련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최소한 중국인들도 쏘련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지만 쏘련인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쏘련 붕괴 원인에 대해 어떤 중요한 가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 우리는 이것을 밝혀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쏘련 붕괴 원인에 대해 몇 가지 가설들이 있다. 사회주의 정의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고, 시장경제주의가 문제였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내 의견은 공산당이 당 내부에까지 불평등을 도입했던 것에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1932년까지는 당에 임금상한제도(Party maximum wages, 어떤 공산주의자들도 어떤 액수 이상 임금을 벌수 없었던 제도)가 있었는데, 1932년경에 이 정책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이라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이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일부 나쁜 성향의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들이 되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높은 사회수준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당내의 특권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공산주의자들이 더 높은 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 문제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쏘련 공산당은 진정한 당원을 필요로 했다. 그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렇듯 당내 특권을 갖게 된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편집자 주: 맑스는 파리꼬뮌을 보고 관료들의 임금을 노동자평균 수준의 임금 이상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레닌 역시 이를 인용하며 관료들에 대한 특혜와 특권을 반대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물질적 생산을 독려하는 인센티브 제도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레닌도 자본주의가 생산을 단순화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는 보통의 노동자들도 사칙연산만 배우면 스스로 경영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의 경영 경험이 없었던 관계로 인센티브를 주고 부르주아 경영자한테 양보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맑스가 말했듯이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사회주의)에서는 착취의 철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분배 흔적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형식적 평등은 오히려 불평등이라고도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1932년이면 무엇 보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을 독려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더 많이 일하고, 유해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차이를 통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전위로 구성되는 당원들에 대해서조차 더 높은 임금과 보다 많은 권한이 집중되는 것이 특권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문제는 당원들 중 일부가 숙련 노동자일 수도 있고, 능력 있는 기업 경영자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 부문에 대해서는 퍼가 보다 구체적으로 인터뷰에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하게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생산독려를 위해 도입한 물질적 유인이 고착화, 심화되고 이것이 당과 당원을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관료주의의 온상이 되었다면 단호하게 척결해야 하는 문제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체 웹 부부의 공동저작인 소비에트 공산주의 : 새로운 문명?(SOVIET COMMUNISM : A NEW CIVILIZATION?), 1936년 2판, 1권 349쪽에서는, 당시에 이와 관련해서도 광범위하게 악선전이 유포됐다고 주장한다. 30년대 중반 당시 300루블로 제한됐던 당원 임금상한제도는 사회 전반의 봉급과 가격상승을 반영해서 600루블로 상향됐다. 몇몇 지역에서는 임금상한 기준이 더 낮게 책정되기도 했다. 다만 일부 기술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당원의 경우에는 이 상한선이 최고 900루블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예외는 이들 당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기술 숙련을 고무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예외는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에 당원들은 봉급의 20-30%, 극단적인 경우에는 50%까지 의무적으로 당비로 납부해야 했다.(2013년 1월에 추가한 주)]


스탈린은 관료주의 척결을 위해 부패하고 관료주의적인 공산당원을 쏘련 정부로부터 물러가게 했다. 그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스탈린이 민주주의적 개혁을 했다. 1930년 초반과 중반에 그가 옳았는지는 우리는 잘 모른다. 다만 스탈린은 매우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1930-1931에 스탈린이 가족들과 휴가를 갔을 때, 아이들은 “오렌지를 좀 주세요.” 라고 했다. 쏘련에서 오렌지를 구하긴 쉽지는 않겠지만 그의 아이들이 오렌지를 원하는 것으로 보아 그와 가족들의 삶이 매우 단순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상대적으로 매우 평범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다. 스탈린은 매우 작은 집에서 살았다. 한번은 키로프가 스탈린의 집에서 잔 적이 있는데, 스탈린이 그를 호텔로 데려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묵게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다.

개인의 부패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개인적 임금의 차이가 부패를 낳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은 살 것이 많지 않았다. 그들이 돈이 있다 하더라도 돈을 쓸 곳이 없었을 것이다.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과 음료를 다 사먹는데 다 쓰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그들이 부패했다고 하더라도 그 범위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지? 이해한다. 그들은 너무 소수였다. 또한 거기엔 전쟁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특권을 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매우 중요한 쏘련의 실패를 어떻게 볼 것인가? 쏘련에서 있었던 오류(Errors)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역사는 많은 오류들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쏘련의 역사는 많은 오류들을 겪으면서 나아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쏘련이 어떻게 오류를 겪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것이 문제다!” 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믿지 않는다. 냉전, 반공산주의는 답이 될 수 없다. 이게 답이라면 모든 게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답이라면 희망이 없다.  


