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

조지 오웰 문학의 지독한 역사 왜곡과 반동성 (반공주의 선전가, 뜨로츠끼주의의 신봉자, 국가의 밀고자)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5. 9. 6. 16:24
조지 오웰 문학의 지독한 역사 왜곡과 반동성
(반공주의 선전가, 뜨로츠끼주의의 신봉자, 국가의 밀고자)

 

<노동자정치신문>[108호(통합120호), 2014.11] 

 

부산지역일반노조 조합원 제일호

           


조지 오웰의 문학작품이 제국주의 진영의 부르주아들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문학적인 성과보다도 그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철저한 증오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0월 혁명을 지지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철저히 가장되고 위장된 것이었다. 오웰의 작품에는 진실은 전혀 없고 쏘련에 대한 왜곡과 중상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전 세계 50여개 국가의 교과서에 엄연히 올라 있는 그의 ‘동물 농장’은 쏘련을 전체주의 사회의 폐해를 안고 있는 국가로 묘사하며, 스딸린을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로서 악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그의 문학에 있어서의 반동성과 지독한 역사 왜곡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지 오웰의 정치적 편견(반동성)과 거짓말


1945년 ‘동물 농장’이 출판된 이후로, 조지 오웰의 작품은 영국 고등학교의 정규 과정에 포함될 정도로 제국주의 진영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는 ‘걸리버 여행기’를 썼던 조나단 스위프트의 반어적이고 우화적인 문학의 전통을 계승한 천재적인 문학가로 칭송되었다. 오웰은 스위프트의 계승자로 자주 묘사된다. 배경과 인성에는 유사점들도 있다. 그러나 ‘동물 농장’에서는 아니다. 이 작품이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은 쏘련을 전체주의 사회라고 우화로써 묘사를 하고 있는데 있다.1)

우리가 동물 농장의 허구에 빠져드는 그 순간, 우리는 오웰이 정치적인 인간들은 동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그 결론에 빠져들게 된다. 그 결론은 바로 전통적인 지배자들이 무기력하게 되면, 새로운 폭정이 낡은 세계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짜르의 전제정치와 께렌스끼 기회주의 정권을 붕괴시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루고, 자본주의의 무기력함을 타파한 10월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쏘련 사회에 이 결론을 적용한다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특히, 이 결론에 빠져들면 쏘련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비역사적 사고를 지니게 됨과 동시에 비변증법적이고 비주체적인 사고에 젖어들게 된다.

모순의 대상은 부정의 부정으로 해소되는 것이 역사 발전의 변증법이기에, 부르주아 독재는 노동자 민중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해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에서 정치 현실을 보라. 거짓말만 늘어놓는 뻔뻔한 자본가들의 대변인 이명박 정권을 이어서 무능하고 잔인한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서 새로운 폭정을 행하고 있다.

일면 보면 오웰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이것은 비교의 대상이 다르다. 오웰은 자본주의의 정치와 사회주의의 정치를 비교하고 있다. 이명박이나 박근혜는 똑 같이 독점 자본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독재 정권이기에 비교의 대상이 다르다. 오웰의 말대로 하면 한국에서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들 똑 같다 라는 식의 논리이기에,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패배주의의 그늘로 몰아가기에, 그의 작품 ‘동물 농장’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오웰의 작품은 예술적인 장점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에게 유용한 정치적 목적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출판되었다. 10월 혁명을 방어하는 체했던 뜨로츠끼의 사상을 따랐던 오웰은 스딸린 통치의 쏘련의 공산주의에 대하여 반대를 하였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품을 썼던 것이다. 그 결과 ‘동물 농장’과 같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쓰레기 작품을 읽은 전 세계의 인민들은 쏘련에서의 실로 엄청난 발전들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울러 제국주의 언론과 강단을 통해서, 제국주의 진영은 러시아 혁명의 이상을 짓밟고 있으며 쏘련 사회는 야만의 사회였던 것처럼 묘사를 해오고 있다.


