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

한국전쟁, 남북전쟁인가? 계급내전인가? - 사노련 국가자본주의의 몰역사성과 몰계급성, 반동성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7. 13:32

한국전쟁, 남북전쟁인가? 계급내전인가?
- 사노련 국가자본주의의 몰역사성과 몰계급성, 반동성

 

<노동자정치신문>[53호(통합 65호, 2009년 6월)   

 

 



강요된 반공주의와 적극적으로 내면화된 반공주의


한국내전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와 이 식민지 통치로부터의 해방, 미제국주의 진주부터 시작된 새로운 지배 체제의 형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에 의한 억압과 지배는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 한국내전과 분단을 낳았고, 이 분단체제는 이후 한국사회를 수십 년 동안 국가보안법과 각종 악법을 동원한 파시즘적, 병영적 군사독재와 반동체제로 만들었다. 군사독재가 물러난 지금에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고, 반공주의가 여전히 전체 사회의 활력과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는 학문적 탄압뿐만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에 대한 악랄한 탄압, 조직파괴, 반공교육 등 전 사회에 반공주의의의 악령을 뒤집어씌웠다.

이러한 반공주의에 맞서서 수많은 민중들이 저항해 왔다. 그리고 수많은 진보적, 양심적 학자와 교사 등이 해방 이후 단절되고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 세우려고 투쟁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써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인식의 일부가 바로 세워졌다. 이 새로운 역사인식은 우익과 지배계급에 의해 날조된 역사 중 지극히 일부의 복원임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조중동, 문화관광부 등 지배세력들은 좌편향 된 교과서라고 난리를 치고 있다. 저들이 저렇게 난동을 피우는 것은, 지배계급의 학살에 의해 민중들의 피로 얼룩진 현대사가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계급지배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훼손하고 국가권력의 폭압적 본질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사의 왜곡은 지배계급에 의한 ‘계급투쟁의 연장’인 것이다.(노동자정치신문 제47호, 「4.3제주봉기, 여순봉기 60주년 과거사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연장」)

그런데 이러한 왜곡된 역사인식과 반공주의가 지배계급에 의해 강요돼 왔다면 최근에는 운동진영 내에서 능동적으로 반공주의를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다. 우익청산주의가 소련의 몰락 이후에 개량주의로 나타났다면 이들은 트로츠키주의라는 급진적 이름 뒤에 숨어 반소반공의 좌익 청산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우익 반공주의와 맞닿아 있다.

트로츠키주의 진영 특히 국가자본주의 세력들은 소련의 몰락에 대해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다함께, 사노련, 해방연대 등에서는 1930년대 이후 소련과 사회주의 체제를 표현상의 차이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반동체제로 보고 있다. 사노련은 북핵문제(사실은 미제국주의의 북에 대한 고립말살 정책)에 대해 ‘지배자들 간 대결’이라며 중립적이거나 양비론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반공주의자들의 핵확산금지의 본질은, 자국이 가진 핵 이외의 핵보유를 거부하는 핵독점의 패권적 논리에 다름 아니다. 사노련의 북핵실험에 대한 비난은 중립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제국주의의 핵독점 논리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초기 IS(국제사회주의자들)의 입장 역시 지배자들 간의 전쟁이라는 이유로 중립을 취했다. 1930년 대 이후의 소련과 모든 사회주의 체제를 반동체제로 규정하는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 입장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지배자들 간 전쟁’에 불과한 것이 된다.

현실의 치열한 쟁점과 역사적 격동기에 방관과 중립은 중립이 아니라 바로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의 편을 드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내전이라는 역사적 격동의 순간에 대해 국가자본주의자들이 취하는 기회주의적 중립의 입장이 어떻게 반소반공주의로 연결되면서 우익들의 주장과 일치하게 되는지를 밝힐 것이다. 우리는 한국내전의 기원과 계급적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제국주의와 한국사회 지배계급의 반동성, 야만성과 이들과 결과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사노련 등 국가자본주의자들의 몰역사성, 몰계급성, 그리고 반동성을 폭로할 것이다.  