[편집자 주: 로저 키란(Roger Keeran)과 토마스 케니(Thomas Kenny)는 배반당한 사회주의(Socialism Betrayed)의 발문에서 쏘련 붕괴 이유들에 대한 비판(A critique of explanations of the Soviet Collapse)을 하고 있는데, 편집자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키란과 케니는 지금까지 쏘련 붕괴를 설명하는 대략 6가지의 이론들, 즉 사회주의 결함(Flaws of socialism), 인민들의 반대(Popular opposition), 외적인 요인들(External factors), 관료주의적 반혁명(Bureaucratic counter-revolution), 민주주의의 결여(Lack of democracy)와 과도한 중앙집중주의(over-centralization), 고르바초프 요인(The Gorbachev factor)을 소개하면서 각각에 대한 비판과 자신들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모든 사회주의 체제가 "근원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파멸했다는 이론에 대해 키란과 케니는 쏘련 사회주의가 그 성취에도 불구하고 1985년에 많은 결점을 남겼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그 자체가 붕괴할 정도로 위기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농업집산화를 이뤄내고 독일의 2차 대전 침공을 막아냈던 쏘련 사회주의가 어떻게 1980년대에 겉으로 보기에 아주 덜 중요해 보이는 문제들로 인해 무너져 내렸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둘째, 인민들 반대가 쏘련의 사회주의를 파멸시켰다는 의견에 대해서 키란과 케니는 인민들의 불만족은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인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고르바초프 '개혁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셋째, 냉전과 세계경제에 기초한 외적인 원인들이 쏘련 붕괴를 유발시켰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미국 CIA가 쏘련 지도부에 침투했기 때문에 쏘련이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키란과 케니는 쏘련 붕괴의 가장 외적인 요인으로 1980년대 초에 냉전의 강화를 들고 있기는 하나 실제 미국으로부터 오는 외부적인 압박은 초기 경제적 제재, 사보타지, 외부의 침략보다 더 적었으며, 더욱이 이 외부적인 압박은 쏘련의 반응에 특정한 방향과 형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키란과 케니는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문제에 대해 고르바초프가 특별하게 반응을 보인 것이 붕괴의 가장 근접하고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넷째, 쏘련 붕괴 원인이 관료주의적 반혁명에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트로츠키가 1930년대에서 쏘련을 바라본 견해와 아주 유사하다. 트로츠키는 쏘련이 “이행기(Transitional)”였기 때문에, 만약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이 관료주의를 전복하지 않는다면 관료주의 그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로의 복귀를 위한 토대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 자체가 “새롭게 형성된 계급”으로 변해갈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이렇게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서 관료주의가 “새롭게 형성된 계급”으로 변해갔다는 논리는 주로 데이비드 콧츠(David Kotz)와 프레드 웨어(Fred Weir)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비록 바만 아자드(Bahman Azad)는 이 새로운 집단을 계급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고르바초프 같은 관료주의 세력들의 반혁명이 쏘련 붕괴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키란과 케니는 '위로부터 관료주의적 반혁명' 테제는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키란과 케니는 쏘련 사회가 당과 국가 관료들이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사용한 결과 실각했다고 보는 견해에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한다.