조지 오웰의 정치적 편견(반동성)


오웰의 작품들이 논술 시험에서 출제되기도 하는데, 많은 학생들은 그 작품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답을 써야하는지에 관한 참고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게 청출어람(?)인지 가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한국에서 오웰의 작품은 뉴라이트의 손에서 반공주의의 바이블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참고서들은 오웰이 자기의 작품에서 의도했던 것보다 더 지독하게 반공주의에 입각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학생들을 반공주의에 무의식적으로 빠져들게 하는 자본주의 진영 고도의 술책의 일종인데, 지금까지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물 농장’은 간결한 문체로 쏘련 역사에 대하여 날을 세우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어떠한 참고 사항도 없이 적고 있다. 물론 오웰은 쏘련을 가보지도 않았다. 분명히 근거 없는 주장과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독재에 관한 우화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요구하고 있지만, 웬만한 독자들은 그 독재 체제가 쏘련 사회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부르주아 사회가 이렇게 교묘하게 선전을 해대든지 간에, 20세기의 쏘련 사회는 정확하게 평가를 하여야 한다.

이러한 마타도어적인 작품에 기대어 쏘련을 바라보면 진실에 대한 발견은 더욱 더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아울러 변혁을 위한 참된 과학적인 사상을 확립하게 되는 데도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냉전의 시대이든 탈냉전의 시대이든, 제국주의는 언제나 공산주의를 이념적으로 공격해왔고, 구체적인 현실에서도 집요한 파괴 공작을 벌여왔다. 이 놀음의 한 구성 속에 이 작품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웰이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나가기를 원했던 역사 왜곡을 하는 이 소설의 진정한 목적을 살펴보자.(이하 소설 부분의 인용은 소설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상징하는 바를 적는다. 해석의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상징하는 바가 너무 뻔하기에.)
오웰은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상징하고 있다.

레닌의 지도 아래 공산당이 성장하여 권력을 쟁취한다.
혁명 후, 뜨로츠끼와 레닌은 쏘련에서 공산주의 사회를 수립했다. 모든 생산수단과 작업은 개인들 사이에서 동등하게 분배된다.


스퀼러는 레닌을 비유하는데, 작고 뚱뚱한 식용 돼지로, 스딸린은 나폴레온으로 비유하는데, 몸집이 크고 다소 사나워 보이며, 농장 유일의 버크셔 수퇘지로 말주변은 별로 없지만 자기 뜻을 밀고 나가는 평판이 있는 것으로, 뜨로츠끼는 스노우 볼로 비유하는데, 나폴레온보다 더 쾌활하고 말재주도 있으며 창의력도 있지만 나폴레온보다 생각이 깊지 못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닌이 혁명을 이끌었다고 말하면서, 똑 같은 지도자의 반열에 뜨로츠끼를 재빨리 끼워 넣고 있다. 이것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뜨로츠끼와 레닌이 마치 한 마음과 한 가지의 목표를 가진 것처럼 그들의 이름을 우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믿을 수 있는 자료도 없는데 부르주아 언론과 교육은 이것을 마치 진실인양 선전을 해댄다.

둘째, 당연히 이것은 뜨로츠끼가 마치 볼셰비끼의 차기 지도자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의 지도자의 선택보다는 부르주아 독재에서의 지도자의 선택이 더 민주적인 것처럼 포장한다.

셋째, 스딸린의 이름을 빼버림으로써, 스딸린이 혁명과정에서 했던 역할과 그의 영향력을 부인한다. 레닌주의의 승계자는 스딸린이 아니라 뜨로츠끼라는 믿음을 던져주게 한다.

혁명 후 바로 공산주의 사회가 건설되었다는 왜곡과 함께, ‘능력에 따른 분배’의 사회주의와 ‘필요에 따른 분배’의 공산주의 사이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는 얕은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쏘련은 갓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국가였고, 심지어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이 폐지되는 1928년까지 사회주의 집산화가 실현되지 않았다. 레닌도 이 시기(NEP)를 국가자본주의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공산주의의 평등에 대해 중상을 한다.