한국내전의 기원과 계급적 성격


한국내전(조선반도 내전)은 6.25전쟁으로 통칭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반공우익적 논리(단순한 논리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지배하는 힘)는 한국내전의 성격을 수십 년 동안 은폐하고 한국내전의 본질을 과학적, 계급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가로막아 왔다. 6.25전쟁으로 한국전쟁을 명명하는 것은 전쟁의 대규모 발발 시점을 기준으로 전쟁의 원인과 전쟁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남침 혹은 북침이냐 아니면 남의 유도에 의한 북의 남침설이냐는 논쟁이 오랫동안 진행됐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밝힌다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전쟁의 본질이 아니고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고 은폐할 수 있다.
“전쟁은 계급투쟁의 연장”이라고 했다. 한국내전은 한반도 내에서 해방 이후에 치열하고 폭발적으로 진행됐던 계급투쟁의 가장 첨예하고 날카로운 연장선에 있다. 우리는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가 아니라 전쟁의 계급적 성격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일본 제국주의 수탈과 압제, 착취체제인 식민지 지배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악랄하고 야만적인 식민지 폭압통치는 조선에서 봉건체제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1918년에 걸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으로 일제는 총독부 전체 세입의 45%를 토지세 명목으로 부과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저당.매매를 법률적으로 보장하여 지주의 토지에 대한 독점권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이 토지사업은 전통적 지주계급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이들의 토지보유 특권을 유지시켜줌으로써 이들을 친일세력의 강력한 보루로 삼았다.

사업 이전에 조선의 농민에게는 토지가격의 절반에 해당되는 영구소작권이 있어서 농민들이 이를 거래할 수 있었고, 지주가 마음대로 소작인을 갈아 치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화된 새로운 지주-소작관계는 봉건시대의 지주-소작관계에 남아 있던 전통적 안정성, 약간의 온정주의마저도 무너뜨리고 더욱 극심한 고율의 소작료를 요구하기도 하고 심지어 소작관계 자체를 박탈하기도 했다. 소작농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 지주들의 이중적 수탈로 인해 극심한 가난과 빈곤을 겪으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고 심지어 수백만의 농민들은 일본과 만주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로써 봉건적 지주-소작관계 모순으로부터 반(半)봉건적 형태로의 새로운 모순의 심화와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으로 인한 노자간의 모순이 제국주의 모순의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이기영은 소설 ‘고향’에서 여전히 농민이 지배적이었던 식민지 사회가 어떻게 변모해 가는지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지 저런지 무식한 박성녀는 자세히 모르나 어떻든지 세상은 딴 시대로 변하는 것 같다 .... 그는 몇 천 년 전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농민의 아들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전고미문인 노동자란 이름을 가졌다. 수로는 몇 억만 해로는 몇 천 년 동안에 농민의 썩은 거름이 노동자를 탄생케 하였던가? 농민의 아들 노동자는 새로 깐 병아리처럼 생기 있게 새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병아리는 오히려 밤중으로 알고 늦잠이 고이든 농민에게 새벽을 알리는 것 같다”(이기영 장편소설, ‘고향’, 풀빛)

이처럼 노동자는 수 천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농민의 갓 태어난 자식이었다. 농민의 자식으로서 노동자는 비록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작고 어리지만 생기 있게 농민을 각성시키고 변혁시키는 강력한 주체로 서서히 성장해가고 있었다.

일제 통치 당시인 1930년대와 40년대 조선에서 노동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일합방 당시 전체 인구의 84%가 농민이었고 0.18%만이 광산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였던 조선사회는 “1936년에는 중공업이 총산업생산의 28%를 차지했으며 50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공업부문에 고용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치는 1944년까지 급속도로 증가하여 한국인 노동자는 3배로 증가하였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상, P.69).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서 쌀과 원료를 수탈해 가고 식민지 노동력을 초과착취 했다. 그리고 조선을 일제국주의의 상품판매처로 전락시켰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고, 조선에서 수탈한 쌀과 원료를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철도가 전국에 걸쳐 부설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은 철저하게 수탈과 초과착취로 점철돼 있었다.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기형적이고 왜곡된 형태로 발전하면서 국내자본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발전 과정 보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수배의 고통을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에게 강요했다. 지식인들 역시 민족차별과 억압에 적대적이었고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일부 친일세력들은 일제 경찰의 악랄한 앞잡이가 되어 조선 민중 수탈과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섰다.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통치 하에서 조선의 민중들은 농촌에서 소작쟁의를 통해 지주와 경찰, 일제 관리들에게 저항했고, 노동자들은 1930년대를 거치면서 파업투쟁으로 일제에 저항하기도 했다. 일제와의 투쟁 과정에서 각성하기 시작한 조선의 민중들은 그 누구도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에 과거의 봉건적 억압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에 어떤 세상을 꿈꿀 것인가? 식민지 조선인들은 1945년 해방 이후에 해방된 조국을 어떤 세상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거대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 조선민중들의 열망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 공산주의자들 다수는 국내 농촌과 공장에서 일제의 잔학한 탄압과 구속과 고문, 사상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일부는 일제치하에서 학살당했다. 나머지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의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보여준 자기희생적이고 목숨을 건 투쟁은 이들을 대중의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했다. 민족주의자들조차도 러시아 혁명과 소련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좌익적 요소를 상당부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기간 동안에 약 400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과 만주 등지에서 200만 여명의 노동자들 대부분이 해방과 함께 귀향했다. 이들은 식민지 노동자로서의 억압과 설움, 분노를 안고서 대부분이 공산주의적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 왔다.  