키란과 케니는 외견상으로 볼 때, 바만 아자드도 관료주의 엘리트들이 반혁명을 조장했다는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키란과 케니는 쏘련 역사에서 ‘어떤 정국의 추이’가 고르바초프 대실패를 위한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아자드의 지적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자드는 쏘련에서 진정한 문제는 흐루시초프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며, 쏘련의 문제들과 고르바초프의 정책들은 흐루시초프 시대의 정책들이 실패한 이후에 일어난 여진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자드는 안드로포프(Andropov)의 개혁 프로그램이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자본주의로 회귀했던 고르바초프 아래의 국가 관료들에 의해 강탈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키란과 케니는 문제는 관료주의가 본질이 아니라 당과 국가의 일부분을 부패시켰고, 관료주의 내부 뿐 아니라 외부에 쁘띠 부르주아 사고방식을 조장시켰고, 2차 경제 사업자들과 일부 관료들을 고르바초프의 기회주의를 위한 기반으로 변화시킨 2차 경제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쏘련이 민주주의의 부재와 과도한 중앙집중제에 의해서 몰락했다는 논지이다. 쏘련 몰락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사회주의 결함’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차이점은 ‘사회주의 결함’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회주의 체제가 문제라는 것이고, 민주주의 이론의 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단지 쏘련 방식’의 사회주의가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이 이론의 주창자들은 민주주의 제도의 결여와 경제의 과도한 중앙 집중이 스탈린, 또는 스탈인과 레닌에 의해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키란과 케니는 민주주의가 결여했다고 보는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론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선택(Choice)’을 숭배하는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우월성, 지배, 착취를 제거하는 의미로 ‘평등(Equality)'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다. 키란과 케니는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적 형태를 자기의 것으로 소화했던 것처럼, 사회주의도 민주주의적 기구를 발전시켰다고 보고 있으며, 비록 민주주의의 발전경로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 어렵지만, 쏘련은 인민들의 참여를 고무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한 정치적인 제도와 실천을 발전시켜왔다고 보고 있다.

또한 키란과 케니는 쏘련의 수동성에 대한 책임을 사회주의 정치제도에서 찾는 것은 또 하나의 문제라고 반박한다. 키란과 케니는 신문, 소비에트, 공산당 등을 포함한 많은 쏘련의 정치형태가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기반이 약화되어 대다수 쏘련 인민들이 재산 사유화, 가격조절장치 제거, 쏘련 해체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이 이미 증발되어버렸다는 점을 들고 지적한다. 또한 키란과 케니는 더군다나 고르바초프와 그의 공산주의자 지도자들이 전 인민들에게 그들이 레닌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더 좋은 사회주의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호도하면서 전통적인 사회주의 제도를 약화시키고 자본주의를 부활시켜 나갔다는 점도 지적한다. 결국 키란과 케니는 쏘련에서 인민들이 민주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 되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고르바초프와 그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더 좋은 사회주의를 약속하는 반면, 노동자들로부터 그들이 과거에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해왔던 제도들을 박탈해가면서 인민들의 삶의 질, 경제안정, 사회주의 그 자체를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여섯째, 쏘련의 멸망이 주로 고르바초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란과 케니는 고르바초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역사적․사회적 전후사정 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고르바초프는 단 하나의 “요인(Factor)”이 아니라, '어떤 전통(A certain tradition)'이라는 것이다. 즉, 키란과 케니에 의하면 고르바초프가 안드로포프로부터 분리되어 나왔을 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운동에서 선례들, 즉 부하린과 흐루시초프의 이념들을 대표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이념들은 불법적이고 사적 기업들의 이익을 반영했기 때문에, 당과 국가의 중앙권력이 약화되고, 사적재산이 정당화되고, 시장에 더 많은 자유가 허용됨에 따라, 1980년대에 더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요약하면 키란과 케니는 쏘련 붕괴는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인민들의 반대나 외부의 적에 의해서 기인한 것도 아니며, 쏘련의 사회주의가 자유민주주의나 혼합경제를 상징하는 사회주의의 어떤 이상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며, 한 사람의 배반의 역사도 아니라도 보고 있다. 키란과 케니는 쏘련 붕괴는 혁명 속에 내재해 있던 ‘어떤 경향의 승리(A triumph of a certain tendency)’라고 보고 있다.

키란과 케니에 의하면 쏘련붕괴 기원은 처음에는 쏘련 농민들의 특성에서 유래했고, 이후에 2차 경제에서 유래했다. 이 2차 경제는 소비자들이 1차 경제에 불만족하게 되었고, 또한 쏘련 당국이 2차 경제가 상징하는 위험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법을 강화해 나가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고르바초프 이전에 부하린과 흐루시초프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번영,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전망이 희생이나 투쟁 없이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중 체계도 없이 빠르고 쉽게 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경향이었다. 이것은 제국주의, 자유주의, 사적재산과 시장에 양보를 한 것이었다. 이 경향에 고착된 사람들은, 비록 그들 자신들이 영리와 사적 재산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이 진정 사회주의자라고 믿었다. 혁명에서 이러한 경향을 가졌던 고르바초프에 와서 이러한 경향이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고, 이 논리적인 결론으로 진행되었다. 이 경로가 새로운 사회주의가 아닌 새로운 야만(Barbarism)으로 이끌었을 때, 오직 고르바초프만이 이 경로를 깨달은 완전한 바보였다.