공산주의가 수립된 후 즉시, 혹은 혁명 후에 즉시, 재산이 공평하게 분배된다고 믿는 공산주의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목표는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소유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공산주의가 수립되었지만 그 사회는 이미 썩은 사회라는 것을 암시받는다. 레닌의 사후 권력 투쟁은 뜨로츠끼와 스딸린 사이에서 벌어졌고, 레닌이 뜨로츠끼에 대해 더 우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뜨로츠끼는 뜨로츠끼의 사진까지 없애려고 노력하며 그를 제거하고자 별의별 짓거리를 다한 스딸린에 의해 축출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이 주장을 위해 제시된 증거라고는 위조된 레닌의 유언장뿐이며, 그 어디에도 이것을 입증할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2)

첫째, 레닌과 뜨로츠끼는 혁명 전이나 후나, 아니 그들의 삶에서 언제나 대항하는 반대자였다. 1917년 후, 레닌과 뜨로츠끼는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에 관한 문제들, 노동조합의 문제, 전쟁과 평화의 문제, 당의 통일과 규율의 문제 특히, 쏘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유지에 관한 의미에 있어서 언제나 지속적인 갈등을 보였다. 레닌의 사후 그 변화가 찾아왔다. 그 당시에, 뜨로츠끼는 스딸린주의(진정한 레닌주의)에 반대하여 레닌주의(진정한 의미로는 뜨로츠끼주의)를 방어한다는 변장을 하고는 과거에 그가 행했던 레닌주의에 대한 공격을 스딸린으로 바꾸기로 작정했다.3)

둘째, 심지어 레닌이 스딸린보다 뜨로츠끼에 대해 더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고 하더라도(레닌은 뜨로츠끼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뜨로츠끼를 좌파의 탈을 쓰고 우파의 행위를 한다고까지 말했다), 쏘련 공산당의 서기장은 그것을 기초로 하여 선택되어져서는 안 되며 그렇게 선택된 것도 아니다. 스딸린은 그의 인생 내내 당과 쏘련 인민들의 지지를 계속 받아왔기 때문에, 스딸린이 그 지위에 선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뜨로츠끼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무시하고, 스딸린을 혐오하는 것이다. 뜨로츠끼는 스딸린이 뜨로츠끼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했던 편집증 환자라고 혼자 주장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가 예측한 모든 것(예를 들어, 나찌와의 전쟁에서 쏘련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가 스딸린을 비난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오웰은 소설에서 상징한다.

쏘련은 스딸린의 경제정책의 결과로 극심한 기근을 경험했다.
스딸린의 권력은 증대하여 그가 쏘련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나폴레온은 독재자가 되기 위하여 테러와 선전을 교묘히 이용한다.
스딸린에게 위협적이었던 모든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스딸린은 모든 농장들이 국가의 통제 하에 놓이는 집산화를 주장했다. 그는 역시 쏘비에뜨 산업을 현대화하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온은 닭들에게 그들의 계란을 팔라고 지시하지만, 닭들은 그들의 계란을 부수어버렸다. 이와 같이 농민들은 집산화를 반대했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집산화가 가능한 한 빨리 농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실시되어야 하고 쏘련 정부는 자발적인 집산화의 성공적인 정책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은 뜨로츠끼의 주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꿀락은 집산화가 농민들을 착취할 자기들의 권리를 침해했기에 이에 반발하여 파괴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여기에서 또 묘한 표현을 한다. 스딸린에 의해 쏘련 공산당과 정부는 항상 무시되었고, 스딸린만이 어떠한 말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스딸린이 쏘련의 산업을 현대화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쏘련이 산업을 현대화하는데 실패했다는 예는 없다. 닭들과 계란에 대한 오웰의 상징적 표현은 꿀락의 반역에 대한 삽화임이 분명하다. 스딸린을 계란을 죽이는 야만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오웰은 소설 속에서 계속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독일과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쏘련을 보호하고자 스딸린은 그 국가들과 협상을 했다. 그가 독일과 맺은 조약은, 1941년 독일이 쏘련을 침공했을 때,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다.  
스딸린은 다가올 침략을 예측하지 못한바 아닌데도, 예측하지 못했고, 겁쟁이이며 바보였다. 그래도 자기의 조국인 영국은 조약의 파기와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쏘련, 영국과 미국은 동맹을 맺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쏘련과 서구 사이에는 냉전이 시작되었다. 돼지들과 사람들은 함께 저녁을 먹지만, 그들의 관계는, 양쪽이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파괴가 된다.