해방된 조국의 새로운 지도자들과 민중들의 거대한 요구와 열망은 빠르게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자주적 인민정부 수립의 열망으로 나타났다.

일제 치하에서도 대중파업과 소작쟁의 등으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노동조합과 농민조합과 청년, 여성 대중조직들이 해방과 더불어 다시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노동조합은 일제가 남기고 간 공장들을 자주관리하거나 통제하기 시작했고, 농민조합은 일본지주의 토지를 접수하고 지주들을 내쫓기도 하였다. 8월 15일 해방이 되고 일제가 미처 물러가기 이전 몇 주 사이에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조공)이 분파투쟁을 거치면서도 재건을 도모하면서 건준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 건준에 의해 전국인민대표자들이 모여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압도적 다수의 인민들이 인민공화국을 해방 이후의 세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을 때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친일 관리, 경찰, 지주, 자본가 등 우익 세력들은 자신들의 친일경력과 압도적 인민 다수의 해방 세상에 대한 열망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조선 노동자민중들의 자주적 해방조국 건설의 열망은 미군정의 진주와 함께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7일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부 포고 제1호를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10월 10일에는 건준이 수립한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군정은 우익과 손잡고 중앙과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친일 세력들은 미군정과 손잡고 발 빠르게 기회주의적 처신을 이어가면서 반공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민중적 지지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 우익들과 손잡고 미군정이 원하는 정치체제를 남한에 수립하려 했다. 미군정과 손잡은 정치세력의 대표는 친미파인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 외교로 해방을 구걸하던 자로, 미국 내에서는 독재적 행보로 독립운동세력을 분열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대표적인 친미 반공주의자로 행세하며 반동 우익진영의 대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일제를 대신한 점령자인 미군정과 친미반소반공으로 변신한 우익들과 민중들의 계급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친일파 출신 경찰을 앞세워서 총칼로 위협하며 노동자농민이 접수한 공장과 토지를 다시 강탈해 갔다. 이때부터 미군정에 의한 대대적인 탄압과 민중학살이 시작됐다. 미군정은 45년 11월 초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소속 노동자들이 관리하던 화순탄광을 강제로 접수했다. 이 과정에서 대검과 폭격기까지 동원한 미군에 의해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체포되고 학살됐다. 이후 미군의 검거를 피한 화순탄광 광부들과 미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소년들을 중심으로 빨치산(구 빨치산)이 구성되었다. 화순탄광노동자들에 대한 학살을 출발로 해서 미군정은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전평을 박살낸 뒤에 전국의 공장을 강탈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를 강탈하고 소작료 인하 투쟁을 하던 농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군정을 반대하는 투쟁이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수천 명의 민중들이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러나 이 모든 학살과 탄압은 미군정에 의한 인민위원회 제거 기도와 생존권 말살에 맞서는 47년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항쟁,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기도에 맞서는 48년 4.3제주항쟁, 여순항쟁에서의 수만 명 민중학살과 이후 한국내전 직전과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이승만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최소 20만 명 이상의 핏빛 민중학살의 서막에 불과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맞이한 조선의 해방열망은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열화와 같은 투쟁으로 나타났다. 미군정과 우익은 민중들의 열망을 총칼로 짓밟고 민중들을 학살, 투옥하면서 남한에 친미 자본주의 정권을 세우려 했다. 남한에서의 미군정과 우익 정치세력이, 북에서는 소련의 진주와 더불어 소련사회주의 체제를 모방, 이식한 체제(이 소련 체제의 모방과 이식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한다)가 들어섰다. 북에서 소련체제에 대한 모방과 이식은 민중들의 요구와 열망과 일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북의 친일 지주, 상인, 의사, 법조인 등 지배계급들은 이 과정에서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으로 이주해서 남의 우익세력의 강력한 기반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남한 내에서의 내전은 남한 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남한을 반소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미군정과 이승만 우익정권의 기도와 맞물리면서 50년 6월 한국내전으로 전면화 되어 발생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인 동시에 전 세계 사회주의의 중심인 소련과 중국,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인 미제국주의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세계적 차원의 계급전쟁이었다.


