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

한국전쟁 60주년, 다함께 국가자본주의의 역사왜곡과 파산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7. 13:35

한국전쟁 60주년,

다함께 국가자본주의의 역사왜곡과 파산

 

 

 <노동자정치신문>[ 64호(통합 76호), 2010년 6월]

 

 

 

 

평화는 전쟁의 휴지기이자 연속

계급투쟁에서 중립이 의미하는 것

 

 

한국전쟁(조선반도 전쟁) 60주년이 되었다. 누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는가? 한반도(조선반도) 내에서 전면적인 물리적 전쟁은 끝났지만 정전협정은,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고 단지 전쟁의 휴지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노근리사건, 보도연맹 사건, 여수. 순천 민간인 학살 사건, 4,3제주도 민간인 학살처럼 한국전쟁은 여전히 학살의 상처와 끔찍한 기억을 남기고 있다.

 

미제국주의는 한국전쟁 막바지에 체결된 정전협정 이후에도 불구하고 한미군사동맹이라는 이유로 남한에 주둔하며 제국주의 이해를 관철시키고 있다. 남한 정부는 반공을 기치로 미제국주의 하수인 역할을 하며 미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국가보안법을 내세워서 국내 인민들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해 왔다. 이러한 반공과 국가보안법은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군사정권은 이를 근거로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죽이고 가두고 억압하였다. 또한 이러한 반공주의는 미제국주의의 패권을 바탕으로 북에 대한 고립 말살 정책을 합리화하는 강력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천안함 사건 역시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에 기초한 한미일 제국주의 동맹과 군사침략 훈련 중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명박정권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전쟁기념관에서 발표했다. 여전히 한국전쟁은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와 전쟁의 연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계급적 이해는 단순히 과거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넘어 변혁의 문제, 변혁의 태도에 대한 문제, 북사회주의에 대한 입장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반공주의는 여전히 거대한 힘으로 우리사회를 짓누르고 있고, 우리의 내면세계와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이 반공주의가 한국전쟁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은폐하고 있고 계급적 관점을 가로막고 있다. 특히 트로츠키 진영 중 국가자본주의 세력들은 급진적인 좌익주의의 외피 아래 반공주의를 내면화하고 신념화하고 있다. 우리는 우익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한국전쟁에 대한 왜곡과 몰역사성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좌익적 언사를 내뱉으면서 결과적으로 미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국가자본주의 입장에 대한 폭로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국가자본주의 입장은 다함께 역시 한국전쟁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한국전쟁에 대한 국가자본주의 입장이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이 소련·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면서 사실상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했다는 일부 종파주의자들의 근거 없는 음해를 반박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한규한, 레프트21 34, 한국전쟁 60주년 열강의 힘겨루기가 낳은 끔찍한 파괴와 살육)고 변명하고 있다.

 

미국도 쏘련도 아닌 오직 국가자본주의 입장인 이들의 변명은 오히려 이들의 국가자본주의 역사인식의 몰역사성과 몰계급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쏘련과 북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단지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다는 국가자본주의론을 가지고 한국전쟁은 단지 미쏘 제국주의 대리전에 불과했다고 하고 있다. 쏘련 몰락에 대해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이므로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국가자본주의자들이 이번에는 한국내전에 대한 인식에서도 역시 기회주의적 입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 입장에 대한 비판인 한국전쟁, 남북전쟁인가? 계급내전인가? - 사노련 국가자본주의의 몰역사성과 몰계급성, 반동성’(노동자정치신문 53)이라는 글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현대사의 거대한 계급투쟁과 이러한 모순의 최대의 결절점인 한국내전을 지배계급 간의 전쟁이라고 보는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 입장이 얼마나 몰역사적이고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되는 반동적인 이론인지를 폭로했다. 이러한 비판은 같은 한국에서 국가자본주의 원조세력인 다함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가자본주의 세력들의 역사인식과 계급적 관점은 결과적으로 반공주의와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되는 몰계급적인 입장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왜곡하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다. 이들은 중립적 입장으로 한국전쟁을 평가한다고 하고 있다.