냉전에 대한 책임을 스딸린에게 돌리고 비난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오웰의 상징은 뒤죽박죽이 되어있다. ‘동물 농장’이 쓰이고 있을 때, 2차 대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오웰이 다가올 냉전을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이 소설은 쏘련 정부가 영국 정부보다 나은 것도 없으며, 영국 역시 명예스럽지 못한 국가로서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쏘련이 파시즘을 패배시킬 유일한 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와의 동맹을 맺은 것은 스딸린의 불명예라는 추정에서 나온 비유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부르주아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스딸린에게 계속해서 퍼 부었던 광란적이고, 우스꽝스럽고, 모순적인 악랄한 비난의 요약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아주 자세하게 그 부분들을 살펴보지 않는 다면, 그것의 전체적인 효과는 아주 강력해진다. 계속 상징하는 바를 살펴보자.
  
뜨로츠끼는 내전에서 붉은 군대의 전략가이었고 뛰어난 연설가로서 간주되었다. 뜨로츠끼는 쏘련이 안전해지기 위해서 혁명은 ‘영구 혁명’으로서 전세계에 퍼져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스딸린은 과묵했고 겸손했다. 뜨로츠끼와는 반대로, 그는 국가의 안전은 그 국가의 방위를  확립한 ‘일국 사회주의’의 건설에 있다고 믿었다. 스딸린은 뜨로츠끼를 몰아내려고 하였고, 결국 1927년 뜨로츠끼는 쏘련을 떠났다. 뜨로츠끼는 쏘련의 적들과 함께 쏘련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작업을 했다. 1928년 무렵, 스딸린은 정부를 지배했으며, 개인숭배를 조장하였다. 그의 지배는 맑스나 레닌이 제안한 사상들과는 일말의 공통점도 가지지 않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스딸린의 관점들과 정책들은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 1921년 그는 국가를 산업화하려는 뜨로츠끼의 계획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뜨로츠끼가 추방되고 난 후 5개년 계획을 실시한다. 이 5개년 계획은 아주 인기가 없었고, 생산 목표를 너무나도 높게 비현실적으로 설정하였다. 농장들을 집산화하려는 또 다른 정책은 특히, 꿀락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땅을 불태웠고 정부가 허락하는 것 이상의 동물들을 죽여 버렸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쏘련은 인민의 고통은 심해지고 있을지라도 주요한 산업국가로 떠올랐다. 게다가, 스딸린은 그와 쏘련 인민들의 역사를 자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스딸린은 자기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쏘련 인민들에게 자주 정치선전을 하였다. 스딸린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박살이 났다.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추방되었거나 처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개 재판’에 회부되어 그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들을 자백해야 했다. 이 숙청이 쏘련 사회를 지배했고 인민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스딸린은 쏘련이 고립되어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공격에 대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꼈다. 쏘련은 1934년 국가 동맹에 가담하였고, 히틀러에 반대하는 동맹에 가담하였다. 이것은 성공적이었고, 스딸린은 1939년 독일 지도자들과 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레닌과 뜨로츠끼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쏘련과 나찌의 협정은 쏘련에게 방위를 건설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1941년, 독일은 쏘련을 침략하였고, 쏘련의 인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스딸린, 루즈벨트와 처칠이 1943년 테헤란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다. 쏘련, 미국과 영국이 동맹이 된 것 같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웰의 상징의 많은 부분에 담겨져 있는 고유의 모순이다. ‘초기에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산업화하려는 뜨로츠끼의 계획을 반대했을 때, 스딸린은 어리석고 근시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중에 산업화를 시작했을 때, 스딸린은 뜨로츠끼의 계획을 훔쳤고 인민들의 바램과는 반대로 행동을 했다.’는 오웰의 상징은 근거가 없다.