(쏘련 붕괴 원인으로 쏘련이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쏘련이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쏘련이 붕괴한 것에 대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쏘련 내에서 계급이 성장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것은 키란과 케니의 저서에도 언급되어 있다(Roger Keeran and Thomas Kenny, Socialism Betrayed. 2004). 쏘련 내에 자본가들이, 즉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1970-1980년대에 사적경제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적자본주의를 운영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훔친 것이다. 키란과 케니에 의하면 1980년대에 쏘련에는 백만장자가 있었다. 노동자를 고용하고 비밀로 불법으로 사적기업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법률가들이 있었다. 법률가들은 “그들이 처벌받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더 시장경제가 필요하다”면서 자본가들을 옹호했다. 쏘련의 목표는 “더 생산이 발전할수록 시장은 덜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쏘련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씨가 되었다. 화폐경제가 확장되었던 것이 쏘련 붕괴의 중요한 이유이다. 키란이 이 부분에 대해 논의했다. 스탈린은 시장경제가 축소되었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생산물이 점점 더 사람들의 요구(Need)에 의해 분배되면 시장경제는 점점 더 사라져갈 것이라고 보았다. 스탈린 하에서는 시장경제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쏘련은 반대방향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시장경제가 확장되어가면서 불평등이 확대되어갔던 것이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은 이러한 이유에 대해 논쟁한 것이다. 문화혁명도 이러한 부분에 대해 논쟁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력은 쏘련을 비판했는데, 중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쏘련이 잘못되었다면 중국도 잘못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를 돈으로 살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반대이다. 시장경제의 확장이 쏘련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다. 키란(Roger Keeran)과 케니(Thomas Kenny)가 쓴 [배반당한 사회주의(Socialism Betrayed) 3장 (The second economy)에서 이것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우리 목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가는 중간단계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가지 못하고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갔다. 이것이 문제였다. 사회주의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사회주의 안에는 너무 많은 자본주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부화될 때, 공산주의로 갈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자본주의로 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주의가 우리의 목표인지? 진정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확신하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나는 사회주의가 나의 목표라고 말하지 않는다.  


[편집자주: 키란과 케니의 저서에 있는 2차 경제(3장)의 내용을 더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키란과 케니(2004)는 쏘련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시장경제, 소위 2차 경제 활성화를 들고 있다. 키란과 케니에 의하면 1953년 이후 사회주의 내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가진 새로운 경제적 근거가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2차 경제라는 것이다. 이 2차 경제란 인구집단이 첫 번째 사회주의 경제이외에도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사적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2차 경제 기원은 1차 경제에 속한 노동자나 농부들이 합법적으로나 불법으로 개인 활동을 통해서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하는 노동시간이 증대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수 년 동안 2차 경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게 되고 소득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소부르주아 계층을 부활시켰다.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시대의 가장 부패한 집단이 이 2차 사적경제와 그것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계층에 속해 있었다. 사적경제활동은 사회주의 하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나, 스탈린 시대에서는 절제되었지만 그 이후 흐루시초프 시대에서 활력을 찾기 시작했고, 브레즈네프 시대에서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시대에 와서는 1차 사회주의 경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2차 경제는 쏘련 사회주의에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2차 경제는 소득, 생산, 재분배 체계의 사적인 근원을 창조 또는 재창조 했다. 2차 경제는 광범위한 부패와 범죄를 낳았다. 2차 경제는 사적인 기업들을 정당화하는 사상들을 낳았다. 2차 경제는 체계의 비판자들과 반대자들을 위한 자금 공급원이 되었다. 2차 경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사상을 위한 물질적인 기반을 제공했다.

쏘련 사회주의는 대부분의 사적인 경제활동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어느 정도 사적인 경제활동을 허용했다. 쏘련의 법은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 고용되어있거나 심지어 고용되어 있지 않은 개인에게 각각 3/4에이커에 해당하는 작은 농토를 허용했다. 1974년에 개인토지에 소요된 노동시간은 전체 농업에 소요된 노동시간의 1/3이 되었고 전체 경제의 1/10이 되었다. 개인의 농토에서 생산된 생산품들을 팔기위해서 소위 말하는 ‘집단농장시장(Collective farm markets)'이 발달했다. 법적으로 사적인 경제활동이 허용되자 사회화된 재산들이 불법적으로 남용되었다. 예를 들면, 곡식 씨앗, 물, 장비, 비료, 사료, 운송수단 등을 개인의 농토를 일구는 데 사용되었고, 생산물들을 시장으로 가져가는데 사용되었다.