 

우익은 한국전쟁이 공산 침략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방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상당수 좌파는 한국전쟁을 모종의 민족해방 전쟁이나 혁명전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두 주장 모두 틀렸다. 한국전쟁은 당시 미국과 소련이 벌인 냉전 경쟁의 산물이었다. 전쟁을 벌인 두 진영 모두 자유와 인권, 또는 해방의 주체들이 아니었다.”(한규한, 레프트 21 33, 한국전쟁 60주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이들은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는 우익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전쟁이 민족해방 전쟁이나 혁명전쟁이라는 점을 반대하고 있다. 미국과 쏘련 제국주의가 벌인 대리전적 전쟁이라고 하면 전쟁의 주된 역사적 기원과 내전을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적 차원의 공산주의와 제국주의의 대립이라는 성격을 은폐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미일 제국주의의 밀약에 의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와 재지배

 

 

단순히 발발시점인 1950625일과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를 중심으로 보면 전쟁의 계급적 성격과 본질적인 기원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먼저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

 

문제는 727일 오전부터 시작된 태프트와 가쓰라 사이의 장시간에 걸친 밀담인데, 그 자리에서 양자간에 성립된 양해사항은 간단히 말해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소이다.

태프트가 이 밀담의 내용을 전보로 본국 정부에 보고한 것은 729일이었으며, 이 전문 보고서를 읽은 루스벨트가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승인한다는 답전을 태프트에게 띄운 것이 731. 그리고 이 답전을 받은 태프트가 마닐라에서 가쓰라에게 그 내용을 알리는 전문을 띄운 것이 87일이었소이다. 보통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알려진 문건은 729일 태프트가 일본에서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을 말하는데, 미국이 국제법상의 조약도 아닌 밀약의 형식으로 비밀리에 일본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으리라 믿는 바이외다.(정경모 통일운동가, 태프트-가쓰라 밀약·일의 갈라먹기,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2009.08.25)

 

한국전쟁은 이렇게 미일 제국주의의 밀약에 의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침략과 지배로부터 근원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지배는 전 세계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일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한 열망은 미일 제국주의의 공동 이해에 의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교차지배를 낳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간 공동의 이해는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을 둘러싸고 대립과 충돌, 제국주의 간 전쟁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제국주의 전쟁인 2차 세계 대전과 미일 제국주의의 태평양 전쟁까지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그 본성상 파시즘이 금융자본의 가장 패권적이고 반동적인 침략정책이므로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침략으로 그 본성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세계2차 대전은 파시즘과 쏘련 사회주의의 전쟁을 한 축으로 해서, 독일, 미국, 이탈리아 같은 파시즘적 제국주의 국가와 미, , 프랑스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국가 간의 대립과 전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시즘 독일이 쏘련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패배하게 되고, 중국 공산당의 혁명 승리로 일본 제국주의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면서 반파시즘 전선이 무너지자 이제는 쏘련 사회주의와 미국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냉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당시 쏘련은 독일 제국주의 파시즘과의 대조국 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 이후에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면전을 서두르게 되었다. 쏘련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전이 당시 국제정세를 보아서 쏘련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되자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패망 이후에 쏘련에 앞서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획득하려 했다.

 

여기에 새롭게 알려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서 조선을 해방시키려는 주체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를 일본의 지배하에 다시 두려고 했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하여금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를 하게 하는 것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제국주의 전초기지의 역할을 일본이 미제국주의를 대신해서 수행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의 이해와 절대적으로 일치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실상 패망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 미국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하더라도 패망한 일본이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권 하에 있으므로 미국의 간접적인 지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미제국주의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재지배는 반공산주의라는 미국와 일본의 공동의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원래 미 제국주의는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 한반도 이남에서 수십 년 동안 집적적인 신탁통치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 의도가 쏘련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면서 미국은 쏘련과의 대결로 한반도와 만주를 획득한 뒤 일본과 한반도에 대한 영향을 유지하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활시켜서 반공산주의 동맹을 맺으려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2의 카스라-태프트 밀약이라고 하는 캐넌 설계도이다.