스딸린은 오로지 쏘련을 산업화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뜨로츠끼의 주장대로라면 스딸린의 정책들이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고 인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진영의 일방적인 주장 외에는 어디에도 그 증거는 없다. 어쨌든 이 정책들의 결과로 쏘련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났으며 2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가난을 벗어던지고 경제적인 강국이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산업화와 집산화에 대한 인민들의 지지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경제정책의 건전성에 대한 언급도 없다.

러시아에서의 내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뜨로츠끼가 붉은 군대의 승리를 입안하여 지휘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의 전략들이 붉은 군대의 승리를 위해서는 이롭지 못한 것으로 판명이 된 후, 그가 승리의 전선에서 격리되어져야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지 뜨로츠끼가 군사적으로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견은 존재했다.

쏘비에뜨 역사를 다시 쓰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은 스딸린이 아니라 뜨로츠끼였다. 아무리 스딸린이 쏘련 역사를 다시 썼다고 오웰이 주장한다 한들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쏘련 인민들은 선전에 의해 통제되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것이 달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논증은 전혀 없다. 모든 반대자들이 야만적으로 진압되고 인민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이 사실들에 대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입증들이 없다. 그러한 야만주의에 대한 저항의 부족에 대한 이유들도 발견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스딸린이 쏘련과 나찌 사이의 협정에 서명을 했을 때, 스딸린이 레닌과 뜨로츠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다. 참으로 너그럽고, 이타적이고, 완전히 중립적인 부르주아의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너무나도 앞 뒤 말이 맞지 않는다.

그 내용은 스딸린이 이 협정의 서명에 대한 책임(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여 읽어내는 유물론자 레닌의 모습이었지 멘셰비끼 출신의 기회주의자 뜨로츠끼의 모습은 아니었다)과 결국 독일이 침략을 했을 때 이어지는 고통에 대한 책임도 있다는 것인데, 파시즘 독일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는 히틀러 파시스트들의 잘못이지 스딸린의 잘못이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이 바로 이 소설에 그려지고 있으며, 심지어 히틀러와 스딸린을 동일시까지 한다. 적대적인 관계의 인물마저 동일시하는 파렴치함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스딸린은 전인민의 힘을 모아 최전선에서 붉은 군대를 격려하고 싸워 파시스트들을 물리쳤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딸린에게 모든 죄를 전가시키는 것은 스딸린을 공격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 대한 최선의 공격으로 설정한 제국주의 진영의 흑색선전일 뿐이다.