현대사 최대의 역사왜곡과 몰역사적 동조



당시 북조선에는 일제의 패망 이후 만주의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군과 싸우면서 소련군이 진주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와 이후 남한에 등장한 미군정은 역사적, 계급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인민에게! 조선인민이여! 소련군대와 동맹국 군대는 일본 약탈자를 조선으로부터 구축했다. 조선은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조선역사의 첫장에 불과하다..... . 일본통치하에서 살아온 고통의 나날을 잊지 말자! 토벽위에 얹혀져 있는 돌맹이마저도 조선인민의 괴로웠던 노력과 피와 땀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의 손안에 있다. 반드시 조선인민 자체의 힘으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할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노동자들이여! 노력에 의한 영웅심과 창조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인의 훌륭한 민족성의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해방된 조선인민만세! 1945. 8.15 소련군 사령부”(민중운동사연구회, 「해방 후 한국 변혁운동사」, 녹진, P.141-142).

“남한민중에게 고함. 미군은 근일 중에 귀국에 상륙하게 된다. 상륙의 목적은 귀국을 민주주의 제도하에 두고 국민의 질서를 도모하는데 있다. 국가 조직의 개선은 일조일식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안녕질서에 큰 혼란과 유혈이 따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떠한 개혁도 서서히 진행되어야 한다. .... 연합군 총사령관의 명령은 여러분을 원조하는 것을 취지로 삼고 있으므로 여러분은 이것을 엄숙히 준수하며 행동하기 바란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처벌될 것이다. 이기주의로 날뛴다든가 혹은 일본인 및 미상륙군에 대한 반란 행위, 재산 및 기설기관의 파괴 등 경거망동으로 치닫는 행동은 엄히 피해야 할 것이며.... 여러분이 충심으로 협력할 것을 요망한다. 1945. 9. 2. 조선주둔군 미군사령관 존리드 하지”(같은 책)


이 부분은 최근 뉴라이트에 의해 좌편향적 역사교과서라고 하는 금성교과서에서 실려 있는 부분이다. 금성교과서에서는 위의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포고문으로 알려진 포고문 외에 당시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 사령관 맥아더 포고령 1호가 실려 있다. 맥아더 포고문에는 조선 영토와 통치를 맥아더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는 것과 주민의 재산권 존중, 정부 등 모든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모든 직원과 고용인들이 종래의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 군정 기간 동안 영어를 모든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는 등 5개 조항이 담겨 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뉴라이트조차도 이 상이한 포고문에 실린 역사적 진실이 두려웠는지 이를 두고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세뇌 공작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포고문은 선전 선동을 통해 혁명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맡은 정치장교를 핵(核)으로 조직된 소련군 편성과 단순한 전투장교 위주로 편성된 미군 조직의 대민(對民) 선동술의 차이를 보여주는 자료일 뿐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의 포고문은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고, 친일 경찰과 관리 등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겠다는 것, 인민위원회에 의해 운영되는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겠다는 것을 외교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실제 역사는 맥아더의 포고문대로 진행됐다.

반면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라는 치스차코프 포고문에 실린 대로 북에서는 일제 잔재의 청산, 지주의 토지몰수와 일본인이 남기고 한 적산기업의 노동자 직접 운영 등이 실시됐다.

뉴라이트는 물론이고 트로츠키진영에서도 당시 북에 진주한 소련군대의 강간과 약탈을 근거로 ‘스탈린 체제의 반동성’을 폭로한다. 소련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강간과 약탈은 남한으로 도피한 일본인들에 의해 주로 소문이 퍼져나갔고 우익 신문과 이후 우익 역사가들이 강조했으므로 과장된 면이 없지 않고, 일본인과 지주에 대한 약탈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계급적 성격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소련군 진주 초기 몇 주 동안 저질러진 강간과 약탈은 유럽에서의 파시즘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선진적 전위의 대량사망과 피폐해진 소련의 상태로 인해 군인들에게 제복이나 식량도 지급하지 못한 점이 이러한 범죄를 부추겼다. 그러나 초기 몇 주 동안 아무런 통제도 없이 저질러진 강간과 약탈은 곧바로 근절됐다.