 

케넌 설계도는 다음과 같은 것인데, 간단히 말해서 조선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일본의 구식민지는 다시 한 번 일본에 통치를 맡기는 것이 미국에는 이득이라는 것이외다.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면, 일본의 영향력과 제반 활동이 조선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에 미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될 날은 반드시 올 것인데, 그날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을 완화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현실적인 유일한 방도인 까닭이다. 힘의 균형을 이용한다는 구상은 미국의 외교정책상 새로운 것은 아니며, 현재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이와 같은 정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이러한 정책을 채용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들(국무부 정책기획본부)의 일치된 견해이다.’ ....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회복시킨다는 미국의 의도에서부터 베트남전쟁이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일본의 힌터랜드(배후지)로서 조선과 만주를 우선 미군의 군사력으로 점령한 뒤 그 지배권을 일본에 넘겨준다는 설계도는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별로 놀랄 만한 것은 아니었고, 6·25전쟁은 어차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으니만치, 1발을 쏜 것이 김일성이었나 이승만이었나를 캐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하는 바이외다.(정경모, 한반도서 소련과의 전쟁 준비한 미국,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2009.12.21)

 

이러한 미일 제국주의의 이해에 따른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와 해방 이후의 미국의 한반도 이남 지배와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일본 제국주의의 새로운 제국주의 통치와 지배가 당시 정세의 핵심이었다.

 

당시 조선 민중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해방되면서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 이후에 남과 북에서는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가 자발적으로 건설되면서 사실상 해방 조선의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를 대신한 미제국주의의 한반도 이남 점령은 조선민족의 해방과 자주적인 독립 국가 수립의 열망을 한 순간에 강탈해 갔다.

 

미국은 한반도 이남에 진주해 군정을 실시하면서 새로운 점령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군정은 이 통치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일제 시절의 폭력적이고 관료적인 통치기구를 고스란히 부활시켰다. 해방 이후에 갈 곳을 몰라 하던 친일분자들, 지주들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민주당 같은 우익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조선민중을 악질적으로 탄압하고 고문하던 경찰들이 그대로 경찰기구를 장악하게 되었고, 친일 부역자들이 행정기구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북의 지주 토지 몰수로 인해 지주들과 반동분자들이 대거 남하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북청년단이라는 반공조직을 만들어 미군정에 협조하고 한민당의 꼭두각시가 되어 악질적으로 민중들을 학살하고 탄압했다.

 

이남의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진주 이후에 자발적으로 친일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치안을 담당하기 시작했는데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을 탄압하고 와해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일제가 남긴 공장을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운영하던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말살하려 시도했다. 미군정은 일제에 의한 토지 지배를 대신해서 인민위원회가 몰수한 토지를 강탈하고 지주-소작관계를 부활하여 친일분자에서 반공 친미주의자로 변신한 지주들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해 주었다.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과 미군정에 의한 미곡수탈 정책, 지주와 부농에 의한 미곡의 저장은 당시 조선민중들의 봉기와 저항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경찰들은 미군의 미곡 수탈 정책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폭력기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 정책은 농민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저항도 낳았는데 미군정의 쌀배급 정책이 식량가격의 폭등으로 나타나면서 노동자들의 쌀배급량 인상이라는 요구를 낳았던 것이다. 이것이 469월 철도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전국적인 총파업과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10월 봉기를 낳았다. 미군정은 경찰과 우익 청년단을 내세우고 직접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국적인 총파업과 봉기를 진압하고 민중들을 체포하고 대량학살 하였다.

 

이러한 미제국주의의 점령정책과 하수인인 정치세력과 경찰들에 대한 분노는 계속적으로 민중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와 함께 48년에는 이승만을 내세운 미군정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서 48년 여수 순천반란 사건과 제주 4.3봉기를 낳았던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은 이러한 민중봉기에 대해 수십만의 민중들을 참혹하게 대량 학살했다. 이것이 미제국주의의 이남에서의 지배가 낳은 결과였다.