언젠가 한국의 약 광고에 나왔던 문구 ‘간 때문이야’가 떠오른다. 사회주의의 몰락 등의 모든 잘못은 ‘스딸린 때문이야’인 것이다. 어쨌든 스딸린은 이 소설에 의해 형체가 유린되어 악마의 축이 되어버렸다. 왜 쏘련의 인민들이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 스딸린에 저항하여 싸우지 않았는지, 왜 인민들이 그런 잔인한 숙청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는지, 왜 인민들이 그런 무섭고 두려운 체제를 지지했는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스딸린과 뜨로츠끼에 대한 주제에 관하여 여전히 불명확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들과 싸워서 진실을 밝혀내고, 그 진실을 알려야 한다. 소설 속에서 나폴레온은 독재, 야비함, 무자비함, 허영심, 위선자, 냉정함이라는 단어들로 점철된 크고 무겁고 흉한 수퇘지로 묘사되고 있다. 바로 스딸린이었다. 반면에 스노우볼은 똑똑함, 독창성, 혁신성, 훌륭함, 전략가, 겸손함, 사상가라는 단어들로 미화된 더 젊고 정직하게 보이는 돼지로 묘사되고 있다. 바로 뜨로츠끼였다.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이러한 사실에 대한 왜곡에 찌든 소설을 읽으며 스딸린은 잔인한 독재자이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가 몰락했다는 인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온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의 지원도 있었고, 아이작 도이처의 엄청난 거짓말4)의 전기문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수정주의자 흐루쇼프의 비밀연설도 있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거짓말들을 퍼뜨려 왔고, 많은 사람들이 이 거짓말들에 현혹되어왔다. 이 현실이 바로 사회주의를 해체시킨 원인의 하나이지 결코 사회주의의 해체는 스딸린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50년 동안 줄기차게 오웰을 칭찬해왔던 파산한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일방적이고 중상적인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딸린 격하는 제국주의의 사회주의 붕괴 전략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지리멸렬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새로운 첫 발걸음은 바로 스딸린을 제자리에 복원시키는 것이다.

스딸린이 사망했을 때, 그의 20평 남짓한 아파트를 방문했던 사람들(특히 외신 기자들)은 모두가 놀랐다(그는 끄레믈린에 살지 않고 이 아파트에 살았다). 이 독재자의 집에 옷이라고는 군복과 낡은 양복 한 벌 뿐이었고 가구는 낡은 침대 하나와 낡은 옷장 하나, 중간에 탁자 하나뿐이었으며, 벽에는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파트의 벽지도 재생 벽지였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 특히 손자는 노동자일 뿐이다. 과연 이런 독재자가 있을까? 지극히 상식적으로 접근하여 멀리 갈 것 없이 이 나라의 박정희나 전두환을 생각해보라.

현재의 러시아인들 중 70% 가까이가 과거의 쏘련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통계도 있었다. 5) 그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Red Salute to Stalin!

우리의 운동은 20세기 사회주의와 스딸린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바로 세우기를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상식과 논리에 어긋나는 문학 작품이나 글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실을 찾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1) Stephen Sedley points out that the story works only if the reader understands and agrees with the conclusions Orwell is trying to demonstrate before starting the novel.(스테판 세들리는 독자가 오웰이 소설을 쓰기 전에 보여주려고 하는 결론들을 이해하고 동의할 때만, 그 소설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2) 레닌의 유언장이 위조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그로버 퍼 교수의 책 ‘흐루쇼프가 거짓말 했다’(노사과연의 기관지인 ‘정세와 노동’ 2013년 3월호(88권)에 번역되고 있다)에서는 유언장이 위조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3) 스딸린은 누군가가 그를 레닌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를 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며, 그는 단지 그가 레닌의 제자 중의 한 명일뿐이고 그 중에서 뛰어난 제자가 되기를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4) Stalin, A Political Biography, By Isaac Deutscher,Oxford University Press, 25s.
(스탈린, 정치적 전기, 엮은이 아이작 도이처,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
도이처의 풍자시-그의 책은 600페이지의 풍자시이다-는 제국주의자들이 스탈린에 의해 지도되었던 소련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 수행한 “냉전”의 부분이고 꾸러미이다. the Tory Observer, the Economist에서 the Fabian New Statesman까지의 우파언론들이 어떻게 그것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를 보는 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가치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스탈린이 “레닌주의 당의 기본을 떠 받쳤기” 때문에, 소련에 대하여, 특히 스탈린에 대하여 반동들은 분노한다(Stalin: Slander and Truth - C. Allen)

5) Northstar Compass의 글. <노/정/협>