“1946년 2월 소련은 자신의 군대를 엄격히 통제할 헌병을 데려왔다. 그리하여 헌병은 한국여성을 강간하는 어떤 소련군들이든지 현장에서 사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헌병이 파견되어 온 다음부터 없어졌고 그 이후로 소련군 장교들의 처신은 항상 정확했으며 군대는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리고 소련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물자를 징발했지만 모든 것에 대해 보상해 주겠다는 영수증을 발부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하」, 청사, P.257).

  
트로츠키 진영에서는 소련군이 이북의 산업시설을 대규모로 약탈해 갔다는 비판으로 ‘스탈린주의의 반동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미군 정보대는 군정 초기 몇 달 동안 소련군이 중요한 산업시설을 철거해 가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1946년 6월에 가서는, 이전의 보고들은 후퇴하는 일본군들이 파괴한 내용이 와전된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사실상 소련 기술자들은 파괴된 산업시설을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1946년 중엽의 생산수준은 1945년의 수준을 초과했다"(같은 책 P.258).


소련군의 진주 이후에 벌어진 오류가 있다면 신랄하게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익에 의해 재생산된 자료나 악의적인 왜곡, 부분적, 개별적 내용을 가지고 사회체제 전체의 문제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소련군은 북에 진주하면서 초기의 그러한 오류를 시정하고 치스차코프 포고문대로 조선인의 자주적 권리와 인민위원회의 자발적인 정치적 활동을 보장했다. 소련군의 진주 동안에 이북의 인민위원회에 의해 취해진 일제 잔재 청산, 지주 토지와 친일파 재산 몰수, 공장 국유화, 노동자의 법적권리와 진보적 여성의 권리 등 당시의 급진적 조치는 반동적인 미군정과 우익정치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대량 학살과 공장과 토지에 대한 약탈(개인적 약탈이 아닌)과 대비되면서 남한 민중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남한에서의 미군정과 이승만 도당에 대한 분노와 항쟁은 북에서의 급진적 조치들에 의해 더욱 구체적인 정치적 전망을 가지고 진행됐다.

트로츠키 진영에서 ‘스탈린주의 반동체제’의 근거로 사용하는 역사적 사실 중에서 친탁, 반택 논쟁에 대한 역사왜곡은 저들이 얼마나 몰역사적, 몰계급적인 것이고 때로는 반동적이기 조차 한 것이지 잘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이제 스탈린주의가 우리나라 혁명운동사에 해악을 끼친 구체적인 하나의 사례를 들어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핵심만 간략히 소개한다. 1945년 ‘해방’ 직후 김사임이라는 한 여성혁명가가 있었다 ...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신탁통치문제)이 외신을 타고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에 대한 조선민중들의 즉각적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반대였다. 당시 좌익 우익 할 것 없이, 특히 일제시대 건강성으로 인해 대중운동을 지도하며 주도해 나가고 있던 좌익은 지도부 대중 할 것 없이 모두가 반대하며 분노했다. 반대 항의집회도 열었다. 그것이 시대의 요구였고, 역사의 부름이었다. 며칠 뒤 지도자 ‘박’이 비밀리에 평양 가서 ‘김’과 소련군정 담당자를 만나고 와서 그의 태도는 바뀌어 있었다. 그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설득을 당하고 온 것이다. 그렇게 스탈린주의는 조선 혁명운동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고 중대한 시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46년 1월초 운동은 순식간에 찬탁과 반탁으로 갈리었고, 그 때까지 대중운동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좌익은 급속히 대중적 기반을 상실해 갔다. 일제시대부터 친일적 행위로 도덕성을 상실해 있던 우익은 ‘이때다’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순수’했던 김사임은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충실히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찬탁운동 조직에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다. 그렇지만, 그녀는 속으로는 끝까지 찬탁에 동의하지 않았다”(울프, 2009. 4.26, 스탈린 주의 비판).