 

반면에 북에는 쏘련군이 진주했지만 자주적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인 통치기구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북에서는 해방된 지 9개월 만에 토지혁명을 통해 농민을 착취하던 지주토지를 몰수하고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리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여 지주제를 소멸시켰다. 주요 산업기반이던 공장은 국유화되었고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장, 노동조건 개선, 성별 차이 없는 동일한 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급, 남녀평등법 등 노동자와 여성을 위한 각종의 진보적인 법률들이 만들어졌다. 친일파들은 토지를 강탈당하고 지배세력들은 기득권을 상실하면서 일제 잔재가 뿌리 뽑혔다. 대신에 일본 제국주의에 무력 항쟁하던 노동자 농민 출신들이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국가자본주의,

시간의 검증이 아니라 역사적 파산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함께와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소련이 세운 북한 체제 역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역시 노동자자주관리 운동을 부정했고, 인민위원회는 자치적 성격을 잃은 채 소련 정책의 전달벨트로 전락했다. 소련의 지령에 따라 진행된 인민민주주의 혁명결과 북한에서는 국가가 자본축적을 관장하는 체제가 성립됐다.”(한규한, 한국전쟁 60주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레프트 21 33)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쏘련이 인민위원회의 자주적인 활동을 보장한 것은 이북에 쏘련을 이식한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북에서의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조치들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도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종파주의적인 모략이지만 남에서의 격렬한 대중봉기에 비해 북에서 이러한 조치가 인민들의 열광적인 지지 아래 추진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설사 이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식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해방된 조선 인민들의 요구와 완전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에서의 진보적인 조치는 요즘의 우익들이 벌이는 북풍과 다른 측면의 북풍이 되어 미군정과 이승만 도당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 받던 남의 민중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다함께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이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기 전에 이미 남한에서 지주-소작제는 약해지는 추세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에서야 비로소 북의 토지혁명에 자극을 받아 이승만정권이 취한 유상몰수 유상분배 정책으로 봉건제적 유제인 지주-소작관계 대신에 자작농이 대거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승만정권의 토지개혁 정책은 이후 자작농의 대거 몰락을 낳고 이들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여 광범위한 저임금 노동력의 기반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다함께의 중립적 이해와 다르게 미일 제국주의의 밀약을 통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 지배와 해방 이후의 미제국주의의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의 말살 기도 외에도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부활시켜서 이를 통해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미제국주의는 쏘련의 대일본전 참전으로 쏘련이 만주를 점령하고 일본군과 맞서 한반도로 진군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3.8선 분할점령을 직접적으로 제안하였다. 또한 조선의 독립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의 신탁통치 제안을 하고, 쏘련의 반대로 이것이 무력화되고 조선의 실질적인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의 길이었던 모스크바 협정문을 미군정과 우익들을 내세워 이것이 신탁통치안이라고 하여 반탁운동을 하게 하여 파기하였다.

 

이러한 미제국주의의 의도와 이후 미일 제국주의자들의 전략은 미일 제국주의 협력에 의해 한반도를 재지배하고 이를 통해 반공산주의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 지배 의도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불러일으킨 주요한 원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6.25 이전에 469월 총파업과 10월 무장봉기 48년의 4.3봉기 등으로 인해 이미 한반도 남쪽에서는 사실상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48년 민중봉기를 유혈로 진압한 미군정과 이승만 도당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아서 해방 이후 자주적인 조선민중들의 자주적인 통일국가 수립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데도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악질적인 종파주의와 역사왜곡에 기초해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도 아니고 혁명전쟁도 아니라고 한다. 대신에 이들은 한국전쟁이 미쏘 제국주의의 대리전이라고 한다. 이들이 말하는 냉전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민중과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대립과 내전, 이러한 제국주의 진영과 쏘련, 중국 사회주의와의 대립이라는 국제적인 성격을 외면하고 무의미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함께는 이에 대해 장군멍군 식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과정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 책임이 있었다.”(한규한, 한국전쟁 60주년 열강의 힘겨루기가 낳은 끔찍한 파괴와 살육, 레프트 21 34)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전쟁이 2년 이상 계속된 것에 대해서 순전히 열강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같은 글)고 몰과학적인 심리분석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미국과 쏘련이 벌인 냉전 경쟁의 산물이라고 하고 있다. 냉전 경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냉전은 제국주의 간 전쟁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제국주의 진영과 쏘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과 투쟁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국가자본주의론에 바탕을 두고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라 보고 있으며 미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라고 보고 있다. 쏘련을 제국주의라고 보는 입장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독점자본의 자본수출을 바탕으로 타국에 대한 지배와 침략을 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고 아무런 과학적 인식 없이 한국전쟁을 다만 열강들의 자존심, 힘겨루기라는 식으로 규정내리고 있다.