1953년 이래 불법적인 영리활동이 합법적인 활동보다 더 극심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가장 중요한 범죄적인 경제활동형태는 국가로부터, 즉 노동현장․공공기관으로부터 물건을 훔치는 형태였다. 농부들은 가축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집단농장의 사료들을 훔쳤다. 노동자들은 판매하기 위해 자재, 도구들을 훔쳤다. 운전기사는 공적인 차량을 비공식적인 택시로 이용하기 위해 가솔린을 훔쳤고, 의사들은 의약품을 훔쳤다. 때로 국가로부터 훔치는 일이 대량으로 또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 정책 결과 거의 "모든 사람들(Everybody)"이 2차 경제에 참여했고 이것이 상품과 서비스를 분배하는데 지배적인 힘이 되었다. 키란과 케니는 1988년에 축적된 개인의 부는 30-35%가 될 것이라고 추정했고, 여러 다른 연구자들도 2차경제로부터 오는 소득이 1969-1990 사이에는 16%(Byung-Yeon Kim 2003)에서 약 28-33%(Grossman 1990)라고 추정했다.

쏘련에서 2차경제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차 경제를 손상시켰다. 2차 경제는 불법 경제를 확장시킴으로써 합법 경제가 수행되는 것을 방해했고, 경제계획의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소득불평등을 증대시켰고, 쏘련 경제를 악화시켰다. 2차 경제는 또한 공산당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당 간부들과 국가 관료들이 2차 경제에 속한 사적 기업들로부터 뇌물수수와 물질적인 지분을 받게 됨으로써 이들 관료들이 개인 무역이나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들은 사실 불법의 돈을 긁어모으는 형태에 관여했다.

그로스만(Grossman, 1998)에 의하면 쏘련에서 1979년에 부패, 즉 쏘련 관료들의 뇌물수수가 극단적으로 널리 퍼져서 공식적인 모든 위계구조에까지 상하로 다 확산되었다.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기 전에도 쏘련 공산당과 쏘련 정부 내에서 2차 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이 그 자체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80년대에 와서 2차 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쁘띠 부르주아계급이 성장했고, 당과 국가의 부패한 특정 집단이 자본주의, 자유시장, 사적소유, 자유기업, 부르주아적인 “자유”로 향하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왜 당이 부하린과 흐루시초프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극복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답이다. 결론적으로 키란과 케니는 1987년에 고르바초프가 우경화되었고 쏘련의 사회주의가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부하린과 흐루시초프의 전통과 2차 경제의 소부르주아의 탄생과의 결합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11. 우리가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지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먼저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한다. 레닌과 스탈린도 공산주의로 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맑스는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맑스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대해서 말했다. 공산주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맑스가 말한 바이다. 명백하게도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붕괴되어야 공산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는 국가가 사라지고 국가가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즉 자본주의가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국가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군대가 있는 한 국가가 필요하다. 맑스, 엥겔스, 레닌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 군대에서 활동을 해야 한다. 누군가 국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당을 조직해야 한다. 당이 국가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다시금 쏘련과 중국의 역사를 배워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회피할 수 없다. 군대가 어떻게 조직될 것인가? 모든 사람이 군대에 속할 수도 있다. 누가 이들을 조직할 것인가? 당이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사회가 필요한 부분을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국가, 당, 어떤 조직이 필요하다. 또한 군대지도력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군사독재가 될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호연결하고 조직하고 분배할 어떤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조직이 필요하다. 아마 우리는 당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또는 아마 우리는 국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길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가 필요하며 어떻게 이를 건설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과거의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같은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불행하게도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것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원한다”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들이 사회주의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무엇을 원하는 지도 잘 모른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라면 우리는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본가들은 공산주의운동에 해악을 가하면서 자본주의가 오직 대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쏘련, 중국, 베트남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고민해야할 가장 큰 문제는 "왜 쏘련이 자본주의로 변화했는가?"이다. 쏘련 사회는 점점 더 계급이 소멸된 사회로 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노/정/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