이 이야기는 저자가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아리랑 고개의 여인’에 나오는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재구성해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이 국가자본주의자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천박한 방식이다. 우익 반공주의에 영향 받은 역사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왜곡, 국가자본주의라는 종파주의적 도그마가 결합해서 이 천박한 역사인식은 반동적, 반공적 역사인식으로 바뀐다. 이들은 반탁이 ‘시대의 요구’이자 ‘역사의 부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스탈린주의’가 끼친 해악 - 친탁 반탁논쟁이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이 해악은 국가자본주의자들의 인식대로라면 절대악일 것이다 -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친탁결정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이다. 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다. 심지어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국가자본주의자들도 해방 이후 60년 이상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해온 반공반소주의 이데올로기의 철저한 포로가 되어 춤추고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친탁결정이 아니다. 반공반소주의의 어릿광대들인 국가자본주의자들은 미.영.소 3개국 외상에 의해 국가 간 합의한 결정사항을 왜 미군정이 뒤집고 우익들의 반탁을 배후에서 이용하는지에 전혀 의구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파시즘 제국주의 국가가 지배했던 식민지 처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미제국주의는 이를 통해 전쟁으로 인해 타격을 입고 제국주의 국가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격하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제국주의 국가의 핵심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런데 미국 제국주의의 이러한 의도는 독일 파시즘을 격퇴하고 승리한 소련의 존재로 인해 강력하게 제한을 받아야 했다. 미국은 제국주의 핵심국가로서 전후 유럽과 일본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면서 재건하여 소련사회주의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식민지 국가들이 해방된 이후 소련사회주의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막고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들 국가에 대한 신탁통치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탁통치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새롭게 변화된 적극적이고 확대된 세계전략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신탁통치의 핵심적 내용은 식민지에 대한 기존 제국주의 국가들의 배타적 식민통치를 다국적 신탁통치로 대치하고 종국적으로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인 제국주의전략에서 개방적이고 다국적인 제국주의전략으로의 전환을 주도한 것은 소위 미국내 루즈벨트로 대표되는 국제주의노선이었다”(민중운동사연구회, 「해방 후 한국 변혁운동사」, 녹진, P.254-256).


이러한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식민지 해방투쟁의 영향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군사적 방식의 식민지 직접 통치가 힘들어지자 식민지 해방국가들을 제국주의 국가들이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군사적, 정치적, 자본의 힘에 비례해 신탁통치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안은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불균등한 힘에 의한 경쟁과 대립의 산물인 동시에 주요하게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동이해인 반소반공의 전략적 기치를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안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신탁통치의 적용대상은 한반도로 제한되게 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는 1943년 3월 아시아국의 전후 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약 40년간 한국을 신탁통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5년 2월 8일 얄타회담에서도 루스벨트는 20년 내지 30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이 대일전 참전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이 만주를 장악하고 한반도로 일본군을 격퇴하고 진군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미국은 38선 분할점령을 제안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미소군이 진주한 지 4개월이 되는 때에 미국.영국.소련의 외상들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합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도 미국은 여전히 신탁통치 주장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당시 쏘련 측 외상이었던 몰로토프는 조선임시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주권행사의 시급함을 밝히고 4개국은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원조를 하는 후견적 위치에 머물러야 하고 그 기간도 5년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미쏘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가운데 쏘련이 입장이 주되게 반영된 합의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핵심 결정문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장기간의 일본 지배로 인한 악독한 잔재를 신속히 청산하기 위하여 임시적인 조선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조선임시정부의 구성을 돕고 그를 위한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해 조선의 미.소 사령부 대표로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
3. 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조선의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과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해 협력원조(후견)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공동위는 조선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친 후에 5년 이내의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후견협정을 작성하기 위해 이 나라 정부들이 공동심의를 받을 것을 제안한다.
4. 2주일 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군사령부 대표회의를 소집한다.”(오연호, 「우리현대사의 숨은 그림찾기」, P.28)


이처럼 이 결정문의 핵심은 일제 식민지 압제의 결과를 하루 빨리 청산하고 조선에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조선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로 알려지면서 김구가 중심이 된 민족주의 우익세력들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들은 격렬하게 반탁운동을 했다. 하지만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은 모스크바 협정 전까지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다가 쏘련의 입장이 주로 반영된 모스크바 협정안을 지지했다. 그런데 이 모스크바 협정문이 신탁통치안이라는 악의적 왜곡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모스크바 3상회의가 진행중이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워싱턴에서 지급(至急)으로 전송된 뉴스를 실었다.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회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스 미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을 일괄한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1946년 1월에야 왜곡보도로 판명된 이 기사가 인쇄되고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는 위와 정반대의 결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일의 반탁.반소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 기사는 정보조작에 의한 민족분열의 시발점이었다는 데서 가히 현대사 최대의 왜곡보도라 할 수 있다”(같은 책, p.26-27).