 

이들은 우익들은 한국전쟁의 책임을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돌리려 하지만, 이승만과 미국이 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결코 김일성과 스탈린이 져야 할 몫보다 가볍지 않다.”(같은 글)는 글로 자신들의 몰역사성을 은폐하고 중립성으로 가장하지만 이러한 중립주의가 역사왜곡이자 미제국주의를 결과적으로 옹호하는 것임을 외면하고 있다.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이론가인 이언 버철은 당시 영국에서 국가자본주의 입장인 자신들만이 중립적 입장에서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의 구실은 미미했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 정부가 미국을 워낙 맹목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영국 경제에 상당한 파급효과가 있었다. 클레먼트 애틀리 수상은 즉시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결정했다. 군 복무 기간을 18개월에서 2년으로 연장했다. 또한 영국에 주둔하는 미군 폭격기 수가 180대에서 1천 대로 늘어났고 미군이 사용하는 비행장도 세 곳에서 30곳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움직임에 일관되게 반대한 사람들은 사실상 스탈린주의에 친화적이었던 소수 의원들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 좌파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헤게모니는 확고했다. 워싱턴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사람들이 모스크바의 거짓말에는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곤 했다. 극소수였던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대부분 북한 정권과 그 후원자인 러시아 정권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다.”(이언 버철,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워커> 레프트 21 34,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었던 전쟁)

 

이언 버철은 영국 노동당의 미제국주의 옹호 정책과 한국내전을 틈타 영국의 군사정책을 일관되게 반대한 사람들은 스탈린주의 의원들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한국내전에 대해 중립성을 반대하고 반제국주의 입장과 북 방어 입장을 취했던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북과 러시아 정권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여기에 휘둘리지 않고 시간의 검증을 견뎌냈다고 자랑하고 있다.

 

남한이 승리한다면 미국의 영향력이 북쪽으로 확대될 것이고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될 것이다.

반대로 북한이 승리한다면 한국은 소련과 같은(즉 국유 산업에 대한 대중의 통제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관료적 국가의 복제판이 될 것이다(같은 글)

 

그런데 영국의 이른바 스탈린주의자들과 반제국주의와 북 방어 입장을 취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영국 내에서 영국 노동당의 친미 제국주의 입장과 군사정책에 맞서 올바르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자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시간의 검증은커녕, 한국 내전 당시 영국 내에서 중립적인 입장으로 제대로 된 투쟁을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월남전에서 전 세계적인 미제국주의 규탄과 반전 운동이 고조되자 초기에 중립입장을 취했다가 나중에야 이러한 반제국주의, 반전 운동에 기회주의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완전히 파산했다.

 

한국전쟁이 미쏘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제국주의 대리전이므로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다.”는 국가자본주의자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역사적 파산을 맞았으며 반동적인 것이다. 결국은 이를 통해 역사왜곡과 미제국주의의 문제에 대해 본질을 은폐하게 만든다. 또한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과 쿠바를 타도해야할 국가자본주의 체제, 착취체제로 봄으로써 북과 쿠바에 대한 미제국주의의 봉쇄정책과 말살정책에 동조하게 되는 반동적인 이론인 것이다. 첨예한 계급투쟁의 결절점에서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은 결국 중립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내전 60주년을 맞아 좌익의 이름으로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국가자본주의자들을 규탄하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