동아일보는 연이어서 왜곡된 기사로 반소반공 운동을 부추겼다. 그러나 미군정과 미언론, 동아일보, 한국민주당(한민당) 등이 합작한 박헌영 인터뷰 왜곡기사는 공산당을 ‘나라를 팔아먹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조작했다.

“왜곡의 진상은 이러했다. 1월 5일 박헌영은 외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뉴욕타임스』 서울 특파원인 존스턴으로부터 신탁통치에 관한 질문을 받고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을 원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존스턴은 이를 ‘박헌영이 조선에 대한 소련의 일개국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 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사화했다. 그것은 백주의 살인에 비유될 만했다. 미군정의 『G-2 주간보고서』마저도 ‘박헌영의 말은 완전히 왜곡되어 보도되었다’고 기록했다”(같은 책, P.31)

소련 정부는 미국 정부가 모스크바 협정을 같이 체결해놓고도 미군정이 우익을 부추겨 반탁운동을 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미국정부는 이에 대해 곤혹스러워 했지만 한반도에서의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은 친소정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미군정은 반탁운동을 계속 지원했다. 소련은 이에 대해 자주적 통일정부 구성에 반탁세력들을 배제하자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동시 철군하자고 주장했다. 이승만 도당은 반탁을 통해 자신들이 진정으로 민족주의 세력인 냥 위장하면서 이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때서야 반탁에 적극 나섰던 김구 같은 우익민족주의자들도 이 의도를 알아차리고 이승만과 결별하고 단정반대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좌익이 소련의 지령 한마디로 반탁에서 친탁으로 돌아서고 이로 인해 우익 민족주의자들에 비해 급속히 대중적 영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승만 도당과 반공주의자들의 악선동에 불과하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여전히 미군정과 우익들에 의한 ‘현대사 최대의 왜곡’을 ‘스탈린주의 반동체제’라는 국가자본주의 종파주의에 빠져 앵무새마냥 반복하고 있다.


국가자본주의 도그마에 의한 역사왜곡



사노련은 “북한에 들어선 김일성 권력은 1917년 러시아의 소비에트나 1871년 프랑스의 파리꼬뮌 같은 노동자계급의 자주적이며 대중적인 권력이 아니라, 급진적 민족주의자의 권력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의 국유화 조치는 김일성 권력의 경제기반을 안정화하고, 노동자대중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말하는 ‘왜 사회주의인가?’)고 주장한다.

사노련의 악의적 주장과 달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남한과 달리 자율성을 인정받으면서 혁명적 조치를 빠르게 취해나갔다. 또한 소련의 기술과 지원 하에 파괴된 생산시설을 복구하여 국유화의 기초를 다진 뒤 산업 국유화 조치를 취하고 노동자보호 법률과 여성에 대한 진보적 법률과 인민위원회 참여 보장, 복지정책 등 진보적 조치를 취해나갔다. 특히 3.7제 소작료 인하 투쟁에서부터 시작해서 곧바로 토지 국유화 조치를 취하지 않고 토지에 대한 빈농들의 열화와 같은 열망을 반영하여 지주 토지의 무상 몰수와 무상분배라는 혁명적 조치를 취해 나갔다. 물론 미군정과 달리 소련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체제를 북 인민들이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위원회의 자주성을 보장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련이 원하는 체제와 대다수의 인민들이 원하는 세상이 일치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북의 공산당은 인민 대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하면서 노동자농민의 대중적인 권력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러한 과정이 “북한의 국유화 조치는 김일성 권력의 경제기반을 안정화하고, 노동자대중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간단하게 폄하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러한 국유화 조치가 김일성 권력, 즉 공산당의 경제기반을 안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안정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미군정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학살, 총검으로 만들어졌는가? 인민의 광범위한 대중적 요구와 열망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는가?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진보를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 반동체제’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라고 왜곡한다.

사노련은 당시 남북한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열망과 요구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입장에 서 있다. 이는 반소반공에 기반을 둔 우익들의 역사인식과 맞닿아 있다.

“북한은 세계 노동자혁명의 패배(독일 노동자혁명의 실패에서 시작해 소련에서 노동자권력이 파괴되고 스탈린 관료집단의 반혁명이 승리하는 데로까지 나아갔으며, 결국 코민테른을 집어삼킨 뒤 불가리아, 동유럽, 중국, 한반도로 퍼져나간 패배)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북한은 이 패배의 불가피한 결과로 탄생한 세계적 관료체제의 한 부분이다”(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말하는 ‘왜 사회주의인가?’)

이들은 스탈린주의 반동체제, 국가자본주의라는 악의적인 도그마에 사로잡혀 불가리아, 동유럽, 중국, 한반도로 퍼진 혁명의 물결을 패배의 산물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권력의 수립은 소련 사회주의와 독일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파시즘의 패배라는 거대한 역사적 진보를 바탕으로 해서 달성됐다. 파시즘의 패배와 소련 적군의 진격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전반을 파시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러한 거대한 투쟁의 축을 바탕으로 해서 엄청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치면서 마침내 半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을 해방시켰다. 국가자본주의의 단순하고 종파주의적인 눈으로 보면 중국과 조선의 해방은 소부르주아 혁명에 불과하지만 이들 국가의 혁명과 해방 이후 자리 잡은 체제는 식민지, 반식민지 등의 국가에서 인민민주주의 형태로 특수화된 사회주의 권력이 수립된 것이다.

사노련 국가자본주의자들은 북의 사회주의가 노동자 혁명이 없는 가운데 수립되었다고 비판한다. 물론 북의 식민지 해방과 혁명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 세계적인 정세에서 파시즘과 일본 제국주의의 패배와 함께 성립되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혁명으로 가장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조선의 혁명가들의 압도적 다수는 중국 공산당에 조선의용군으로 참여해서 중국 혁명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인 혁명가들은 중국의 혁명이 일본 제국주의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고, 이것이 조선의 식민지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보다도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에 고통을 받았으므로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도 더 헌신적으로 목숨 바쳐 투쟁했다.

조선의 해방이 단순히 외세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주장은 비주체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역사관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남한에서 수립된 반공체제에 의해 혁명가들의 고난과 투쟁의 역사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북에서 혁명이 없이 체제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전 세계적인 파시즘과의 투쟁, 중국의 일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 조선인 혁명가들의 활약, 한반도 인근에서의 무력항쟁, 1930년대 원산 총파업 같은 노동자 대중파업 등을 무시하는 것이다. 북조선에서의 사회주의의 성립이 단순히 스탈린주의 체제의 이식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저 악랄한 국가자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것이 단순한 이식(移植)이라면 그 이식이 무리 없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인민들이 엄청난 열망과 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그 체제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1919년 기독교적 3.1만세 운동으로 일제국주의에 저항하던 것이 처절한 패배로 돌아가자 저항의 방식을 무장투쟁으로 변화했다. 조선에서의 3.1운동 이후에 1920년대부터는 수많은 민족해방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러시아에서의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 소련 사회를 조선을 해방시키고 나서 만들어야할 사회체제로 받아들였다. 해방 이후에도 소련은 조선인들에게는 ‘해방조국’이었다.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이식과정인 내선일체화와 해방 이후 미제국주의의 자본주의 체제의 이식과정과 북에서의 소련체제의 이식과정이 얼마나 거대한 차이가 있는지 종파주의자들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몰역사성, 역사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악의적인 입장에 의하면, 조선 인민들과 혁명가들의 수십 년 동안의 고난과 투쟁, 해방 이후의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이승만 반동정권에 맞서는 투쟁, 4.3항쟁, 여순항쟁, 빨치산 투쟁, 수백만의 민중과 수십만의 혁명가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쟁취하려 했던 거대한 열망과 의지, 전망이 단지 스탈린주의의 산물이고, 국가자본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소부르주아 투쟁인 것이다. 수천만 민중들의 열망과 의지, 요구가 단지 스탈린주의의 반동체제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고, 그것이 현실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는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역사에 대한 얼마나 대담하고 가공할만한 모략적 악선전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노련 같은 국가자본주의자들은 현대사의 거대한 계급투쟁, 또한 이러한 모순의 최대 결절점인 한국내전을 지배자간의 전쟁, 또는 미소 제국주의자들의 대리전으로 몰역사적이고 몰계급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 격동의 시기, 노동자 민중과 제국주의, 지배계급간의 피를 부르는 거대한 항쟁에 대해 이들은 초연하거나 중립적이거나 애써 스탈린주의의 산물,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은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기 위한 헛된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격동기의 전 세계적인 계급투쟁과 그 한복판에서의 계급투쟁에 중립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왜곡된 역사인식이고,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반동적인 입장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종파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청산주의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익 청산주의는 눈에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투쟁하기 쉬울 수 있으나 트로츠키주의라는 급진적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좌익 청산주의는 운동을 정치적 전망을 가로막고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더 위험할 수 있다. 한국내전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 역사인식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노/정/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